사람이나 꽃이나 푸른사상 시선 59
채상근 지음 / 푸른사상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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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태운

새까만 숯

 

누군가의 마음

데우고 싶다

 

서시다. 시인이 치열하게 시 쓰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은 늦겨울에 눈 내리는 풍경 속 나비 한 마리처럼 푸른 봄을 기다린다. 자신의 마음을 새까맣게 태워서라도 봄을 앞당기는 나비가 온 세상에 가득하기를 바란다. 그렇기에 늦밤에 잠을 자려고 이불을 폈다가도 술자리에 나오라는 전화를 거절하지 못한다. 주섬주섬 차려입고 나가는 등 뒤에 대고 말하는 시인의 아내는 또 어떤가. 거절당하는 것보다 거절 못하는 지금이 그래도 낫다고 중얼거리는 시인의 아내가 미덥다. 시인은 인생살이 어렵고 힘들어도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며 사람들과 함께 따듯따듯 익어가는 삼겹살에 찬 소주잔을 맞부딪친다. 한세상 태어나 가파른 언덕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꽃이라고, 사람이나 꽃이나 다 한가지라고 노래한다.


호박꽃 피어날 수 있을까

 

여기는 어디인가

방사선 작업 허가서를 받고 들어온 원자로 건물

방사능에 오염되어 쓰다 버린

노란 일회용 방사선 방호용품들이

태양빛에 늘어진 호박꽃처럼 여기저기 버려진

여기는 걸리버의 나라

핵폐기물들 가득한 나라

나는 이제 어디로 발 디디고

나갈 수 있는 것일까

 

여기는 어디인가

벌레 한 마리 볼 수 없는 원자로 건물

덩치 커다란 원자로 설비들 옆에서 작업하는

노란 소인국 사람들 북적대고

이곳에서 꽃 한 송이 피워볼까

작업복 주머니에 몰래 갖고 들어온 호박씨

해바라기만한 호박꽃이라도 피어날 수 있을까

방사능 꽃을 피우는 원자로 옆에서

따뜻한 핵의 봄날 같은 겨울에

 

봄이 오지 않는 곳이 있다. 꽃도 나비도 없다. 두꺼운 콘크리트 벽 속 방사능에 오염된 쉰 공기들만 떠다닌다. 거기에 공기 공급 호흡기를 쓰고 가슴 부위와 성기는 납 차폐복을 입은 노동자들이 있다. 핵폐기물들을 갉아 먹던 쥐들의 노란 털이 모두 빠져버리는 꿈을 구는 동료와 시인이 거기 있다. 원자력 발전소만 잘 돌아가면 깨끗한 에너지 원자력과 함께 평생을 안심하고 살 수 있으리라는 홍보가 거짓이라는 것을 환히 알고 있다. 시인은 벌레 한 마리 볼 수 없는 그곳에서 따뜻한 호박꽃을 피우고 싶어 한다. 호박꽃 마음은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하는 동료를 넘어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피해자들로, 후쿠시마 원전 노동자들에게로 넓어진다. 따스한 서정과 탈핵의 새로운 관점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탈핵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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