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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블루칼라 여자 - 힘 좀 쓰는 언니들의 남초 직군 생존기
박정연 지음, 황지현 사진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평점 :
경찰 일을 하는 친구가 있다.
육체 노동을 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아주 가까이에서 비슷한 고충을 가지고 있는 그 친구가 떠오른다. 블루칼라 여성 노동자들과는 또 다른 직군이지만, 이 책을 고르는 데 그 친구의 영향이 없지 않았다. 남초 직군에서, 몸을 써서 일하고, 사명감과 즐거움 없이는 지속하기 다소 어려운 일이라는 점까지. 꽤 겹치는 지점들이 많더라. 짧은 나의 식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만날 때마다 자랑스러우면서도 걱정이 되던 그 친구의 입장과 시야를 조금 빌려 와 책을 읽었다.
처음 든 생각은 '의외로 일이 할 만해 보이고 또 의외로 더 힘들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노동 조건이 생각보다 많이 개선된 측면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부분에서는 또 생각보다도 열악했다.
이를테면 급여의 경우 일반 화이트 칼라 사무직 노동자나 다른 직군과 비교했을 때 남성과 여성이 대체로 같은 돈을 받고 일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합리적이고 평등하다. 특히 노조에 가입한 여성 노동자의 경우 노조 차원에서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실시하고 노조원으로서 여성 노동자들을 보호해준다는 점에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여전히 만만치 않게 열악한 노동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특히 10개의 직군 사이에서도 열악함의 정도나 분야가 조금씩 차이가 났다. 가령 여전히 여자 화장실이 없거나 그 화장실을 남성들이 사용해서 아예 잠가두는 바람에 사용하지 못하게 된 직군이 있는가하면, 여성이기 때문에 전문성을 인정 받지 못해서 일거리가 많이 주어지지 않거나 '아줌마' 등의 직업과 관련 없는 호칭으로 불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들이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니기에 더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여전히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남성스러운' 공간에서 비로소 나다움을 찾아낸 10인의 여성이 여기 있다. 그리고 인터뷰집에 실리지 않은, 그곳에서 바로 지금 일을 하고 있거나 일하고자 하는 무수히 많은 익명의 여성들이 있다.
처음에는 배우자의 실직이나 IMF 등의 이유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기 때문에 떠밀리듯 가장으로 일하게 된 여성들이 많다. 그런데 떠밀린 이들이 일하러 나가기 위해서는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먼저 넘어야 한다. 어딘가로 일을 하러 나가기는 해야 한다고 떠밀리지만 블루칼라 직업을 선택하면 가정에서부터 반대에 부딪힌다. 그리고 현장에 나가더라도 물리적, 정신적 차별에 부딪히며 다시 한 번 어딘가로 떠밀리게 된다. 그 모든 흔들림을 견뎌내고 비로소 일이 내 손에 닿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매우 많다. 그렇게 쟁취해 낸 일들이니 그 일들이 그들에게 얼마큼 소중하게 느껴질지 짐작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특히나 감동을 자아낸 부분을 소개하고 싶다. 의도한 부분인지 모르겠지만 10인의 여성들 중 건설 현장 내 각각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나온다. 그들은 각자 다른 지역에서 각자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매일매일 차곡차곡 성실히 해 나간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들을 한데 모으면 그것은 완전히 별개의 일이 아니라, 하나의 건물을 완성시키기 위한 유기적인 분업(을 통한 협업) 과정이기도 하다. 건물 하나를 올리기 위해 그곳에서 각자 또 같이 흘린 땀방울, 그렇게 일궈낸 결실.
인터뷰에서 일을 하기 전까지 집에서 누워만 있었다고 답변하던 인물들이 많았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들은 좁은 세계를 벗어나 건물을 쌓아올리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무기력하고 다소 가부장의 영향권 아래 있던 방을 벗어나, 자기만의 '방'으로 끊임없이 향하고 있는 것 같은 그들의 서사를 읽어냈을 때 비로소 몰려오는 감동이 있었다.
책은 이렇게 생계로 시작해서 자신을 찾아가는 중장년 여성들을 비추는가 하면, 처음부터 정력적인 도전자의 기질과 열정을 가지고 이 일로 뛰어든 청년들이나 경력 단절 여성들의 이야기도 균형 있게 비춘다. 여러 세대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인터뷰에서는 현장감이 묻어난다. 가령 인터뷰를 시작하려는 와중에도 현장 정리를 마저 하는 원영 씨나 래미콘 차에 타서 현장 두 건을 함께 뛰며 인터뷰에 응한 정숙 씨 등 곳곳에 현장감이 묻어나는 인물과 그들의 일하는 삶이 나온다.
한 마디로 '체험되는 책'이라는 소리다. 몸을 쓰는 일이기에 괜히 나까지 그 현장 안에 있는 것 같은 박력과 박진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 책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이들의 이야기가 그들 개인의 이야기에서 그치는 이야기가 아님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인터뷰어는 '여성' 노동자인 것과 별개로 노조에 소속된 노동자로서 윤석열 정부의 건설 노조 탄압 등에 대한 생각을 묻는다. 그리고 그들은 단지 하루하루 일을 해 나가고 있는데 노조라는 이유로 '건폭'이라는 억지 탄압을 받으며 당장 내일의 일자리가 남아 있을지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다. 구조적으로 규탄해야 할 문제들,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참으로 많다. 책은 그것들을 너무 무해하지도 않고 너무 무겁지도 않게 잘 담아낸다.
체계가 잡히지 않은 업무, 업무 외적인 업무까지 떠맡게 되는 경우, 화장실 문제,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 거기에 더불어 정부의 탄압까지. 일이라는 집을 짓기 위해, 자기만의 방을 쟁취하기 위해 아직도 수 겹짜리 울타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 것만 같다. 여성으로서, 노동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할 예비 노동자로서 이 의제들은 비단 블루칼라 여성들에게만 한정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절절히 느꼈다.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와 있는가?'
이 글을 보게 될, 또 이 책을 보게 될 여성들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점차 둘러싼 울타리를 따로 또 같이 넘어갈 수 있는 희망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기원을 글의 말미에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