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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평점 :
'선과 악은 동시성과 양면성을 가진다' 라는, 어찌보면 당연해서 흔해빠져 버린 그 명제에 대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의 서사 한편으로 검증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이야기' 는 학술서적의 어떤 완벽한 논리보다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깨닫게 만드는 힘이 있고 그것이 문학의 가치라고 여겨진다.
첫째 아들 드미트리와 둘째아들 이반, 셋째 아들 알렉세이와 이복형제 스메르자코프는 악마와 천사처럼 늘 대립하는 인격이 정확한 경계로 나뉘어 있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표현한 인물들이다.
대립하는 선과악은 하나의 모습이 다른 하나의 모습과 비교되어야만 더욱 그 본질을 빛낼 수 있고, 궁극에는 양극을 포용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읽는 이로 하여금 이끌어내게 한다.
도스토예프스키 내면에 충실히 차지한 종교(러시아정교회)에 따라,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신 것이 맞다면 그때 이미 선과 함께 악도 만들어진 모양이다. 그러므로 완벽한 세상을 만드시지 못했다는 것은, 하느님이 빚은 인간 역시 선과악의 씨앗을 모두 잉태한 채로 세상에 나와 최초의 살해자가 된 카인의 일례로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완벽하지 못한 세상은 희한하게 선과악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존재하며 언제든 동전의 양면처럼 뒤집힐 수 있는 속성이 선악의 모순된 균형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은 아버지 표도르파블로비치가 어떤 인물인가를 설명하며
시작한다.
<본문중에서>
'......즉 너절하고 방탕할 뿐만 아니라 아둔해빠진 인간 유형 - 그러나 자신의 재산과 관련된 자질구레한 일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처리할 줄 알고, 오로지 이런 일 하나만 할 줄 아는 듯싶은 그런 자들에 속하는 유형이었다는 점이다.(중략)......다시금 되풀이 하지만, 이건 얼뜨기라는 얘기가 아니다. 이 반미치광이들 중 대다수는 꽤나 영리하고 교활하며 -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름아닌 아둔함. 그것도 그 어떤 독특한, 민족적인 아둔함이다.'
표도르를 묘사하는 대목을 읽어보자면, 원시적 본능에 충실한 태생적으로 악한 인물이다.
성경의 구약에서 조물주의 말씀으로 세계가 탄생하며 창세기가 시작하는데, 그때의 세계란 가꾸어짐이 없는 야만의 세계로 표도르가 곧 그러하다. 천국을 닮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평생을 살아야 할 야만의 세계가 표도르가 존재하는 곳이다.
이러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인물인 알렉세이는 야만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가장 반대편에 위치하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다음은 알렉세이의 심성을 확연히 드러내 주는 본문의 내용으로, 가혹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특별한 한 사람이 필요하다면 바로 이러한 모습이리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이 묻어나는 장면이다.
<본문중에서>
'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리가 나쁜 사람이 되는 두려운 경우를 위해서 입니다. 하지만 왜 우리가 나쁜 사람이 되겠습니까, 안 그런가요, 여러분? 우리는 첫째 무엇보다도, 착한 사람이 되고, 다음으로는 정직한 사람이 되고, 다음으로는 절대로 서로를 잊지 맙시다. 나는 이것을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나로서도 약속하지만, 여러분 여러분 중 어느 누구도 나는 잊지 않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를 보고 있는 여러분의 얼굴을 삼십 년 후에도 하나하나 모두 다 기억할 것입니다.(중략)...... 여러분 모두를 내 마음속에 간직할 테니, 여러분도 부디 나를 여러분 마음속에 간직해주십시오.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평생토록 항상 기억하게 될, 그리고 기억하고자 하는 이 선량하고 훌륭한 감정 속에 우리를 결합시켜 준 사람이 누구인가요, 저 착한 소년, 사랑스러운 소년, 우리에게 영원히 소중한 소년, 바로 일류세치카 아닙니까? 이 소년을 절대로 잊지 맙시다, 이 소년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합시다, 지금부터 영원토록! '
1권의 첫장에서 표도르를 설명하는 것과 대비를 이루며 3권의 마지막 장을 채워가는 이 내용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완벽하지 않은 이 세계에서 지향해야 할 바를 의미심장하게 얘기해 주고 있다
알렉세이는 자신을 비롯한 그의 형제들을 완전히 잊어버림으로써 자식들을 방치하고 학대한 아버지와 길 잃은 어린양처럼 죄의 유혹에서 어쩌지 못하는 형을 미워하지 않고 포용함으로써 모두에게 신뢰받고 사랑받는 존재이다.
알렉세이의 형 드미트리와 이반, 그리고 이복형제 스메르쟈코프는 야만의 세계에서 흔들리는 인물들로, 괴테의 '파우스트' 속 명대사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라는 말처럼 방황하는 가운데 치열하게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는 가장 인간다운 유형이다. 이들은 아버지 표도르로부터 유기당함으로써 내면은 악한으로 물들고, 친부살해라는 끔찍한 행위에 대해 내면적으로든, 외면적으로든 유죄의 행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드미트리에게서는 선악이 마구잡이로 속삭일 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시련에 빠지는 인간의 모습이 발견된다. 아버지 표도르에게 제 몫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살해도 무릎 쓸 기세를 보이지만 정작 실현시키진 못한다.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된 드미트리의 최후의 진술 중 '방탕하게 살았지만 선을 사랑했습니다. 매 순간 개과천선하고자 노력했지만 선을 사랑했습니다......' 라는 말에서 드미트리의 본심이 느껴진다. 아버지를 죽이라는 악마의 목소리와 천사의 회유 가운데서 선이 이긴 순간이 될 것이다. 드미트리는 얼핏보기에 형제들 중 가장 망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드미트리에게 '신'이라는 최소한의 울타리는 만들어 준 것 같다. 신의 울타리를 부정하는 자가 선택한 길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는 오히려 드미트리가 아닌 이반에게서 볼 수 있다.
이반이 신을 부정한 이유가 무엇일까?
종교의 굴레를 벗어나야만 인간에게 온전한 자유가 주어진다는 당시의 거창한 시대적 흐름 너머에 있는 이반의 개인적인 고통을 주목하고 싶다. 아버지로부터 존재를 부정당한 어린시절과 그렇게도 냉혹한 사람이 내 아버지라는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은 세상을 향한 불신이 되어 버렸는데, 이반의 지성은 그러한 고통스런 의식에 대한 방저기제로써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는 결론에 이르게 하지 않았을까? 이는 '죄와벌' 의 라스꼴리니꼬프가 신을 부정하고 스스로에게 고리대금업자를 죽이도록 허용함으로써 세상을 향한 허무주의를 해결하고 싶어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싶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와 같은 의식을 소유한 이반을 '오만' 으로 인해 한계를 드러내는 인물로 설정한 것 같다. 신이 없는 세상의 오만한 인간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며, 오히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은 이복형제일지도 모르는 스메르쟈코프에게로 이어진다.
이반과 스메르쟈코프는 표도르를 살해하고자 하는 내적으로 동일한 생각을 가졌지만 이반은 애써 부인하며, 근본을 알 수 없는 하인 스메르쟈코프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음에 경멸을 느끼기까지 한다. 스메르쟈코프가 표도르를 살해 할 수도 있음을 넌지시 내비칠 때 친부의 살해를 저지할 수도 있었을 상황에 침묵함으로써 이반은 스메르쟈코프의 살해계획에 동조한다. 나아가 이반 스스로는 피를 묻히기 싫지만 의식적으로 살해를 유도해 직접살인 보다 더욱 무거운 '양심의 가책' 이라는 통찰을, 바로 스메르쟈코프로부터 얻게 되는 것이다.
알렉세이는 형 이반이 신을 저버렸다고는 하지만 '양심의 가책'은 '신의 진리' 이며, 그것은 '모든 것이 허용된다' 는 자유주의 사상 또한 신이라는 품 안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음을 역설한다. 이 점은 현대인의 입장에서 논박해 볼 거리가 많은 대목이다. '양심의 가책' 이 인간의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는가? 인간은 종교(신)없이 스스로 양심이나 도덕, 박애와 같은 정신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가? 모든 선의 실천이 신의 진리라면 왜 세상은 신이 추구하는 원칙대로 돌아가지 않는가? 신이라는 강력한 기제가 작동하는 세상인데도 말이다.
스메르쟈코프는 '신' 이 있다면 자신을 만든 신에게서 조차 버림받았을지도 모를만큼 처절한 인간이다. 때문에 가장 가엷은 인간이기도 하다. 그의 의지대로 스메르쟈코프가 되었나? 정상적이지 못했던 친모의 몸에서 표도르의 가학적인 방식으로 잉태되었으며, 태어난 곳이란 같은 인간과도 대등하지 못한채로 살아야만 하는 장소였다. 스메르쟈코프는 그러한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을까? 그랬다면 이반이 모든것이 허용된다고 했을 때, 그는 신을 버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핑계를 대신 대어 주고 싶다. 자신의 목숨을 끊음으로써 마지막까지 스메르쟈코프는 신과 신이 만든 세상과 화해하지 못하는 가장 비극적인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리스도교 교리 또한 자살한 사람은 지옥행으로 명시함으로써 인간의 의지로 목숨을 끊는 것을 죄악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메르쟈코프의 죽음에 세상은, 또한 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종국의 희망은 알렉세이이다.
알렉세이는 은둔자로 혼자서만 도도히 신앙심을 키우고 마는 수도승이 아니라 세상의 어두운 구석을 찾아 빛이 스며들게 하는 예수님의 행보를 실천하고자 한다. 대심문관의 에피소드가 우리에게 주는 깨달음대로, 그는 악함을 심판하기 보다는 입맞춤으로 감싸안는 박애주의자인 것이다.
저열한 인간 아버지 표도르에게, 방황하는 인간 드미트리에게, 신을 부정하는 오만한 인간 이반에게, 끝끝내 세상에 대한 저주를 가슴에 담은 채 죽어갔던 스메르쟈코프에게,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인간에게 두려움으로 다가가는 하느님이 아닌, 그 흔하디 흔한 '사랑' 을 나누는 사람으로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쁜짓 열가지를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기는 쉬우나 한번의 사랑을 베푸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 점에서 사랑을 주는 일은 인류가 이뤄가야할 보편적 행동이나, 참으로 어려운 실천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가 없다.
" 영원히 이렇게, 평생 이렇게 손에 손을 잡고! "(본문중에서)
라며 사랑의 연대를 주장하는 알렉세이의 이 외침은 비관으로 일관된 세상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종교인 비종교인 할 것 없이 손을 내밀어 주는 그의 참모습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서문에서 밝힌대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2,3권은 전체의 1부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2부는 혁명가 알렉세이의 본격적인 이야기를 그리겠다고 했다. 1부는 2부를 위한 초석이었음을 설명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계획이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알렉세이가 '신의 진리를 전달하는 자로서, 또한 조시마장로의 거룩하지 못한 죽음 앞에서 흔들렸던 모습 그대로의 인간 알렉세이로서, 그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짐작해 보는 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독자의 몫으로 남을 수 밖에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