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폐지하라 -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세계를 상상하는 법
소피 루이스 지음, 성원 옮김 / 서해문집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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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제도 문제와 관련하여 썩 좋은 책은 아닙니다.
주장에 대한 근거가 매우 낮은 차원에서 서술되어 있어서 사회과학이라기 보다 에세이로 분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히려 미셸 바렛, 메리 맥킨토시의 <반사회적 가족>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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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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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태생이라는 이유에서 '아룬다티 로이'는 작가로는 생소한 이름이다. 또 그런 이유로, 이미 익숙한 서구권 작가가 아니라는 점에서 <지복의 성자>를 읽게 되었고, 이어서 <자본주의:유령이야기>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픽션인 <지복의 성자>와 비교하면 <자본주의:유령이야기>는 논픽션으로 '르포르타주' 이다. 본질적으로 다른 장르이지만 둘은 소통하고 있으며 픽션과 논픽션을 유기적으로 연결지어 결국 하나의 주제로 모아내는 작가의 다재다능을 독자들은 경험할 수 있다. <지복의 성자>는 <자본주의:유령이야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미시적인 개인사를 비춰주고 있기 때문에 두 권을 함께 읽기를 권해 본다. 인도에 살지만 인도 밖으로 밀려난 일개의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스러움의 자리를 구축해 가는 사람들을 그려내는 이 책을 이해하고 싶어서 리뷰를 쓰게 되었다.



이야기는 두 개의 성(性)을 동시에 가지고 태어난 아프타브로부터 시작한다. 남성과 여성을 한 몸에 지닌 채 살아가야 할 이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작가가 뜻하는 바를 상징적으로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두 개의 성을 가진 자'는 세상이 허용하는 사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로 그 어느쪽 세계에도 속할 수 없는 자이다. 아프타브의 아버지 물라카트 알리는 아들의 비정상을 정상(여성을 죽이고 남성을 살리는)으로 갖추기 위해 수술을 강행시키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또한 아프타브는 점점 남성성이 강해지는 자신의 육체를 견디지 못한다. 그는 여자가 되고 싶었고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결코 허락되지 않을 곳에 있었다. 결국 자신의 존재를 명확하게 규정 지어 줄 수 없는 두니야(세상)에서 빠져나와 히즈라들의 공동체로 들어가게 되고, 지도자 우스타드 쿨숨비로부터 '안줌' 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아 그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곳은 공기가 그에게 자리를 내주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장소였다. 그가 도착하면 마치 학교 교실에서 앉을 자리를 내주는 친구처럼 공기가 옆으로 슬그머니 물러나는 듯했다. 아프타브는 수개월 동안 콰브가 거주자들의 심부름을 해주고 , 그들이 순회공연을 나갈 때 가방과 악기를 들어주고, 하루 일과가 끝난 후 그들의 지친 발을 주물러주며 공을 들인 끝에 용케 콰브가에 입성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곳에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진 날이 온 것이었다. 그는 천국의 문이라도 지나듯 허물어져가는 평범한 집으로 들어갔다.'




아룬다티 로이가 그려낸 '인도'는 이러한 아프타브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히즈라(남성의 몸에 갇힌 여성)이기 때문에, 달리트(불가촉 천민)이기 때문에, 이슬람교도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히즈라와 달리트가 아니며 이슬람교도는 더욱 아닌 인도의 다수로부터 박해받는 현실을 치부로 드러낸다.


성인이 된 안줌의 삶은 인도의 역사(현재진행중인)와 맞물려 있다. 특히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 '구자라트 학살'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 안줌이 있다. 사건은 힌두교와 이슬람교도간의 종교적 갈등이 빚어낸 잔인한 비극의 결과였다. 2002년, 안줌이 타고 있던 기차는 성지순례객을 태우고 돌아오고 있었다. 우연히 발생한 화재로 인해 무슬림 거주지역에 정차한 기차를 마을의 군중들이 돌을 던지는 일이 일어났다. 이는 곧장 무슬림들의 테러행위로 간주되어 힌두교무리들의 이슬람교도를 향한 피의 복수로 이어진다.


'안줌은 그들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알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들이 어떻게 남자들을 접고 여자들을 펼쳤는지, 그리고 결국은 어떻게 사지를 갈가리 찢고 불에 태웠는지에 대해.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들. 그들, 누구? 동등한 반작용을 가하기 위해 동원된 뉴턴의 군대. 강철 발톱과 피투성이 부리를 가진 삼만의 사프란색 앵무새들이 한꺼번에 깍깍거렸다. 무살만 카 에크 히 스탄! 카브리스탄 야 파키스탄! 이슬람교도를 위한 땅은 오직 한 곳뿐! 묘지 아니면 파키스탄! '



안줌은 학살의 현장에서 히즈라를 건드리면 악운이 따른다고 믿는 힌두교 극단주의자들의 믿음때문에 죽음을 모면했지만 충격의 여운은 오랫동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공포의 기억은 이후의 그녀를 안줌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꾸리게 함으로써 조금씩 물러났다. 자신을 이 끔찍한 세상에 존재케 한, 이미 저승사람이 되어버린 그들의 묘지를 찾아 갔을 때, 그녀의 영혼의 절반은 죽은자의 것이었다. 망자들의 무덤가는 현실이 뚫고 들어올 수 없는 묘한 안정감으로 영역을 넓혀 나갔다. 안줌은 그렇게 했다. '추락하는 사람들의 보금자리' 로 변모해 갔다. 저마다의 추락의 역사를 가진 이들이 마치 최종적인 운명의 장소가 계획되어 진 것처럼 그렇게 안줌의 보금자로 들어가게 된다. 죽어서도 갈 곳 없는 시신과 힌두교도들에 의해 살해당한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살아가는 사담, 경찰의 탈을 쓴 힌두교도들로 부터 강간당한 마오주의자가 낳은 부정당한 아기, 그리고 틸로가 그들이다. 틸로는 또다른 한 편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인물로 그녀가 잔나트 게스트 하우스(안줌의 공동체)에 오기까지의 여정은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분쟁으로 지옥이 되어버린 카슈미르의 과거와 현재를 묘사한다. 인도는 분쟁지역에서 벌어지는 종교적 반목의 심리를 이용하여 그야말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틸로가 사랑하는 인물 '무사'는 무고한 사람들의 선봉에서 카슈미르를 절벽 끝으로 몰아가는 인도에 저항한다.


"언젠가는 카슈미르도 그런 식으로 인도를 자폭하게 만들 거야. 그때쯤 너희는 공기총으로 우리 모두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부 눈이 멀게 만들어버렸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눈이 성한 너희들은 너희가 우리에게 한 짓을 볼 수 있을 거야. 너희는 우리를 파괴하고 있는게 아냐. 일으켜세우고 있는 거지. 너희가 파괴하고 있는건 너희들 자신이야."




틸로와 무사를 소설속의 주인공으로만 인식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자본주의:유령이야기>에서 말한다. "카슈미르에서의 전쟁은 세계의 눈에는 포용적인 세속적 민주주의와 급진적인 이슬람주의자들 사이의 전투로 보인다." 라고. 그정도의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테지만 적어도 이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은, 급진적인 이슬람주의자도 포용적인 세속적 민주주의도 '없다'는 것이다. '있는 것'은 국가간의 충돌하는 이해관계 아래에 위치한 수많은 틸로와 무사가 무덤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틸로는 무사를 사랑했고 인도편에 설 수 없었으며 그로인해 세상에 편입할 수 없는 인물이 되어 안줌의 울타리로 들어서게 되었다. 안줌의 친구 님모 그라코푸리는 '신은 행복할 수 없는 생물체를 만들어 보기로 한 하나의 실험'으로 히즈라를 만들었다고 했다. 히즈라인 안줌은 신의 실험을 성공시켰을까?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그 거대한 실험의 장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을까?


그토록 넓은 땅 인도, 그 안에서도 행복은 찾아볼 수 없을성 싶은 묘지 안에 안줌의 작은 공동체가 생겨났다. 산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닌 장소에는 뜻밖에 현실의 세상이 갖추고 있지 않은 것들이 있다. 각자의 세상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연대'가 그것이다. 저주처럼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 지고의 여성인 엄마가 되고 싶었던 히즈라 안줌에게 연대의 품을 실현시키게 한 작가의 상상력은, 거대한 실험의 장을 절망적으로 끝내도록 내버려 둘 수 없음을 시사한다.


안줌의 존재에 대한 희망섞인 당위를 떠올리며,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한 구절을 언급하고 싶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 가운데서 지옥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지옥이 아닌 곳을 찾아내어 그곳을 지속시키려는 사람들, 그들이 '지복의 성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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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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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은 동시성과 양면성을 가진다' 라는, 어찌보면 당연해서 흔해빠져 버린 그 명제에 대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의 서사 한편으로 검증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이야기' 는 학술서적의 어떤 완벽한 논리보다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깨닫게 만드는 힘이 있고 그것이 문학의 가치라고 여겨진다.


첫째 아들 드미트리와 둘째아들 이반, 셋째 아들 알렉세이와 이복형제 스메르자코프는 악마와 천사처럼 늘 대립하는 인격이 정확한 경계로 나뉘어 있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표현한 인물들이다.

대립하는 선과악은 하나의 모습이 다른 하나의 모습과 비교되어야만 더욱 그 본질을 빛낼 수 있고, 궁극에는 양극을 포용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읽는 이로 하여금 이끌어내게 한다.


도스토예프스키 내면에 충실히 차지한 종교(러시아정교회)에 따라,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신 것이 맞다면 그때 이미 선과 함께 악도 만들어진 모양이다. 그러므로 완벽한 세상을 만드시지 못했다는 것은, 하느님이 빚은 인간 역시 선과악의 씨앗을 모두 잉태한 채로 세상에 나와 최초의 살해자가 된 카인의 일례로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완벽하지 못한 세상은 희한하게 선과악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존재하며 언제든 동전의 양면처럼 뒤집힐 수 있는 속성이 선악의 모순된 균형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은 아버지 표도르파블로비치가 어떤 인물인가를 설명하며

시작한다.


<본문중에서>
'......즉 너절하고 방탕할 뿐만 아니라 아둔해빠진 인간 유형 - 그러나 자신의 재산과 관련된 자질구레한 일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처리할 줄 알고, 오로지 이런 일 하나만 할 줄 아는 듯싶은 그런 자들에 속하는 유형이었다는 점이다.(중략)......다시금 되풀이 하지만, 이건 얼뜨기라는 얘기가 아니다. 이 반미치광이들 중 대다수는 꽤나 영리하고 교활하며 -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름아닌 아둔함. 그것도 그 어떤 독특한, 민족적인 아둔함이다.'

 

표도르를 묘사하는 대목을 읽어보자면, 원시적 본능에 충실한 태생적으로 악한 인물이다.
성경의 구약에서 조물주의 말씀으로 세계가 탄생하며 창세기가 시작하는데, 그때의 세계란 가꾸어짐이 없는 야만의 세계로 표도르가 곧 그러하다. 천국을 닮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평생을 살아야 할 야만의 세계가 표도르가 존재하는 곳이다.


이러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인물인 알렉세이는 야만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가장 반대편에 위치하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다음은 알렉세이의 심성을 확연히 드러내 주는 본문의 내용으로, 가혹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특별한 한 사람이 필요하다면 바로 이러한 모습이리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이 묻어나는 장면이다.


<본문중에서>
'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리가 나쁜 사람이 되는 두려운 경우를 위해서 입니다. 하지만 왜 우리가 나쁜 사람이 되겠습니까, 안 그런가요, 여러분? 우리는 첫째 무엇보다도, 착한 사람이 되고, 다음으로는 정직한 사람이 되고, 다음으로는 절대로 서로를 잊지 맙시다. 나는 이것을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나로서도 약속하지만, 여러분 여러분 중 어느 누구도 나는 잊지 않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를 보고 있는 여러분의 얼굴을 삼십 년 후에도 하나하나 모두 다 기억할 것입니다.(중략)...... 여러분 모두를 내 마음속에 간직할 테니, 여러분도 부디 나를 여러분 마음속에 간직해주십시오.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평생토록 항상 기억하게 될, 그리고 기억하고자 하는 이 선량하고 훌륭한 감정 속에 우리를 결합시켜 준 사람이 누구인가요, 저 착한 소년, 사랑스러운 소년, 우리에게 영원히 소중한 소년, 바로 일류세치카 아닙니까? 이 소년을 절대로 잊지 맙시다, 이 소년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합시다, 지금부터 영원토록! '

 

1권의 첫장에서 표도르를 설명하는 것과 대비를 이루며 3권의 마지막 장을 채워가는 이 내용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완벽하지 않은 이 세계에서 지향해야 할 바를 의미심장하게 얘기해 주고 있다

 

알렉세이는 자신을 비롯한 그의 형제들을 완전히 잊어버림으로써 자식들을 방치하고 학대한 아버지와 길 잃은 어린양처럼 죄의 유혹에서 어쩌지 못하는 형을 미워하지 않고 포용함으로써 모두에게 신뢰받고 사랑받는 존재이다.


알렉세이의 형 드미트리와 이반, 그리고 이복형제 스메르쟈코프는 야만의 세계에서 흔들리는 인물들로, 괴테의 '파우스트' 속 명대사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라는 말처럼 방황하는 가운데 치열하게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는 가장 인간다운 유형이다. 이들은 아버지 표도르로부터 유기당함으로써 내면은 악한으로 물들고,친부살해라는 끔찍한 행위에 대해 내면적으로든, 외면적으로든 유죄의 행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드미트리에게서는 선악이 마구잡이로 속삭일 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시련에 빠지는 인간의 모습이 발견된다. 아버지 표도르에게 제 몫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살해도 무릎 쓸 기세를 보이지만 정작 실현시키진 못한다.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된 드미트리의 최후의 진술 중 '방탕하게 살았지만 선을 사랑했습니다. 매 순간 개과천선하고자 노력했지만 선을 사랑했습니다......' 라는 말에서 드미트리의 본심이 느껴진다. 아버지를 죽이라는 악마의 목소리와 천사의 회유 가운데서 선이 이긴 순간이 될 것이다. 드미트리는 얼핏보기에 형제들 중 가장 망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드미트리에게 '신'이라는 최소한의 울타리는 만들어 준 것 같다. 신의 울타리를 부정하는 자가 선택한 길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는 오히려 드미트리가 아닌 이반에게서 볼 수 있다.

 

 

이반이 신을 부정한 이유가 무엇일까?
종교의 굴레를 벗어나야만 인간에게 온전한 자유가 주어진다는 당시의 거창한 시대적 흐름 너머에 있는 이반의 개인적인 고통을 주목하고 싶다. 아버지로부터 존재를 부정당한 어린시절과 그렇게도 냉혹한 사람이 내 아버지라는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은  세상을 향한 불신이 되어 버렸는데, 이반의 지성은 그러한 고통스런 의식에 대한 방저기제로써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는 결론에 이르게 하지 않았을까? 이는 '죄와벌' 의 라스꼴리니꼬프가 신을 부정하고 스스로에게 고리대금업자를 죽이도록 허용함으로써 세상을 향한 허무주의를 해결하고 싶어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싶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와 같은 의식을 소유한 이반을 '오만' 으로 인해 한계를 드러내는 인물로 설정한 것 같다. 신이 없는 세상의 오만한 인간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며, 오히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은 이복형제일지도 모르는 스메르쟈코프에게로 이어진다.

 

이반과 스메르쟈코프는 표도르를 살해하고자 하는 내적으로 동일한 생각을 가졌지만 이반은 애써 부인하며, 근본을 알 수 없는 하인 스메르쟈코프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음에 경멸을 느끼기까지 한다. 스메르쟈코프가 표도르를 살해 할 수도 있음을 넌지시 내비칠 때 친부의 살해를 저지할 수도 있었을 상황에 침묵함으로써 이반은 스메르쟈코프의 살해계획에 동조한다. 나아가 이반 스스로는 피를 묻히기 싫지만 의식적으로 살해를 유도해 직접살인 보다 더욱 무거운 '양심의 가책' 이라는 통찰을, 바로 스메르쟈코프로부터 얻게 되는 것이다.

 

 

알렉세이는 형 이반이 신을 저버렸다고는 하지만 '양심의 가책'은 '신의 진리' 이며, 그것은 '모든 것이 허용된다' 는 자유주의 사상 또한 신이라는 품 안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음을 역설한다. 이 점은 현대인의 입장에서 논박해 볼 거리가 많은 대목이다. '양심의 가책' 이 인간의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는가? 인간은 종교(신)없이 스스로 양심이나 도덕, 박애와 같은 정신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가? 모든 선의 실천이 신의 진리라면 ​왜 세상은 신이 추구하는 원칙대로 돌아가지 않는가? 신이라는 강력한 기제가 작동하는 세상인데도 말이다.

 

스메르쟈코프는 '신' 이 있다면 자신을 만든 신에게서 조차 버림받았을지도 모를만큼 처절한 인간이다. 때문에 가장 가엷은 인간이기도 하다. 그의 의지대로 스메르쟈코프가 되었나? 정상적이지 못했던 친모의 몸에서 표도르의 가학적인 방식으로 잉태되었으며, 태어난 곳이란 같은 인간과도 대등하지 못한채로 살아야만 하는 장소였다. 스메르쟈코프는 그러한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을까? 그랬다면 이반이 모든것이 허용된다고 했을 때, 그는 신을 버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핑계를 대신 ​대어 주고 싶다. 자신의 목숨을 끊음으로써 마지막까지 스메르쟈코프는 신과 신이 만든 세상과 화해하지 못하는 가장 비극적인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리스도교 교리 또한 자살한 사람은 지옥행으로 명시함으로써 인간의 의지로 목숨을 끊는 것을 죄악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메르쟈코프의 죽음에 세상은, 또한 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는가?

 

 

​종국의 희망은 알렉세이이다.

알렉세이는 은둔자로 혼자서만 도도히 신앙심을 키우고 마는 수도승이 아니라 세상의 어두운 구석을 찾아 빛이 스며들게 하는 예수님의 행보를 실천하고자 한다. 대심문관의 에피소드가 우리에게 주는 깨달음대로, 그는 악함을 심판하기 보다는 입맞춤으로 감싸안는 박애주의자인 것이다​.

저열한 인간 아버지 표도르에게, 방황하는 인간 드미트리에게, 신을 부정하는 오만한 인간 이반에게, 끝끝내 세상에 대한 저주를 가슴에 담은 채 죽어갔던 스메르쟈코프에게,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인간에게 두려움으로 다가가는 하느님이 아닌, 그 흔하디 흔한 '사랑' 을 나누는 사람으로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쁜짓 열가지를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기는 쉬우나 한번의 사랑을 베푸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런 점에서 사랑을 주는 일은 인류가 이뤄가야할 보편적 행동이나, 참으로 어려운 실천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가 없다.

 

​" 영원히 이렇게, 평생 이렇게 손에 손을 잡고! "(본문중에서)

​라며 사랑의 연대를 주장하는 알렉세이의 이 외침은 비관으로 일관된 세상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종교인 비종교인 할 것 없이 손을 내밀어 주는 그의 참모습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서문에서 밝힌대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2,3권은 전체의 1부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2부는 혁명가 알렉세이의 본격적인 이야기를 그리겠다고 했다. 1부는 2부를 위한 초석이었음을 설명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계획이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알렉세이가 '신의 진리를 전달하는 자로서, 또한 조시마장로의 거룩하지 못한 죽음 앞에서 흔들렸던 모습 그대로의 인간 알렉세이로서, 그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짐작해 보는 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독자의 몫으로 남을 수 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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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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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지나간 일이긴 해도 다 잊은 것은 아니라서

머리속의 어떤 부분들에 여전히 한자리를 차지한 채

숨죽이고 있는 것들, 그것들을 과거의 이야기라고

뭉뚱그려 부른다.

 

좋았던 일, 나빴던 일, 행복했던 일, 불행했던 일...

또 더 많은 이름들이 붙여진 이러저러 했던

일들이 합쳐진 채로 웅크리고 있던 것들이

불특정한 어느 순간에 기억이라는 행위를 빌어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기억은 현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작동되기도 하는데

그럴때면 해결할 수 없는 당혹감으로 흥분에 휩싸이기도

하고 반대편으로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어느쪽이 되었든 과거의 기억은 지금의 '나' 를

여전히 지배하기 때문이다.

 

책속의 주인공 도발레는 과거의 이야기를 잘 포장하여

관객들에게 풀어 놓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다.

볼품없는 외모에 대한 묘사를 상쇄시키는 그의 언변

속에는 이야기를 맛깔나게 하기 위한 갖은 양념들이

쳐져 있다. 개그, 풍자, 조롱, 비난, 과장, 거짓말 등등.

그리고 도발레의 진심이라는 양념까지.

 

여느때처럼 느껴지는 도발레의 스탠드업 코미디가

무대에 등장하고, 나는 독자이자 한 사람의 관객으로

책을 시작 한다.

시시껄렁한 잡담이 만담을 이루는 가운데 솔직히

독자로서도, 관객으로서도 도발레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도발레의 입심의 바탕에 깔려있는 이스라엘 문화의

배경지식에 대한 부재. 더불어 또다른 책 속의 인물

아비샤이가 통렬한 비판을 가했던 대로,

모든 사람과 모든 것에 대한 개그화와 희화화에 대한

도발레의 말폭탄에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독자 나와 함께,

몇십년만에 다짜고짜 걸려온 도발레의 전화 한통으로

학창시절에 나누었던 짧은 우정을 상기시켜 보기도

전에, 느닷없이 옛친구의 공연에 초대된 은퇴한 판사

아비샤이 역시도 무대를 바라보는 자리가 어색하기만

하고, 그 장면을 제3자의 눈으로 따라가는 나도

그렇긴 마찬가지다.

 

오랜 시간의 공백에 대한 준비 없이 도발레와

아비샤이는 전화기를 사이에 두고 만났다.

도발레의 용건은 그저 자신의 쇼에 와달라는 것.

그러면서 나열되는 대사로 인해 독자 나와

아비샤이는 무장해제 되어 간다.

 

" 내 쇼에 와주었으면 좋겠어.

나를 봐주었으면 좋겠어.

이유는 없어. 날 위한 거야.

이봐, 나도 이게 느닷없다는거 알아.

하지만 그뿐이야. 때가 된거지. "

 

" 내 말은 있잖아. 사람들이 나를 볼 때 뭘 얻느냐는

거야. 나를 볼 때 뭘 알게 되지......"

 

" 어떤 사람에게서 제어 불가능하게 그냥

흘러나오는거 있잖아. 세상에서 오직 이 한사람만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 그거. "

 

도발레에 대한 편견과 뜻모를 벽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진지하게 유지되었던 감정이

대사로, 그의 말로 표현되고 독자 나와 아비샤이는

도발레를 향하여 움직인다. 그 지점은 이 책을 긑까지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과 아비샤이가 도발레의

공연이 끝날때까지 관객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만나게 되는 곳이다.

 

잡스러운 이야기와 일순간의 웃음만을 위한,

알맹이는 빠지고 자극적인 양념뿐인 말들에서

어느 순간 무대와는 어우러지지 않는 진지한

과거의 이야기가 주가 되어 간다.

진실한 이야기. 그러나 가벼운 유머로 연막이 쳐진

말들에서 아비샤이는 오직 '그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의 광채' '진동처럼 전해지는 고유성'

'그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그사람에게서 잘못되고

뒤틀린 것들 너머에 놓인 모든 것' 을 찾고자 한다.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의 모순된 부정,

홀로코스트의 악몽으로 인한 후유증을 앓고

있는 어머니,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친구들의 집단 괴롭힘.

무겁게라도 꺼낼 수 없는 얘기들이

자기비하적인 웃음을 곁들인 도발레의

말잔치로 이어진다.

 

그의 고통을 끌어모아 밥벌이의 재료로 삼고 있는

사람 도발레. 과장된 연기와 코미디는 점점 하나도

우습지 않다. 도리어 마치 생에 마지막 고백과도 같은

공연에서 도발레가 진정 꺼내 보이고 싶은 '그것' 이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알아 간다.

 

엄마의 죽음, 장례식을 받아들이지 못해 발버둥치는

어린 도발레의 모습을 다시금 연기하는 장면은

처절해지고, 나는 끝까지 함께 남은 관객이 되어

고통을 공유한다.

 

아비샤이의 짐작처럼 도발레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것일까? 인생의 마지막 정점을 위해 오늘의 공연을

준비하고 과거와 현재의 쓴맛을 다 쏟아 놓고 싶은

사람으로 오래전 도발레가 바라는 것 없이

우정을 주었던 그 아비샤이가 필요 했던 것일까?

 

주인공 도발레, 57세의 스탠드업 코미디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람들을 웃게 만들어야 하는

스트레스' 와 '사랑해달라고 구걸하는 것' 이 자신의

본분이라고 외치는 사람.

책의 초반부에서 도발레가 부탁했던 질문

" 사람들이 날 볼 때 뭘 얻느냐는거야.

나를 볼 때 뭘 알게 되지...... "

아비샤이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마이크를 잡은 사람과 관객,

이야기하는 자와 듣는 자라는 일방향적으로 보이는

모습 뒤에서 도발레와 아비샤이는 각자의 의식 안에서

보이지 않는 '그것' 을 주고 받는다.

둘의 10대는 원치 않았지만,

세상이 이끄는대로 갈라질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미완성 된 채 과거로 굳어졌고,

다시금 마주 앉은 지금, 도발레의 괴로움을 보고도

방관자를 고수했던 아비샤이가 한참이나 늦어버린

우정을 줄 수 있는 시간으로 다가 온다.

 

도발레는 아비샤이에게 무엇도 의도하지 않았고

바라지 않았던 과거의 모습 그대로 아비샤이 앞에

섰다.

' 내 쇼를 봐달라는 것 '

'나를 봐달라는 것 '

그것 말고 불순한 다른 것은 없다.

 

독자 '나' 는 도발레와 아비샤이에게 과거의

불행으로부터 '치유' 가 일어나길 바란다.

도발레의 우습고도 슬픈 말들이 고백되어

마음의 고통이 잦아들기를. 도발레의 고백에 담긴

고유성을 알아차린 아비샤이가 남은 시간,

다하지 못했던 우정 위에 존재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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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 개정판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 / 학고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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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희비가 반복되며 돌아가는 긴 역사의 한 부분을 보다 높은 곳에서 관망해 보는 일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과거의 역사를 끊임없이 캐물으며 논하는 일은 현재가 나아갈 바를 정확히 지시해 줄 수는 없으나,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내서는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
과거와 현재, 미래는 무한히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고리에서 알고리즘을 발견하고 그 알고리즘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이 역사를 기록하게 했으니 철이 지나 먼지가 쌓인 안내서라 할지라도 그것은 지금도 유용하다.
.
소설 남한산성은 그런 면에서 인조 14년과 2017년을 연결시켜, 현재가 겪고 있는 다양한 현상들을 판단할 수 있도록하는 안내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최명길이 옳았느냐, 김상헌이 옳았느냐를 따져 물을 수 있는 매력적인 그들의 말은 남한산성이 처한 고립을 여실히 드러내 주는 백미이다.
최명길은 인조에게 치욕을 견디어 백성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고자 하는 길을 말하고, 김상헌은 조선이 먼저 숙여 오랑캐의 아가리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길이야말로 죽음의 길이라 말한다.
당시의 조선과 주변국의 정세가 어떠했는지, 그래서 남한산성의 최후가 어떻게 됐는지를 이미 알고 있는 내가 그 둘을 판가름하기에는 공평하지 못하다.
단지 지금의 대한민국에 또 다른 최명길이, 김상헌이 없겠느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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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말 하나 하나를 편들거나 내치고 싶은 마음 이전에 이 소설의 처음부터 끝을 파고드는 감정 하나가 있다.
1636년의 혹독했던 남한산성을 향한 ‘ 측은지심 ‘ 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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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무엇을 향한 측은지심이냐를 꼬집어 본다면 첫째 인조, 둘째 명길과 상헌, 셋째 조정의 벼슬아치들, 넷째 백성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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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임금이었던들, 남한산성에서 시간과 더불어 말라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을까. 광해가 일궈 놓은 명청과의 외교를 무너뜨리고 병자호란이 끝나고 나서도 더욱 청을 배척하고 명만을 바라보는 인조의 짧은 헤아림은 잠시 놔두더라도, 어쨌든 그는 살고자 했음으로 명길의 말처럼 삼전도의 굴욕을 받아들였다. 명분을 내세워 당당할 것이 없었는데도 당당히 싸울 것을 말하는 쪽으로 향하지 않은 것에 측은지심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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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자 하는 길은 서로 등을 맞대는 길이었고, 치욕을 대하는 둘의 생각 또한 물과 기름만큼이나 구분되는 것이었으나 스러지는 나라를 처절하게 붙잡아 보려는 명길과 상헌에게 측은지심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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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을 향한 절개외에는 어떤 것도 배척하는 것을 절대적인 우선 순위에 두는 벼슬아치들은 어떤한가.
말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용골대의 진영에 발을 들여 놓기를 주저하지 않는 명길, 그런 그의 목을 치라는 말이 전부인 조정의 벼슬아치들에게 측은지심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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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 백성, 백성들......
봄이 오면 씨를 뿌리고 가을이 되면 수확하며 주어진 목숨만큼 살아내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지 않았을까. 전쟁하지 않고 살아가길 원하는 이들의 평화로움을 망치는 자들은 어리석은 백성이 아니지 않던가. 존재자체가 한 낱 이었을 백성에게 측은지심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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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마치 세상이 끝날 것만 같은 적막이 감도는 가운데에서도 얼었던 얼음이 풀리듯, 유유히 시작되는 백성들의 한결같은 움직임으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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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작가는 인조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조는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 들였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어 내었다고.
그러나 나는 임금에게 거는 기대가 큰 백성인가보다.
리더를 자처했으니 범인보다는 더욱 지혜로워야 하며,
독수리보다 더욱 멀리 보는 혜안, 보이지도 않는 국가를 말하기 보다 살아가는 것이 아름다워야 할 백성들을 향한 거침없는 마음을 가진 자.
그러한 자를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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