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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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태생이라는 이유에서 '아룬다티 로이'는 작가로는 생소한 이름이다. 또 그런 이유로, 이미 익숙한 서구권 작가가 아니라는 점에서 <지복의 성자>를 읽게 되었고, 이어서 <자본주의:유령이야기>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픽션인 <지복의 성자>와 비교하면 <자본주의:유령이야기>는 논픽션으로 '르포르타주' 이다. 본질적으로 다른 장르이지만 둘은 소통하고 있으며 픽션과 논픽션을 유기적으로 연결지어 결국 하나의 주제로 모아내는 작가의 다재다능을 독자들은 경험할 수 있다. <지복의 성자>는 <자본주의:유령이야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미시적인 개인사를 비춰주고 있기 때문에 두 권을 함께 읽기를 권해 본다. 인도에 살지만 인도 밖으로 밀려난 일개의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스러움의 자리를 구축해 가는 사람들을 그려내는 이 책을 이해하고 싶어서 리뷰를 쓰게 되었다.



이야기는 두 개의 성(性)을 동시에 가지고 태어난 아프타브로부터 시작한다. 남성과 여성을 한 몸에 지닌 채 살아가야 할 이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작가가 뜻하는 바를 상징적으로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두 개의 성을 가진 자'는 세상이 허용하는 사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로 그 어느쪽 세계에도 속할 수 없는 자이다. 아프타브의 아버지 물라카트 알리는 아들의 비정상을 정상(여성을 죽이고 남성을 살리는)으로 갖추기 위해 수술을 강행시키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또한 아프타브는 점점 남성성이 강해지는 자신의 육체를 견디지 못한다. 그는 여자가 되고 싶었고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결코 허락되지 않을 곳에 있었다. 결국 자신의 존재를 명확하게 규정 지어 줄 수 없는 두니야(세상)에서 빠져나와 히즈라들의 공동체로 들어가게 되고, 지도자 우스타드 쿨숨비로부터 '안줌' 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아 그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곳은 공기가 그에게 자리를 내주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장소였다. 그가 도착하면 마치 학교 교실에서 앉을 자리를 내주는 친구처럼 공기가 옆으로 슬그머니 물러나는 듯했다. 아프타브는 수개월 동안 콰브가 거주자들의 심부름을 해주고 , 그들이 순회공연을 나갈 때 가방과 악기를 들어주고, 하루 일과가 끝난 후 그들의 지친 발을 주물러주며 공을 들인 끝에 용케 콰브가에 입성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곳에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진 날이 온 것이었다. 그는 천국의 문이라도 지나듯 허물어져가는 평범한 집으로 들어갔다.'




아룬다티 로이가 그려낸 '인도'는 이러한 아프타브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히즈라(남성의 몸에 갇힌 여성)이기 때문에, 달리트(불가촉 천민)이기 때문에, 이슬람교도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히즈라와 달리트가 아니며 이슬람교도는 더욱 아닌 인도의 다수로부터 박해받는 현실을 치부로 드러낸다.


성인이 된 안줌의 삶은 인도의 역사(현재진행중인)와 맞물려 있다. 특히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 '구자라트 학살'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 안줌이 있다. 사건은 힌두교와 이슬람교도간의 종교적 갈등이 빚어낸 잔인한 비극의 결과였다. 2002년, 안줌이 타고 있던 기차는 성지순례객을 태우고 돌아오고 있었다. 우연히 발생한 화재로 인해 무슬림 거주지역에 정차한 기차를 마을의 군중들이 돌을 던지는 일이 일어났다. 이는 곧장 무슬림들의 테러행위로 간주되어 힌두교무리들의 이슬람교도를 향한 피의 복수로 이어진다.


'안줌은 그들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알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들이 어떻게 남자들을 접고 여자들을 펼쳤는지, 그리고 결국은 어떻게 사지를 갈가리 찢고 불에 태웠는지에 대해.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들. 그들, 누구? 동등한 반작용을 가하기 위해 동원된 뉴턴의 군대. 강철 발톱과 피투성이 부리를 가진 삼만의 사프란색 앵무새들이 한꺼번에 깍깍거렸다. 무살만 카 에크 히 스탄! 카브리스탄 야 파키스탄! 이슬람교도를 위한 땅은 오직 한 곳뿐! 묘지 아니면 파키스탄! '



안줌은 학살의 현장에서 히즈라를 건드리면 악운이 따른다고 믿는 힌두교 극단주의자들의 믿음때문에 죽음을 모면했지만 충격의 여운은 오랫동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공포의 기억은 이후의 그녀를 안줌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꾸리게 함으로써 조금씩 물러났다. 자신을 이 끔찍한 세상에 존재케 한, 이미 저승사람이 되어버린 그들의 묘지를 찾아 갔을 때, 그녀의 영혼의 절반은 죽은자의 것이었다. 망자들의 무덤가는 현실이 뚫고 들어올 수 없는 묘한 안정감으로 영역을 넓혀 나갔다. 안줌은 그렇게 했다. '추락하는 사람들의 보금자리' 로 변모해 갔다. 저마다의 추락의 역사를 가진 이들이 마치 최종적인 운명의 장소가 계획되어 진 것처럼 그렇게 안줌의 보금자로 들어가게 된다. 죽어서도 갈 곳 없는 시신과 힌두교도들에 의해 살해당한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살아가는 사담, 경찰의 탈을 쓴 힌두교도들로 부터 강간당한 마오주의자가 낳은 부정당한 아기, 그리고 틸로가 그들이다. 틸로는 또다른 한 편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인물로 그녀가 잔나트 게스트 하우스(안줌의 공동체)에 오기까지의 여정은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분쟁으로 지옥이 되어버린 카슈미르의 과거와 현재를 묘사한다. 인도는 분쟁지역에서 벌어지는 종교적 반목의 심리를 이용하여 그야말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틸로가 사랑하는 인물 '무사'는 무고한 사람들의 선봉에서 카슈미르를 절벽 끝으로 몰아가는 인도에 저항한다.


"언젠가는 카슈미르도 그런 식으로 인도를 자폭하게 만들 거야. 그때쯤 너희는 공기총으로 우리 모두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부 눈이 멀게 만들어버렸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눈이 성한 너희들은 너희가 우리에게 한 짓을 볼 수 있을 거야. 너희는 우리를 파괴하고 있는게 아냐. 일으켜세우고 있는 거지. 너희가 파괴하고 있는건 너희들 자신이야."




틸로와 무사를 소설속의 주인공으로만 인식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자본주의:유령이야기>에서 말한다. "카슈미르에서의 전쟁은 세계의 눈에는 포용적인 세속적 민주주의와 급진적인 이슬람주의자들 사이의 전투로 보인다." 라고. 그정도의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테지만 적어도 이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은, 급진적인 이슬람주의자도 포용적인 세속적 민주주의도 '없다'는 것이다. '있는 것'은 국가간의 충돌하는 이해관계 아래에 위치한 수많은 틸로와 무사가 무덤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틸로는 무사를 사랑했고 인도편에 설 수 없었으며 그로인해 세상에 편입할 수 없는 인물이 되어 안줌의 울타리로 들어서게 되었다. 안줌의 친구 님모 그라코푸리는 '신은 행복할 수 없는 생물체를 만들어 보기로 한 하나의 실험'으로 히즈라를 만들었다고 했다. 히즈라인 안줌은 신의 실험을 성공시켰을까? 작가 아룬다티 로이는 그 거대한 실험의 장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을까?


그토록 넓은 땅 인도, 그 안에서도 행복은 찾아볼 수 없을성 싶은 묘지 안에 안줌의 작은 공동체가 생겨났다. 산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닌 장소에는 뜻밖에 현실의 세상이 갖추고 있지 않은 것들이 있다. 각자의 세상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연대'가 그것이다. 저주처럼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 지고의 여성인 엄마가 되고 싶었던 히즈라 안줌에게 연대의 품을 실현시키게 한 작가의 상상력은, 거대한 실험의 장을 절망적으로 끝내도록 내버려 둘 수 없음을 시사한다.


안줌의 존재에 대한 희망섞인 당위를 떠올리며,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한 구절을 언급하고 싶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 가운데서 지옥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지옥이 아닌 곳을 찾아내어 그곳을 지속시키려는 사람들, 그들이 '지복의 성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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