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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풍수 그림으로 읽는 잠 못들 정도로 재미있는 이야기
애신각라 유한 지음, 김성훈 옮김 / 성안당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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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의 잠정 폐쇄가 길어지면서 개성공단에 입주했던 123개 기업은 공장을 가동하지 못해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다. 남북 당국회담이 무산돼 공단 정상화에 대한 기대조차 꿈꾸기 어려운 현실이다. 개성공단은 남측의 자본과 기술, 북측의 토지와 인력이 결합해 통일로 가는 새로운 장을 마련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그리고 5만명의 북측 근로자가 일하는 생활의 터전이다. 그런데 풍수에 따르면 개성은 본래 산수동거(山水同去)의 땅으로 재물이 모이기 어렵다.

고려 왕조의 500년 도읍지인 개성은 백두대간에서 뻗어져 나온 정기가 끝맺은 곳에 있다. 송악산은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가 서쪽으로 머리를 두고 동쪽으로 다리를 뻗은 채 반듯이 누워 있는 모습이다. 턱이며 봉긋한 젖가슴, 불룩한 배 등이 뚜렷한데 고려의 왕궁인 만월대는 젖가슴 바로 아래 터를 잡았다.



본래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라 부소산이라 불렀다. 그러다 소나무를 심어 송악산이라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풍수에서는 물을 재물로 여긴다. 물 흘러가는 모습이 멀리까지 보이면 그에 따라 재물이 도망간다. 땅을 등진 채 흐르면 곳간에 재물이 텅 비어 흉하다. 물이 뒤를 돌아보듯 천천히 흘러가야 생기가 쌓이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급하게 흐르면 살기를 품어 해롭다.

민둥산은 물을 가둘 수 없기 때문에 장마철에는 홍수와 산사태의 위험이 높다. 평상시에도 계곡과 개천에 물이 부족하다. 물의 문제는 땅에도 문제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런 곳은 마을과 도시의 입지로 편안하지 못하다.

개성의 수류(水流)는 만월대의 좌우측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이 입암동 방면에서 오는 물과 흥국사지 부근에서 Y자형으로 합쳐진다. 남쪽 훈련원지의 서북쪽에서 선죽교 방면에서 흘러온 물과 두 번째로 합쳐진다. 그리고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개국사지와 수구문을 지나친다. 그 뒤로 성 밖에서 중수와 합쳐져 장단에 이르고 임진강까지 흘러든다.

대체로 여러 계곡물이 중앙의 한가운데로 모여 임진강을 만나기까지 급하게 흘러 빠지기 때문에 물살이 급하다. 하절기에는 홍수도 자주 일어난다. 그 결과 개성은 산수교회(山水交會)를 하지 못해 수덕(水德)이 불순하다고 봤다.

이 때문에 '훈요십조'에서는 '서경(평양)은 수덕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고 대업을 만대에 전할 땅'이라며 서경을 중시하기도 했다. 개성은 수세가 작고 흐름이 빠르니 그에 따라 재물 운도 적다는 풍수적 약점을 지닌 땅이란 것이다.

풍수에선 "산이 수려하면 귀인이 나고, 물이 좋으면 부자가 난다. 적은 물은 기운이 왕성치 못하나 물이 모여 혈에 조영하면 기운을 왕성히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앞으로 개성공단이 정상화되면 공단의 북동방에 흐르는 개천에 보를 막아 물을 가둬야 한다.

그러면 개성공단은 재물 운이 크게 성장하는 명당이 되고 남북경협사업도 순풍에 돛을 단 듯 순항할 것이다.

고제희 < 대동풍수지리학회장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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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건강을 부르는 풍수인테리어
김종철 지음, 공문룡 그림 / 늘푸른소나무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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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적십자회비냅시다.

우리는 연금보험금을 정부나 보험회사에낸다 왜낼까?

피같은 내 생돈이 나중에 돌아오니까 내는것이다.

박정희대통령이 부부가 총탄에 숨졌다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

김재규아버지 무덤에 누가 바위를 가져다 놓았고 그 자리는 용이 승천하는 자리다.

또 하나는 신당동 김재규안기부장집터가 삼각형이라는 것이다.

삼각형터에 살면 총이나 칼에 의한 흉사가 일어난다고한다.

그럼 육영수여사는 김재규부장과 아무상관이 없는데 왜 돌아가신걸까 그건

박정희대통령이 대통령에 오르기 위해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기에 그것이 돌고돌아 온것이다.♡♡





그럼 전두환대통령집도 삼각형인데 왜 멀쩡할까?  그건 위에서 평면도로 봤을때

삼각형끝부분 두곳을 정원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흉지가 명당이 된것이다.

업된 김에 하나만 더 용산사태,용산참사가났다.

오로지 내 생각인데 건물이 아래가 좁고 위가 넓으면 보기는 좋으나 윗사람과 아랫사람간의

커뮤니에 문제가 생긴다. 또 건물이 검정색이면 주인이 건물에 눌리는 형상이된다.

용산구청건물 누가 지었는지 참 잘도지었다.☆☆





지하철 화장실에 큰일보러 가면 정면에 하나님의 전화번호가 쓰여있다.

여기로 문자보내면 저녁에 하나님이 나에게 직접 전화를 하신다.

한달에 만원만 내란다.

내 생돈이지만 오로지 선의로만 냈던 좋은 일했으니 돌아오겠지란 생각으로

냈던 나중에 필히 복받는다.

내 선행은 반드시 돌아온다.

적십자회비 만원만 내는 선행을 오늘부터 베풀어보자.●●

봄에 자미원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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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삼열의 재미있는 풍수 이야기 - 풍수 이론과 더불어 전국 길지 답산 록
양삼열 지음 / 디자인21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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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명당

우린 흔히 명당이라하면 무덤이나 건물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근거없는 소리다.

예를들면 경복궁은 좋은터이지 명당은 아니다.

그곳의 명당은 광화문광장이라는 입술부분인 전순이 명당이다.

무덤을 보면 앞에 평지가 있다.

무덤앞에 평지가 없으면 흉하다. 무덤앞에 평평한 땅이 명당이다.♡




허리우드배우 맬 깁슨의 별장이 불탔다.

TV를 보니 전망 좋은 언덕꼭대기 벼랑위다.

벼랑위에 무덤을 쓰면 절명택이라하여 자손이 끊긴다.

전망 좋은곳과 명당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개그맨 장동민씨가 뉴스에 나온적이 있다.

누가 집에 돌을 던져 재산상의 피해를 봤다고한다.

그건 그사람 잘못도있지만 장동민씨집 마당을 자갈로 갈아놓았기 때문에

음풍살기가 생겨난게 원인이다.

똥이 있어야 파리가 꼬이는 법이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적을 만들게 마련이고 명필로 소문난 양녕대군도 적은 있었을 것이다.

숭례문 세로현판은 그 시대를 느낄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이며 관악산 화기를

막는 풍수방패막이다.

만약 양녕대군을 미워하는 적이 정권을 잡고 그 글씨를 떼어버렸다면

우린 무얼보며 그 시대를 느낄 수 있을까♡♡




6.25때 국군의 초토화작전으로 신라때 창건한 천오백년 넘은 오대산 월정사가

소실되었고 에밀레종급의 동종등 초국보급 문화재들이 재로 변했다.

무지의 소치라 할 수 있다.☆☆




문재인대통령시절 광화문 박정희대통령 친필현판이 철거되었다.

사법연수원 차석임에도 유신반대를 했다고 판사임용이 거부된것에 대한

한풀이였는지 친일파 척결이었는지는 몰라도 박근혜대통령 아버지나

문재인대통령 아버지나 친일한건 똑같지 않은가.○○




만일 이 현판이 연산군 친필현판이었다면 그래도 떼내었을까 400년후 후손들은

무얼보며 지금 이시대를 느낄 수 있을까

광화문현판은 독재자의 글씨가 아니라 역사의 발자취다.

아까 숭례문 세로현판이 관악산 화기를 막는 풍수 방패막이라면 박정희대통령

광화문 현판은 광화문광장이라는 명당의 기운을 다스리는 비보풍수다.♡♡





아픈집의 특징이 무얼까 약을 안방에 보관한다는 점이다.

또 식탁위에 약을 놓아둔다는 점이다.

식탁위는 음식을 먹는 공간이다.

음식 먹는 공간에 약을두면 음식 먹듯이 약도 계속 먹어야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럼 비타민이나 건강식품은 어떨까 마찬가지다.

인생을 비라보는 제대로 된 안목을 키우며 살아야 명당도 보이는 법이다.-☆☆

초여름에 자미원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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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과 행복을 부르는 풍수지리
이재원 지음 / 두드림미디어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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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국제그룹에서 세종로까지

지금은 사라진 국제그룹 왜 사라졌을까
프로스펙스신발로 대표되는 양정모회장의 국제그룹 5공화국 당시 서열 7위의 그룹이었다.


85년 2.12총선이 끝나고 승승장구하던 국제그룹이 무리한 사업확장등 경영부실을 빌미로 전격해체되고 계열사들은 타회사로 인수합



병됐다. 이것이 국제그룹해체사건이다.



당시 국제그룹은 롯데보다 더 큰 기업이었다.



국제그룹은 양정모씨가 고무신 공장으로 출발해 1962년 국내최초로 미국에 신발을 수출하며 일군 회사이다. 이렇게 닦은 회사는 승승



장구,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 분야에까지 진출하였으며 국제상사.(프로스펙스,아티스) 국제종합기계,국제통운,동서증권등 계열사



만 21개를 거느리는 대형 그룹으로 발돋움한다.



박정희,전두환 시절에 로비나 혈연,학연등 연줄(대우실업의 김우중은 박정희가 가장 존경하던 은사의 아들, 박정희시절에 급성장.)



로 기업을 키우는게 정설이던 시대에 묵묵히 맨손으로 기업을 일군 게 양정모였다. 그런 양정모에게 5공화국 출범은 재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이끄는 새마을운동본부는 농촌 개발을 위한 '보조금 지급'을 명분으로 세워졌고, 새마을운동본부



의 자금은 기업들이 내는 기부금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당연히 기업들은 그룹 명성에 걸맞은 기부금을 냈고 여기에 반발하는 기업들



도 없었다. 그러나 양정모는 "난 누구의 도움 없이 고무신 팔아 여기까지 왔다. 누구에게 돈을 갖다 바치란 말이냐?"라며 새마을 운동



본부에 기부를 거부한다.



기업들이 피를 빨리는 또 하나의 유명무실한 단체가 있었으니 바로 전두환의 호를 따서 만든 '일해재단'이 그것이다.



일해재단은 아웅산 폭발테러 사건 유가족들의 위로금과 장학사업,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선수 지원,육성, 그리고 통일연구등을 위해



세워졌으며 발기인에 정주영,구자경,김우중,최종현,양정모등 재벌들이 참여했다. 그리고 설립기금을 모금하는데,자그마치 4,000만 달



러나 되는 큰돈이었다. 이 돈은 당연히 대기업들이 앞다퉈 전두환에게 갖다 바쳤지만 발기인에 이사로 참여한 양정모는 또 다시 기부



를 거부한다.



1984년 어느 겨울, 전두환은 직접 대기업 총수들과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총수들이 하나둘씩 청와대로 모이고 이윽고 주인공인 대



통령이 등장하여 상석에 앉았는데 그날따라 눈이 많이와 양정모회장의 차가 30분이 지체되었다 양정모 때문에 모임은 시작되지 못하



고 전두환의 얼굴은 붉그락푸르락해졌다 같은 자리에 있던 총수들은 바늘 방석에 앉은 것 같은 느낌이들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양정



모는 모임에 참석했다.



나한테 밉보이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보여주고 싶던 전두환은 부실기업 정리한다는 명목 아래 재계서열 7위, 수출 실적 8억 달러



이상, 매출액 2조나 되는 대그룹을 공중분해해버렸다.



계열사 대부분은 전두환 정권에 호의적이었던 한일그룹에 넘어갔다. 한일합섬은 5공 정권 초반에 30대 그룹이었으나 5공 말기에는



20대 그룹으로 성장했다. 기부금을 가장 많이 낸 기업 중에 하나가 바로 한일이었다. 정부는 한일에 세금을 깎아주고 부채를 탕감해주



었으며 파격적이 조건으로 신규 대출을 알선하는 등 혜택을 주었다. 이에 화답하듯이 한일그룹은 대기업 중 가장 많은 헌금을 납부해



전두환을 기쁘게 한다. 결국 IMF로 한일그룹은 부도가 났다. 그룹이 해체되던 85년 2월 21일. 임원들과의 마지막 회의에서 양정모국



제그룹 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것이 내 잘못입니다. 운명에 승복합시다.---



양정모회장의 가정은 전형적인 한국가정이었다. 딸딸딸...아들 이 아들이 안타깝게도 미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자 양회장의 부인은



눈이 실명위기에 놓이고 부부금실이 유난히 좋던 양정모회장은 부인의 수술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려했지만 양정모회장이 갖고있던



주식과 채권을 모두 내놓지 않으면 출국 못한다고해 모두 내놓고 출국 할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 정권이 바뀐후 재판에서 이겼지만 이



미 공중으로 사라진 뒤였다.



이것이 국제그룹해체의 전말이고 표면에 드러난 진실이다 겉보기엔 그렇다 그럼 속내는 어떨까 속내를보자...



1984년 완공돼 국제그룹 사옥으로 쓰인 지하4층~지상28층짜리 국제빌딩.. 용산 일대에서 눈에 가장 잘 띄는 건물이기도하다. 그 당시



멋진 설계라 하여 나라에서 수여하는 건축가상까지 수상한 건물이지만 건물 앞면,배면,측면이 어딘지 구분되지 않은 설계를 시도하여



건물 가상학적으로 매우 좋지 못하다.



풍수에서는 전면,배면,측면이 확실히 구분이 되어야만 좋은 가상의 건물이다. 이런 줏대없는 건물에 상주해 사업을하면 직원들의 애



사심이 없어진다. 결국에는 건물의 소유주나 회사의 CEO의 존재가 심각한 타격을 받아 상실되는 운명에 처해진다. 상 받은 것이 무



색하다.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첫 소유주인 국제그룹은 1985년 재계에서 사라졌고, 후속타로 건물을 인수했던 한일그룹도 IFM 외환



위기 당시에 쓰러졌다. 소유했고 상주했던 기업마다 도산이라는 쓴맛을 본 '비운의 빌딩'으로 소문이 났다. 현재는 3년간의 리모델링



기간을 거쳐 2010년 5월부터는 LS용산타워로 이름이 변경되어 입지하고 있다.



롯데가 상속문제 그룹경영,비자금문제로 시끄럽다 왜 그럴까



'군계일학','독야청청하리라','가다가 아니가면 아니간만 못하리'가 롯데를 가리키는 말이다.



63빌딩 혼자 우뚝 솟았고 혼자 오는 바람 다 맞았고 결국 주인이 바뀌었다.



혼자 우뚝 높이솟은 건물은 근처에 보호해줄 의지처가 없어 혼자 오는 바람을 모두 맞아야한다.



건물이 높으면 바람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바람을 받는다는 것은 좋지 않다.



늘 바람을 타듯 구설수가 따라다니고 때로는 사람을 상하게도 한다.



잠실은 바람이 많은 곳이다.



비유가 맞을진 모르겠지만 '한산대첩'을 보자 자랑스럽다.



누가 그런다 "진정한 영웅은 기억되는걸 바라지 않는다."고 예로 댜큐멘터리,교과서,영화 모두 이순신장군 혼자 한걸로 나오지만 참모



들이 건의하고 회의에 수많은논의를 거쳐 만들어진게 한산대첩의 시나리오지 '나를 따르라'식의 논리는 맞지가 않다 명량에서 '죽으



려고하는 자는 살 것이오...'는 장군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중국의 손자병법과 함께 양대병서로 꼽히는 오자병법에 나오는 말이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는 맥아더장군의 말은 그가 만든 말일까 참모들이 건의한 말일까



인천상륙작전도 맥아더혼자 '나를 따르라'가 아니다.



그의 책을 보면 워싱턴과 수많은 조율과,참모들과의 작전회의 토론 윗선의 조언들이 수없이 얽혀서 이루어낸 결론이지 영화나 교과서



에서처럼 혼자만의 공은 아니다.



다시 한산대첩으로 와 그날 이겼다 기쁘다 하지만 무기보충하고 손상된 부분 고쳐야하고 휴식이 절실하며 식량보충도 시급하다. 야구



선수도 한 경기후 며칠은 쉬어야한다. 그런데 이틀후 또 쳐들어온다. 그렇게 두세번은 이길순 있겠지만 그 다음엔 역부족이 된다 이길



수가 없다.



다시 잠실 제2롯데월드로 가보자 바람은 한 번 불고마는게 아니다. 계속분다.



주변에서 가장 높다. 건물이 높으면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일대는 성남의 남한산성까지 트여 바람이 크게 드는 곳이라 큰 건물



의 경우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아까 '가다가 아니가면 아니간만 못하다'했다.



청량리에 맘모스백화점이 있었다. 심심하면 불난다. 그걸 롯데백화점에서 인수했다.



또 심심하면 불난다, 하지만 지금은 불 안난다 왜 그럴까



내가 집안에서 대문은 바라볼때 왼쪽에 석사자의 숫놈을 오른쪽엔 암놈이 있어야한다.



그래야 외부의 나쁜 기운은 막고 좋은 기운만 흡수한다.



국회의사당앞의 해태도 광화문앞의 해태도 어린이대공원후문에서 리틀엔젤스회관쪽을 보면 무서운 맹수가 좌우로 밖을 보고 있다.



다시 청량리로 가보자 만일 두마리를 세울 수 없으면 암놈만 세우라고 했다. 지금 롯데백화점앞에 암놈만 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풍수를 보려면 끝까지 봐야지 왜 보다말아 이런 분란을 일으킬까



유산상속의 잡음을 없애려면 노년에 서향으로 자고 동북쪽에 흰꽃을 놓으면 잡음이 없어진다하였다.



나는 구의헌혈의집에서 금장,은장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거기 없어졌다 왜일까



택지에서 주택이 차지하는 비율이 현저히 적으면ㅡ 2.5배이상ㅡ그곳은 흉하다했다. 구의헌혈의집 언젠가부터 둥그렇게 간호사책상 둘레로 둥그렇



게 구획을 나눈게 원인이라 생각한다.



방에서 가장 명당은 문을 들어서서 대각선 가장 끝부분인데 그것도 안맞았다.



만약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거쳐야되는 일들이나 사건들을 사람들이 먼저 알게된다면, 차마 인생의 항로를 즐겁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대문안은 더 한심하다.



세종로로 가기전에 덕수궁만 짚고가보자.



'대한문'이란 현판이 있다. 이건 '대한민국'할 때의 '대한'



이 아니라 고종황제를 도둑놈으로 비난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말이다.



옛날부터 궁중에는 권력과 암투가 많아 문마다 화할화자를 넣었다.



성종의 형 월성대군의 저택인 덕수궁의 현판이름도 '인화문'으로 지었는데 고종황제께서 헤이그밀사를 보낸사건으로 고종황제는 조



선이란 나라를 훔치려는 큰도둑이란 뜻에서 큰대 한나라한을 썼다 왜 한나라 한을 썼냐면 거기다 사람인변을 붙이면 일본의 전설적인



도둑인 '한조'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걸 박물관으로 이전할 생각은 안하고 박정희대통령의 친필인 광화문현판 뗄 생각만 한다.



별은 보려면 어둠이 꼭 필요한 법일까



세종로에 왜 이순신장군상이 있느냐면 원래 왕은 궁밖으로 나오는 법이 아니다.



궁은 장군이 지켜야한다 무식한 사람들이 세종로에 세종대왕상을 세우자하는 것이고 풍수의 대가인 이은상선생님께서 박정희대통령



에게 귀뜸하길 차들이 청와대를 향해 돌진하는 도로살을 막으려면 방패막이가 필요하다해 서울미대교수로 있는 조각가 김세중씨에게



만들게하고 이후락안기부장이 돈을 내서 만든게 세종로에 있는 충무공동상인 것이다.
늦가을에
자미원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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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베이터 오세훈의 조용한 혁명
김미라 지음 / 에버리치홀딩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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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즈노교수와 종로피맛골이야기





지금은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생글생글 잘 웃던 미즈노교수가 방송에 잘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이 스튜디오에 모여서 토론하던 곳에서 미즈노교수는 "저희 일본에서는



자식이 사업자금이 부족해 시골부모님에게 가서 가만히 있으면 말을 안해도 부모님이



알아서 주십니다.



또 연인들끼리도 사랑한다는 말을 안해도 다 압니다."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 말에



주변사람들은 "에! 그게 뭐야 말을 해야지" 하며 어이없어 했다.



이야기가 좀 다를진 몰라도 야만이란말은 18세기 프랑스에서 만든 말로 자신의 문화가 다른



문명보다 우수함을 말하기위해 만든 말이다.



타문화를 자신의 문화적 시각으로만 해석하려는 극단적인 예가 '야만'이라는 단어다.



12세기 한국과 일본에는 모두 무신정권이 같은 시기에 등장한다.



청기백기게임의 원형도 알고보면 운동회때의 청백전이 아니라



백강전투후 400년동안 일본에 존재했던 시대가 헤이안시대고 그 이후가 700년간의



무신시대다.



수도를 두 번씩이나 옮긴 간무천황이 794년에 헤이안쿄(현재 천왕이 사는 도시 교토)를



도읍으로 정착시킨후 1185년에 이르러서야 미나모토가문이 다카모리왕의 손자



다이라씨와 전장에서 맞붙었을때 서로를 구별하기 위해 한쪽은 등에 홍기를 꼽고



한쪽은 등에 백기를 꽂은데서 청백전이 유래한다.



이로인해 다이라씨가 궤멸하고 군사,경찰,행정권이 미야모토가문의 수장 요리토모에게



넘어간다.



이때 시작된 또 하나의 풍습이 있는데 무신정권의 호화로운 요리인 가이셰키요리와



승려들의 공양음식인 쇼진요리가 합해져서 현재의 일식요리의 원형이 탄생되기도 한다.



이런 전통이 1868년 메이지천황의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700년 동안 무신들이



전국에서 난립해 싸우는 전국시대가 계속된다.



우리나라에 군청단위가 있다면 일본에서는 현단위의 땅에 지배자인 영주가 있어



그곳의 무사집단과 농민집단이 영주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 경쟁하는 시대를



그들은 700년이나 지속시킨다.



만일 거기속한 사람이 자신의 불만이나 억압에 대한 표출을 하게되면 그곳 집단에



해를 끼쳐 단결에 해가된다하여 자신의 욕구불만을 자신의 내부로 내면화하는



문화가 뿌리를 내려 지금도 일본에선 제일 심한 욕이 우리가 잘아는 '빠가야로'라는



바보란 말이 제일 심한욕이라 알고있다.



어느 기자가 그런다 한국과 일본의 고소고발 사건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고 이건 단순비교가 아니라 원인을 역사적 유래를 놓고 비교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라마다의 문화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건 무리가 따를 때도 있다.



그럼 한국욕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바보'는 욕도 아니다 그냥 애칭 정도일까



조선은 500년동안 양반중심의 중앙집권제가 뿌리를 내린다.



서민들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멸시와 천대를 뒤에서 욕으로 푸는걸로 해소한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외부의 억압으로 인해 생기는 불만을 욕으로 푸는 문화를 발달시키게



되었고 일본은 외부의 억압으로 인해 생기는 불만을 내면화하는 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다 사대부의 발원지를 보자.



진,송시대이후 사대부라는 명칭이 직업은 비록 달랐지만 농,공,상과 같이 섞여 살았다가



후대에와서 사대부는 곧 문벌이 높은 집안을 가리키게 되었고 그들이 사는 곳은 농,공,상과



완전히 구별되도록 서로 섞여 거주하지 않게 된 것이다.



압구정도 중국 송나라의 정승 '한충헌'이 황제를 새로 세운 공을 이룬뒤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지은후 벼슬을 버리고 갈매기와 함께 논다는 겸손의 뜻이 원형이다.



그 압구정이 조선으로 넘어와 '계유정난'을 기획한 한명회가 갈매기압으로 부르던 정자를



지은후 그곳의 뜻이 서민들에 의해 누를압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다.



발원지를 알면 재미나는 것들이 많다.



한강의 발원지도 오대산 '우통수'와 태백 황지의 창죽동의 검룡소를 발원지로 보기도한다.



여기는 귀한 곳이기에 잘 보존되고 있다.



그럼 지금 한국은 발원지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문화유산은 또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을까 안압지,불국사,석굴암,첨성대,무령왕릉,고인돌,장군총등 거의 다인



문화유산은 모두 귀족이나 왕족들을 위한 유산이다.



그럼 우린 이런 문화유산을 정말 잘 지키고 있을까



우리는 약간이라도 불편하거나 보기 싫으면 싹쓸어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



종로의 피맛골,중앙청,명성황후생가 담장의 일부,북촌을 밀어버리고 빌라단지를 만들자는



사람들,창덕궁의 아기자기한 산책로를 시원스럽게 밀어버린 사람들,천재시인 백석과



길상사 자야여사가 사랑을 나누던 집,100년이 넘은 역사를 가진 한국영화의 탄생지인



단성사가 헐릴때 우리 영화인들은 돈버는 일만했다.



돈에 눈먼 한국영화인들,올림픽 메인스타디움과 국회의사당을 지은 건축가 김수근씨의



집도 싹 밀어버리거나 밀려고했다.



이제껏 나온 문화유산중 95%인 서민들의 유일한 유산 한국에 욕이 왜 많은지를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가 바로 종로의 '피맛골'이다.



종로통 대로변 정승판서행차의'말을 피하다'에서 유래된 피맛골은 종로통의 뒷골목이다.



지금 당장은 경제적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과거의 역사를 통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을 기를 수 있기 때문에 문화유산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낡은 것은 허물고 처음부터 새로 짓는다는 한국식 개발과정은 한국이 지닌 약점중에서도



가장 큰 부분이다.



세월이 지나면 무엇이든 잊혀지는 법이지만 역사의 현장은 고이 보존되고 간직되어 다시



후손들에게 전해져야하는 법이다.



우리는 지금 전통과 낙후를 구분못하는 혼돈에 빠져 있지않은지...



가난의 잔재를 지워버리고 싶었던 구시대적 발상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하고 있는 것일까.



1392년 조선은 개국했고 그 시절 숭례문을 만들게된다.



숭례문은 한명회의 계유정난때도 있었고 임진왜란때도 있었고 흥선대원군시절에도 있었고



김영삼대통령이 치적이라고 내세우는 우를 범하며 주식회사와 보험을 탄생시킨 동인도회사의



대표적 건물양식이며 근현대사가 그대로 녹아 있는 그자체가 박물관인 중앙청을 부술때도 있었지만 69세 노인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고 그 노인은 국민들의 비난을 받으며 감옥으로 향했다.



종로의 피맛골은 1392년 조선의 개국시절 서민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생기게된다.



피맛골은 한명회의 계유정난때도 있었고 임진왜란 때도 있었고 흥선대원군 시절에도



존재했고 김영삼대통령이 치적이라고 자랑하며 주식회사와 보험을 탄생시킨 동인도회사의 대표적



건축양식이며 근현대사가 그대로 녹아있는 그자체가 박물관인 중앙청을 부술때도 있었지만 낡은 것은 허물고



처음부터 새로 짓는다는 한국식 개발과정으로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고 국민들은



무관심하거나 부순사람을 지지한다.



옛날 것을 없애는 것은 한국의 약점 중에서도 가장 큰 부분이다.





몇몇 정치인의 생각만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도시를 통째로 바꾸려는 발상 이제는



좀 바꿀때도 되지 않았을까.



외국에서는 모짜르트생가 베토벤 생가에서 외국정상들과 칵테일 파티를 한다는데



왜 우리는 이런 야만의 시대에 살아야할까







참고도서 몇권만 추려서 권한다



서울, 북촌에서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1989년판)



일생에 한 번은 독일을 만나라



빈곤의 연대기



세계는 기다리지 않는다



내사랑 백석



맨큐의 경제학 페이지230 (역사적건물의 외부효과)



구석구석 찾아낸 서울의 숨은 역사이야기




자미원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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