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유채꽃 둘레책방 4
정도상 지음, 휘리 그림 / 노란상상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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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6월 28일 오전11시 화창한 여름날 아침이었다.



승객 두사람이 탄 자동차가 길을 잘못드는 바람에 비좁은 통로를 지나 막다른 골목을 만났다.



그런데 이날 이 자동차 운전사가 저지른 실수는 수천만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세계사의 진로를 바꿔놓았다.



이 자동차는 불행하게도 열아홉살의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학생 가브릴로 프린시프앞에 멈춰섰고, 세르비



아 테러조직 '검은 손' 에 소속되어 있던 프린시스는 눈앞에 다가온 행운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작은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두 번 당겼고, 차 안에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프



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소피 대공비가 30분만에 숨졌다. 오스트리아는 이 암살사건을 세르비아 침공의



빌미로 삼았고 독일이 오스트리아편에 서자 세르비아의 보호를 공언하고 있던 러시아도 가만 있을 수 없



게 되었다.



단 30일만에 국가들 사이에 실타래처럼 얽힌 위협과 동맹의 연쇄 반응으로 거대한 군대가 동원되었다. 그



리고 오스트리아,러시아,독일,프랑스,영국,터키는 엉켜버렸다.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이유이



며 5년뒤 1,000만명의 목숨이 사라진 뒤에야 이 전쟁은 끝이 났다.



나폴레옹전쟁 이후 심심해하던 유럽역사에서 1914년 이전은 길고 평화로운 오후 같은 시대였음을 상기



할 필요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그 시대의 역사가들에게는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설



명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폭풍우가 몰아닥친 듯한 사건이었다.



전쟁에서 영국은 미국을 끌어들이고 프랑스와는 기존의 두나라의 식민지로 있던 아랍땅을 나누자는 사이



크스-피코협정을 체결하고 유대인에게는 독립국을 세워준다는 벨푸어선언을 해 군자금을 조달하고 불리



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아랍의 하심왕조와는 전쟁후 팔레스타인을 주는 조건으로 후세인-맥마흔서한



을 각각 체결하게 된다.



하나의 땅을 놓고 책임질 수 없는 세가지 약속을 해 오늘날 중동사태의 발발 원인을 제공한다.



연합국편을 들던 소련이 1917년 공산화되고 전쟁에서 빠지자 공산혁명주체세력중에 유대인이 많다고 잘



못판단한 영국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정착을 적극지원한다.



형제국 터키를 배신할 수 없지만 결국엔 터키에 총을 겨눈 하심왕가에 의해 중동에서 겨우 승기를 잡은



연합국은 승리하게되고 발칸의 산악지대에 각각 독립국으로 흩어진 소국들을 달래기 위해 미국의 윌슨대



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는데 대한민국의 선각자들은 이걸 잘못해석해 발칸반도에 국한된 선언을



우리에게도 해당되는걸로 알아 3.1운동이 촉발되고 이에 영향을 받아 두달후 중국에선 5.4운동이 그후 인



도에선 비폭력저항운동이 간디에 의해 일어난다.



연합국이 독일에 전쟁배상금을 요구할때 정부의 간섭을 극대화해야 경제가 살아난다는 학설을 주장한 경



제학자 케인스가 만일 그렇게되면 인플레가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고 다른 독재자가 등장해 세계는 혼란



스러워질거라 예견했으나 이를 무시당한다.



1933년 정당한 방법으로 집권한 히틀러는 세계대전을 일으켜 3,000만명의 희생자를 냈고 연합군에 항복



한다.



미국은 관동군의 전력을 너무 과대평가해 소련의 참전을 유도했고 천황직속군사령부인 대본영이 그은'38



선'에 의해 그 북쪽은 소련군이 무장해제시키고 남쪽은 미군이 무장해제 시키는 선으로 그은 것이 영구고



착화된다.



이후 중국대륙을 거의 지배한 국공내전의 승자 장개석에게 소련은 1946년 1월5일 '중,소우호동맹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중국은 정식으로 몽골의 독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사실 중국공산당은 1933년 10월부터 국민당 정부군에 쫓겨 중국대륙을 남쪽으로 반바퀴돌면서 1만km를



걷는 이른바 대장정에 나서기도 했다.



1946년 6월 국민당정부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동북지역 남부권까지 밀린 중국공산당세력은 북한지역으로



까지 후퇴해야했다.



국민당정부 세력에 의해 최악의 순간까지 밀렸던 중국공산당 세력에겐 두가지 행운이 있었으니 하나는



조선들의 목숨을 마다않고 전투에 임하는 적극적인 태도와 북한이 후방기지로서 역할해준데 힘입어



1947년 7월부터 대반격을 취할 수 있었고 이 시기를 틈타 소련군에 의해 군사훈련도 더불어받아 강병으



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2차대전후 공업시설이 하나도 상하지 않은 미국의 제일 큰 걱정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것이었는데



공산주의가 생겨난 가장 큰 배경은 '잘살아보세' 스칸디나비아반도는 추워서 확산이 어려울 것이고 발칸



은 산악지대라 확산이 어려울 것이고 동서독 국경이 가장 위험한 지역인데 여길 막는 길은 마샬플랜으로



이름지어진 막대한 경제원조를 서독에 하는 것뿐인데 그렇게되면 독일에 감정이 상할대로 상한 우방국



프랑스가 등을 돌리게 되니 프랑스가 침략해 식민지로 삼은 베트남에서 디엔 비엔 푸 전투이후 고전하고



있던 프랑스대신 베트남독립군(월맹)을 이끄는 호치민과 전투하는 길 밖에 없어 월남전을 개시하게되고



여기에 한국도 참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은 경제발전을 가속화할 수 있었고 미국이 한국을 예쁘게 봐주어 토목기술이 전



수되고 중동특수를 누리게 되었고 미국에 의해 카이스트도 설립하게 되었다.



1949년 10월 중국의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돌아간후 중국은 8로군에 편입되었던 조선의용군을 대



륙평정후 북한으로 돌려보내 6.25전쟁을 수행한 중요한 병력이 되게한다. 북한군의 전투력이 0.5라면 조



선족의 전투력은 1.5였다고 한다.



이승만은 북한이 비밀리에 남침준비를 하는 위기상황에서 1948년 11월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민주당 그



전신인 한민당과 협의를 거쳐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처벌문제가 흐지부지된 것도 그



로서는 공산당에 대한 수사경험이 풍부한 일제 고등계 출신을 활용하는 것이 불가피한 선택일 것이다.



6.25발발이전 북한의 주력부대에 배치된 조선족은 무려 6만5천여명에 이른다. 이 수치는 전쟁발발 당시



약20만명의 북한군 병력중 30%에 가까운 것이다.



전쟁후 일본국민들에게 제대로된 역사교육과 민주교육을 시켰으나 일본이 최후방어선이라 여긴 미국은



일본내에서 군,정에 경험이 많은 전쟁범죄자들인 우익세력을 재등용하게 되어 오늘날 자민당차원에서 야



스쿠니신사참배를 하게되는 우경화의 길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그 결과 한.중.일 삼자구도와 중국의 남중국해로 영해확장문제가 진행돼 2016년까지 다투게 되는데 여기



산호섬은 수많은 생물의 서식처로 세계적 생태보고인데 여기다 군비행장까지 건설하고 지금 미국과 대치



하고 있는 것이다.

제가 하나만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모택동은 베이징대학 도서관 사서보였습니다.

엄청난 독서광이죠
물론 전략이 앞서서 국공내전에서 승리했을 수도 있지만 모택동이
장개석 어머니묘를 파헤친게 모택동이 국공내전에서 이긴 신의
한 수입니다.
♡☆○

겨울에 자미원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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