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대루
천쉐 지음, 허유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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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그대로 하늘까지 치솟은 높이 150미터, 지상 45층 고층 아파트 '마천대루'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피해자는 마천대루 상가에 입점해 인기를 누리던 카페의 매니저 중메이바오. 1부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 그녀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시선과 일상이 차례로 보여진다. 2부는 사건 후 주변인들의 진술, 3부는 범인이 밝혀지고 4부는 사건 이후 여전히 마천대루에 머무르거나 들어오고 나간 이들의 삶이 펼쳐진다.

범인이 누구냐에 치중하고 싶지 않았다던 작가의 말대로 범인에 대한 곤두선 신경을 누그러뜨리며 읽으려고 노력했다. 딱히 힘들 것도 없었던 게 다양한 군상의 인물이 등장했음에도 각각의 캐릭터나 환경에 대한 묘사가 너무 생생해 읽는 자체에 큰 재미가 있었다.

모두가 범인이 아닌 것 같았으면서 또 그 모두가 범인이어도 이상하지 않을 전개였다. 정작 드러난 범인을 보고 나선 왠지 아쉬운 느낌이 들었는데 난 누가 범인이길 바랐던 걸까. 누구나 빠져들게 만드는 미모에 상냥한 천성까지 지녔던 메이바오의 안타까운 삶이 가슴 아팠다.

인물들의 서사 속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종종 있어서 이야기뿐 아니라 흥미를 느꼈다. 누구나 자신이 보고 느끼는 대로 상대를 판단하는 모습은 사실 나조차도 깨닫지 못한 채 저지르게 되는 나쁜 선입견 중 하나인데 글로 읽게 되면 화들짝 놀라고 만다.

🔖다썬은 나 같은 환경에서 자란 여자는 항상 즐겁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내 마음속은 증오로 가득 차 있다. 그건 돈으로도 메울 수 없는 것이다. (p.327)

🔖그녀는 나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거죠. 나처럼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모든 게 순조로워서 그녀가 짊어지고 감당해야 했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고 착각한 거예요. 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아니,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었어요. 감당하면 되니까. 난 감당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내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어요. (p.337)

상대의 판단에 내가 이러라 저러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어쩌면 가까이에서도 눈 감고 입 닫고 나 편한 대로 나의 잣대로 누군가를 정의내리고 있지는 않았나 돌이켜 보게 된다. 인간에 대한 세밀하고 농도 깊은 작가의 관찰력이 돋보였달까. 각박해지는 세상 속 같은 공간에서 어쩌면 서로의 일상을 넘나들면서도 현관문을 닫으면 각각의 세계로 단절(p.482)되는 모습이 지금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 착잡했다.

작가의 말처럼 범인에 치중하기보다 인물 하나하나에 깊은 관심을 두고 읽으면 읽는 재미 충만한 탄탄했던 소설이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서로를 구원하는 사랑은 존재할 수 있는 건지 막연한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안젤라 베이비가 주연을 맡아 드라마로도 성공했다고 하니 작품성과 대중성까지 다 잡은 이야기임에도 틀림 없고. 흡입력이 좋아서 몇 페이지 보려고 앉았다가 금세 새벽 3시가 되었던 내 경험은 추가 옵션요. 자, 이제 드라마로 다시 마천대루를 시작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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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 남들 앞에선 비뚤어진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그가 무방비 상태일 때 가까운 사람들은 그걸 느낄 수가 있어요. 나도 어느 정도는 그와 비슷한 부류예요. 겉으로는 아무랄데 없이 바르고 얌전해요. 부모 속 한번 안 썩이고 자랐고 학교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 장래가 유명해 보이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어요. 하지만 눈만 감으면 모든 걸 내려놓고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가장 위험한 여행,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 문란한 섹스, 사치스러운 충동구매를 꿈꾸죠.

🔖320. 가끔 자신이 낯선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뭐랄까. 자신에게 여러가지 모습이 있는데 좋은 남자, 좋은 아빠, 좋은 아들, 좋은 남편이라는 얼굴에 가려져 있는 거죠. 그러다가 깊은 밤 샤워를 마치고 거울 속 초췌한 자신의 얼굴을 대할 때 문득 미소 한 점 없는 그 얼굴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지 않아요? 칼로 그은 듯 팔자 주름이 깊게 파이고 줄줄 흘러내린 얼굴이. 얼굴 속에 감춰져 있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하는 느낌이죠.

🔖355. 내가 하고 싶은 건 그뿐이었어요. 그녀의 몸을 받쳐 파도 위에서 부유하게 하며 그 삶의 무게를 조금 나누어 짊어지는 것이요.

#천쉐 #마천대루 #인플루엔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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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황홀한 순간
강지영 지음 / 나무옆의자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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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에 완독. 흡입력 넘치는 소설!!

목차는 매 월별로 두 여성의 시선으로 번갈아 자리한다. 김하임과 이무영. 두 여자의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1월의 김하임과 1월의 이무영으로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11월 이후는 이무영 이름의 목차 없이 김하임의 11월, 12월만 있는 게 처음부터 왠지 긴장이 되었다.

긴장했던 것도 잠시 김하임의 이야기는 산뜻하고 재치발랄 코믹 그 자체였다. 할아버지를 도와 연향역 매점을 맡아 일하게 된 김하임은 전남자 친구를 잊을 새로운 사랑을 기다리고 있다. 늘 티격태격하지만 곁에서 묵묵히 도와주는 소꿉친구 성기와의 케미도 귀엽고.

긴장을 놓던 순간 마주한 1월의 이무영은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부모의 도움으로 오갈 데 없던 희태가 집에 들어온 이후 산산이 조각난 무영의 삶. 희태는 완벽에 가까운 연기로 모두를 속이고 고등학생 신분이던 무영을 겁탈해 임신하게 만들었고 무영은 부모의 충격을 염려해 모든 걸 버리고 떠나 딸을 낳고 숨어 산다. 아직 딸 민아가 어렸던 시절 자신들을 찾아낸 희태를 피하지 못한 채 십 년의 세월을 함께 살아온 무영의 1월부터 가슴 절절하게 아려왔다.

하임은 역무원 지완에게 첫눈에 반하여 사랑을 싹틔우게 되고 지완도 하임에게 점차 마음을 여는 풋풋한 모습과 매번 극강으로 대비되는 무영의 처절한 삶의 모습이 어우러져 불행이란 말로도 부족한 지옥 그 자체를 생생히 보여준다. 여전히 지 버릇 개 못 준 쓰레기 희태는 무영과 민아를 처참히 괴롭히고 딸을 지키기 위한 무영은 조용히 모든 걸 참아낸다. 생계를 잇기 위해 연향으로 오게 된 무영과 연향에서 계속 머물러 있던 하임의 연결고리는 중반부부터 풀어지기 시작한다. 하임과 무영의 거의 황홀한 순간은 과연 오긴 오는 걸까.

직접 쓰면서도 고통스러웠다는 작가의 말을 깊이 공감한다. 읽으며 괴롭고 아팠지만 피할 수도 없었던 이유가 문장들이 탄탄하고 안정적이었고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능력이 탁월해서 넋을 놓고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냥 홀려 버렸다. 설득하게 만드는 필력에 감탄했다. 하임이 막무가내로 무지하지 않아서 좋았고 무영이 끝끝내 강단이 있어 좋았다. 내 주변에도 아마 많은 무영과 하임이가 있겠지. 나 역시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 되는 시대가 머지않았길(p.285)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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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나는 지완이 놓고 간 육백 원을 손에 꼭 쥐고 그와 나 사이에 놓인 스무 발자국쯤 되는 공간을 종이접기 하듯 살풋 접어 답삭 붙여 놓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89. 가장 좋은 걸 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매대에 쌓인 싸구려 사과 중 가장 예쁜 걸 골라도 좋고, 읽던 책 중 가장 낡아도 괜찮았다. 좋아서 준다는 그 마음 하나면 값이 비싸졌다.

🔖121. 음지에 뿌리류 내리고, 양지를 향해 가지를 뻗어가는 식믤처럼 희태의 친절에선 언제나 퀴퀴한 늪지의 개흙 냄새가 풍겼다.

🔖178. 마데카솔로는 어림도 없는 절망의 병, 그게 불행이다. 나의 불행이 지완의 평탄한 삶을 감염시켜 농양을 만들고 부스럼을 일으킬까 두려웠다. 그걸 알면서도 지완을 떨칠 수 없는 건, 죽음 앞에 이기적으로 돌변하는 인간의 악마적 본성일지 몰랐다. 미안한 사람이 또 한 명 생겨버리고 말았다.

🔖196. 남과 다르다는 건 튀어나온 못처럼 뽑아내고싶거나 박아 넣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키게 마련이다.

🔖198. 가요, 천 길 낭떠러지든 해변 오두막이든 세상 끝이든.

🔖229. 아무래도 낭떠러지 같다고, 그래서 혼자 간다고. 쫓아오면 뛰어내리겠다고 전해.

#강지영 #거의황홀한순간 #나무옆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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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밍 소설Y
최정원 지음 / 창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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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서울의 수백만 명이 나무로 변한 세상. 살아남은 사람들은 재빨리 대피해 서울을 막을 큰 방벽을 세워 대책을 연구했다. 9년이 흐른 지금, 서울 상공에 '우산'이라는 광역 방역 시스템인 기구를 설치해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우산'을 실행하기 위해 최소한의 인력을 서울로 투입한다.

주인공 여운은 서울에서 엄마를 잃고 이모와 도망쳐 살고 있으면서 늘 엄마의 생사에 대한 희망을 품는다. 큰돈을 벌어 방벽 근처 바이러스의 위험 상황에서 일하는 이모를 편히 살게 할 목적으로 서울에 투입하기로 한다. 여운과 함께 파견된 R은 인공지능 로봇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며 흔들림이 없어 여운을 완벽히 보필한다. 완전 면역을 가진 채 서울에서 고립됐지만 살아 남아 나무들을(가족과 친구들을) 돌보던 정인을 만나게 되고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 마음을 주고 의지하게 된다.

책을 읽는 동안은 쏟아져 내리는 질문들 속에 파묻혔던 시간들이었다. 나무 바이러스는 변이를 거치며 투입된 사람을 공격하기도 해서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느껴야 했던 막막함과 두려움. 고스란히 느껴졌다.

우린 코로나19를 겪었고 그때의 상황과 겹쳐 보이는 장면들이 있었다. 바이러스, 감염, 팬데믹. 여러 재난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과 그저 운 좋게 재난을 피한 사람들의 대립되는 마음이 씁쓸했다. 진정한 애도는 어떻게, 얼마나 표현해야 하는 건지, 허울뿐인 위로와 진심은 구별될 수 있는지 한참을 고민하게 했다.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기필고 두드러지게 나뉘고야마는 강자와 약자. 언제나 무시되기 쉬운 부류는 소수였다. 다수의 '합리'라는 말로 얼마나 많은 소수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아 왔는지도 떠올려 본다.

"수가 적으면 목소리가 작죠. 목소리가 작으면, 못 들은 척할 수 있지. 그런 멍청한 짓이 통하는 것도 지금의 감염자 수가 전체 인구수에 비해 적기 때문이다. 그럴싸한 합리화를 거친 끝에 모두 지워 버리기로 작정할 수 있을 만큼. 함께 감당할 다른 방법을 찾기보다, 한시라도 빨리 싫은 것을 눈앞에서 삭제하고 싶어 하는 본성에 충실할 수 있을 만큼." (p.296)

함께 감당하고 이겨내는 마음을 품어본다. 인공지능이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비춰지는 인간의 모습은 약간은 비합리적이고 어리석기도 하며 대책없는 무모함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렇기에 인공지능이 절대 가지지 못할, 이해하지도 못할 인간의 고유함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합리적이고 공정함이라 함은 어떤 입장에서는 매우 비합리적이며 불공정한 상태일 수도 있음을 항상 헤아려야 할 것 같다. 살짝 개연성이 낮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기도 했지만 한 권으로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독자를 생각의 늪에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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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지구가 드디어 인간을 치워 버리겠다고 결심하고 스스로 백신 주사를 놓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74. 비록 영원히 헤어질 수밖에 없었지밀 고통 없이 평온하길 바랐던 가족이, 저런 모습으로 아직도 움직이고 있는 걸 보게 된다면...... 누구든,

🔖136. 이별은 각오한다고 무뎌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148. 웃는 이유요? 밝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예요. 편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요.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거든요. 잘 이겨 낸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예요. 그냥...... 평범하게, 똑같은 사람으로 봐 달라는 아부 같은 거예요. 동정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243. 더 자세히 설명하라면, 당신의 그 비합리성이 너무나 흥미로웠다고, 그 순간부터 인간의 모든 삶에서 그 부분부터 찾고 들여다보게 되었다고, 그렇게 배워 나가다 보니 그 흔해 빠진 어리석음과 대책 없음이 인간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아주 마음에 들어 버렸다고 말해 줄 수 있다.

#최정원 #허밍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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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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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동안 왜인지 마음이 불편했다. 어딘가 꽉 막힌 듯한 좌불안석 느낌.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불편하지만 알아야 할, 기억해야 할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가볍게 한 편 읽어 보겠다고 책을 들었다가 한 자리에서 끝까지 읽었다. 표제작인 '너의 유토피아'와 다른 듯 비슷한 결의 7편, 총 8편의 sf 단편 소설이다.

유토피아를 '세상에 진짜로 변화를 가져오는 움직임'이라고 표현한 사회학자가 있다고 한다. 세상은 계속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지만 옳은 방향의 나아감인지 아리송한 순간들이 늘 있다. 재난, 전쟁, 혐오와 차별 속에서 주어진 환경에 대한 자각 없이는 어쩌면 평온한 삶을 살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정보라 작가의 단편들을 읽고 나서는 어쩐지 불편하고 괴롭고 막막하더라도 나서서 깨닫고, 깊이 애도하고 연대하며 미약하나마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8편 이야기 중에 제일 읽기 힘들었으면서도 뇌리에 박힌 작품은 '여행의 끝'. 식육을 하게 되는 바이러스가 순식간에 전파되어 전염이 되지 않은 확실한 생존자들을 우주로 보내 지구를 구할 방법을 찾아 오는 임무를 맡은 주인공과 동료들. 우주선 내에도 감염자가 발생하면서 최대의 위기를 맡게 된다. 적나라한 글에 여러 번 괴로웠으니 나에겐 굉장히 하드한 SF였다. 결말을 살짝 예상하긴 했지만 적잖이 놀랐고 그래서인지 강한 인상을 줬던 이야기였다.

'one more kiss, dear'도 참 좋았다. 개인과 거주지, 아파트와 건물 전체가 동기화 되는 가상의 미래. 왠지 터무니없는 소재는 아닌 것도 같다. 사물인터넷의 확장으로 개인의 행동과 취향 등 거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세상에서 주인공이 거주하는 아파트 건물 내의 엘리베이터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끌어간다. 엘리베이터의 시선으로 보여지는 한 사람의 일상과 숨은 의미들을 함께 쫓다 보면 왠지 삭막하지만 온기 있는 풍경이 느껴진다.

제일 처음 수록된 '영생불사연구소'는 키득거리며 재미있게 읽다가 뒷통수 한 대 맞는 기분을 선사하며 낯설지 않게 책의 문을 열었다는 생각이 든다. 'maria, gratia plena'는 영화 한 편을 시청하는 듯한 몰입감을 줬고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는 사람의 뇌파를 이용해 그 사람의 경험 혹은 꿈을 생생히 들여다볼 수 있는 설정이 기발하게 느껴졌다. 표제작 '너의 유토피아'는 지옥 같은 상황에 떨어져 있어도 조금이나마 계속 나아가겠다는 의지와 희망이 제일 많이 드러났던(이 소설 중에서) 작품이었다.

불편해도 인식해야 하는 것. 그리고 계속 나아가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마음을 작게나마 품는다. 어두운 현실이지만 언젠가 만나게 될 유토피아는 결국 모두가 힘을 합쳐 꾸준히 만들어가야 하는 세상이니까. 작은 변화의 움직임이 거대한 물결이 될 때까지 우리는 계속 움직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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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그렇게 나와 녀석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우주선 구석에 나란히 앉아서 서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늘어 놓으면서도 또 그 알아듣지 못할 바를 무조건적으로, 무비판적으로 들어주었다. 사실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법이다.

🔖108. 대화란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 '협상'이니 '의견 조율' 따위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하더라도 결국 끝에 가서는 어느 한쪽이 이기고 다른 쪽이 굴복하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 의견이 대립되는 상황에서 관련자 모두가 100퍼센트 만족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관련 당사자들이 모두 상대를 위해 '양보'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더 많이 양보하고 더 많이 참아야 하는 사람이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타협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대화는 결국 전쟁이고, 그 결과는 언제나 어느 한쪽에게 강압적이고 때론 폭력적이다.

🔖120. 희망은 그러니까,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거야.

🔖160. 희망은 있다고 생각하면 있고, 의미는 만들어서 부여하면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주관적인 믿음이다. 객관적인 상황이 그런 주관적인 믿음을 뒷받침해준다는 보장은 없다. 우주 삼라만상이 나 한 사람의 뜻에 일일이 따라주어야만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정보라 #너의유토피아 #래빗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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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격자의 차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6
연여름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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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2년, 다섯 번의 세계 대전이 지나고 거의 100프로 치사율을 가진 리누트 바이러스가 횡행해 말 그대로 인류 멸종을 앞두고 있는 어떤 미래의 이야기.

없어진 줄 알았던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인간과 인공지능은 함께 생존을 모색한다. 인공지능 모세는 그저 중재자의 역할로 모두가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고 인간들은 실무자가 되어 생존을 이어간다.

/ 이들은 죽음을 부르짖는 동시에 생존을 갈망했다. 두무리로 갈라진 채에도 그랬지만 한 사람의 내부에서도 두 의지가 충돌했다. 죽음과 안식을 동일시하기도 하며, 생존을 두려워하면서도 희망했다. 인공지능에겐 모순의 연쇄였다. (p.24)

인공지능이 생각한 인간의 이런 모순적인 면은 생존에 치명적인 위험이라 판단하고 모순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 자체를 철저히 제한한다.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으로 중요했던 인간들 역시 중재자 모세를 따르며 잃어도 상관없을 많은 것들을 버리는 삶을 이어간다.

상상은 그 자체로 허구일 테니 금지되고, 꿈을 꾸는 것조차 병증으로 치부되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며, 여러 감정은 오류로 판단되어 결격 사유가 되는 곳. 결점이 7번 누적되면 부적격 판단으로 영원히 소거되는 곳이 배경이다. 9세대까지 이어지던 생존의 찰나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세인은 레드를 만나 생존 가능성이 없는 돔 밖에서 사람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40세를 코앞에 둔 세인의 기록은 무결점. 결점 하나 쌓지 않고 완벽한 실무를 성실하게 맡던 세인의 감정은 흔들린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 못한 비밀을 안고 있던 세인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합리와 실용에 대해서 생각했다. 중재도시에서의 합리란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그저 생존만을 위한 삶이다. 주변 사람들과 감정을 나누고, 실패해도 매사에 선택하며, 꿈과 사랑을 나누고, 호기심을 가지고 나아가는 삶을 원하는 인간은 불합리하고 부적격자로 여겨진다. 밑줄 그어야 했던 문장이 넘쳐났고 한 단어, 한 문장 꼼꼼하게 읽고 싶고, 읽어야만 했던 소설이었다. 생존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존만을 위한 삶을 읽고 느껴본 소감은 매우 착잡하고 괴로웠다. 이야기가 없고 호기심과 희망이 없는 세상이라니 꿈에서조차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점점 더 스마트해지고, 편리함과 실용성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하는 지금의 순간에도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것이 무조건 좋은 것, 옳은 것이라는 판단을 유예하게 된다. 내 인생은 군더더기가 잔뜩 낀 모순 덩어리일지라도 꿈꾸고 희망하고 소통하며 부딪히고 흔들려도 주체적으로 나아가는 인생이고 싶다. 여운이 길어 책을 다 읽고 3일 동안 다른 책을 손에 들지 못했다. 쉽사리 이 책 저 책 이동하지 못하는 게 내 단점일 수 있지만 계속 곱씹을 수 있는 책을 만났다는 것이니 당분간 이 기분을 즐기고 싶다❣️

+ 현대문학 핀 장르 시리즈 나에게 완전 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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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어떻게든 하루라도 더 생명을 연장해나갈 것인가, 예정된 고통을 조금이라도 빨리 끝낼 것인가. 무엇이 더 인간적인가.

🔖154. 돔이 허락한 둥근 경계가 없는, 시작도 끝도 없는 검은 밤. 검디검은, 모두가 꿈을 꾸어도 좋을 시간이. 그 속으로 걸어 나갈 시간이었다. 허구이자 곧 진실인 그곳으로.

🔖173. 인생의 반환점이 아닐까 싶은 해에 예전엔 인류의 기대 수명이 어땠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세계 평균이 40세에 못 미쳤다는 결과를 보았다. 100년 전이었다면 나는 이미 고인일 가능성이 컸다. 어쩐지 그 순간 마지막 장사를 마치고 마감까지 끝낸 다음 어두컴컴한 가게에 홀로 앉아 있는 주인장이 된 기분이 들었다. 자, 오늘로 전부 끝. 내일은 없음. 그리고 그 주인장은 이런 질문을 한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중요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이 시점에도 변함없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연여름 #부적격자의차트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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