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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 - 어느 문외한의 뉴욕 현대 예술계 잠입 취재기
비앙카 보스커 지음, 오윤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8월
평점 :
요근래 읽은 책 중에 인덱스 제일 많이 붙인 책! 기대 이상으로 너무 재미있었다. 미술관 가는 걸 좋아하는데 '아니, 이런 것도 예술이라고???' 또는 '이런 그림은 다섯 살 짜리도 그리겠네' 이런 말을 한 번이라도 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당장 이 책을 읽으라구.
➿️ 현대 예술이 나를 따돌리냐, 내가 무식한 거냐
제목을 보고 약간 비유적인 표현일까 궁금했었는데 아니, 진짜 스파이가 잠입했다. 그 스파이는 바로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이 책의 작가인 비앙카 보스커. 비앙카는 어린 시절 할머니의 수채화 한 장을 떠올리며 갑작스럽게 예술적 열망에 휩싸인다. 미치도록 궁금했던 그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예술계에 은근하게 잠입한다.
브루클린 작은 갤러리의 직원으로 시작해서 아트 페어에서 그림을 판매해 보기도 하고, 떠오르는 신예 작가의 조수 일을 하다가 구겐하임 미술관의 경비로까지 취직해 예술의 최전방에 서서 예술이란 무엇인지, 예술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간다. 그 과정이 얼!마!나! 스펙타클한지 이 여자에게 홀랑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예술이란 것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답해가는 과정은 뒤로 하고 마음 먹은 일을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내는 이 작가의 근성에 혀를 내둘렀다. 예술을 탐구해 가는 과정도 충분히 흥미롭게 그려졌지만 이 여자의 모든 일상을 바쳐 기필코 답을 얻어 내고야 마는 그 여정 역시 고도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열정적이고 지적이며 위트까지 겸비한 그녀의 글은 탁월하게 재미있고 매력적이었다.
끝끝내 찾아낸 진실은 어쩌면 생각보다 그리 거창한 건 아니었다. 결국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통찰, 그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예술계에 발을 딛기 전과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멈추고, 알아채고, 감탄하라.(p.439)
미술계라는 고상한 규칙과 질서 때문에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시각을 잃은 채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기만 급급했던 거 아닐까. 예술에 정답이란 게 있을까.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난 후엔 더이상 작가 것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작품을 바라본 천 명의 사람이 있으면 그 작품 역시 천 가지의 뜻을 품은 거니까. 그러면서도 나는 미술관에 가면 벽글을 보기 바빴다. 내 느낌보다 '이건 이런 거야!'라는 설명을 읽어야 왠지 작품을 이해한 것 같았단 말이지.
아직도 해소 못한 질문 몇 가지는 남아 있지만 작품 보는 시각의 변화를 안겨 준 이 책. 다 읽고 나니 당장 미술관에 가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다. 다짜고짜 영감이 쏟아져 작품을 보자마자 감동의 전율을 느끼긴 어렵겠지만 애정과 열정을 담아 많이 보고, 오래 보고, 깊게 보다 보면 나에게도 나만의 직관이 생길 것 같단 말이지. 변화한(?) 내가 벌써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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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난 예술이 왜 중요한지, 중요한 문제가 맞긴 한지, 팽팽하게 잡아당긴 처음 위에 바위 모양으로 묻힌 물감 자국을 고요히 바라보는 시간이 정말로 인간 존재를 바꿔놓을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당장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26. 예술가들은 작품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하면 갑자기 후두염을 앓는 양 굴어댔다. 갤러리스트들은 작품의 가격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물론 사겠다는 사람에게 작품을 팔지 않기까지 했다. 큐레이터들은 일반 대중이라는 단어에 경기를 일으켰다. 비평가들은 암호로 글을 썼다(예를 들어 '작가 신체에 의한 지표적 기호'는 쉽게 말하면 '손가락으로 칠한 그림'이다). "인간 삶의 독특한 특징"이라는 예술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왜 예술은 대중을 따돌리는가? 왜 예술은 나를 따돌리는가?
🔖134. 이상하긴 하지만 미술계가 지금처럼 돌아가는 건 아무나 미술계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아무나 이해할 수도 없고. 바로 그게 흥미와 매력의 원천이고. 정보가 권력이에요. 어떤 세계에 작동 방식에 대해 아는 게 많아질수록 그 세계에서 더 많은 힘을 가질 수 있어요.
🔖404. 미술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니다. 이제 나에게 미술관 경험은 메뉴에서 요리를 골라 주문하는 일에 가까워졌다. 원하는 몇 가지만 시키면 된다. 거기 있는 모든 것을 꾸역꾸역 삼킬 필요가 없다.
#비앙카보스커 #미술관에스파이가있다 #알에이치코리아 @rhkorea_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