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박한 공기 속으로
존 크라카우어 지음, 김훈 옮김 / 민음인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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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이자 《아웃사이드》의 기자 존 크라카우어가 1996년 5월 로브 홀이 이끄는 등반대 팀과 함께 에베레스트를 오른다. 존은 지나치게 상업화 된 에베레스트의 현실을 밀착 취재하여 잡지에 글을 실을 목적으로 출발하게 되었으나 타고난 산악인으로써 취재뿐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에베레스트의 정상까지 등반하고자 마음 먹는다.

제법 두께가 있고 활자도 빽빽히 채워져 있지만 소설보다 더 극적이고 생생한 현실감에 푹 빠져 읽었던 3일이었다. 시간의 흐름상으로 서술되었고 작가가 팀 동료들을 만나 에베레스트 등정 기간 동안 서로 관계 나누며 친밀함을 형성하며, 힘든 상황에서 함께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나 역시 함께 지켜봤던 터라 나도 간절히 모두의 성공을 바라게 됐다.

이 지상에서의 탐험과 모험 중 으뜸가는 곳, 세상의 지붕인 에베레스트는 물론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많은 산악인들과 유명인들의 등반을 돕기 위한 여러 등반대가 조직되어 체계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은 이번 책을 통해 알게 됐다. 각각의 등반대는 많은 고객을 정상에 올려 놓을수록 명성을 얻게 되고 그에 따르는 수익도 크게 발생하는 법. 서로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참담하기도 했다. 신성시 되었던 에베레스트가 상업적으로 변모한 모습의 가운데 있는 상황은 예전같은 위엄을 띄기란 어려워졌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해발 8.000미터에서는 산소 부족으로 인한 온갖 질병(폐부종, 뇌수종 등)과 정신 착란이 자주 일어날 수 있다는 점도 심히 놀랐다. 그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정상에 다다르려고 하는 인간의 심리는 도대체 무엇일까? 목숨까지 걸 만큼 지독한 열정은 본연의 순수한 열의인지 아니면 무모한 도전인지, 지나친 자만인지 읽으면서도 많이 혼란스럽고 안타까웠다.

\ 자기 몸에 닥친 고통과 피로를 무시하고 무조건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종종 심각한 위험이 닥쳐오리라는 걸 예고해 주는 징조들 역시 소홀히 보아 넘기는 경향이 있다.(p.272)

사소해 보이는 실수가 하나씩 누적되어 재난의 시작을 불러온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 날의 기상 상황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었고, 어쩌면 막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심정으로 진실을 세세하게 기록하며 참회하는 작가의 모습에 희생자를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생존자의 처절한 심정도 이해되었다.

등반이라는 건 아무래도 인생 그 자체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을 내내 했다. 정상을 향한 무모한 열망은 어쩌면 자각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갉아 먹는 행위가 될 수도 있고, 꿈꾸던 정상에 발 디딘 순간 역시 반환점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으면 내려갈 일이 더욱 까마득해지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고 느낀다. '열정'과 '무모함'의 경계에서 정확한, 혹은 더 올바른 판단을 위해 순간순간 자신을 돌아볼 것, 그리고 산에서도 인생에서도 언제나 내려가는 그 위치에서 더욱 조심할 것. 잘 내려가는 방법을 아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자만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으며. 때로는 물러서는 것 역시도 용기 있는 선택이라는 걸 가슴에 새긴다.

다 읽고 나서 다시 돌아본 초반의 단체 사진, 정상 도전을 앞두고 베이스캠프에서 모두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자꾸만 가슴에 밟힌다. 소설 못지 않은 풍부한 읽는 재미로 3일을, 읽은 후의 여러 날을 날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았던 책이었다. 깊은 여운이 주는 진한 울림이 있다.

⋱⋰ ⋱⋰ ⋱⋰ ⋱⋰ ⋱⋰ ⋱⋰ ⋱⋰ ⋱⋰ ⋱⋰ ⋱⋰ ⋱⋰⋱⋰ ⋱⋰⋱⋰⋱⋰

🔖114. 어떤 사람들은 큰 꿈들을 갖고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작은 꿈들을 갖고 있어. 네가 어떤 꿈들을 갖고 있든 간에 중요한 건 꿈꾸기를 그치지 않는 거란다.

206. 각종 편의 시설이 갖춰진 베이스캠프를 떠나 위로 올라가는 것은 사실상 금욕주의적인 고행에 가까운 것이 된다. 산의 덩치가 워낙 크기 때문에 즐거움에 대한 괴로움의 비율도 과거에 내가 올라본 다른 어떤 산보다 더 컸으므로 나는 이내, 에베레스트에 오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고통을 감내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208.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심한 고투를 해야 하고 위험성이 아주 높다는 점에서 등산은 여느 평범한 게임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등산은 인생 그 자체였다.

239. 우리 대부분은 정상에 오르고자 하는 열병에 사로잡혀 있어 우리 중의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차분히 성찰할 겨를이 없었다. 나중에,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한 뒤 차분히 돌이켜봐도 늦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261. 동기야 어떻든 간에 롭상이 고객 하나를 끌어 주려 결심한 사실은 당시 유달리 중대한 잘못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서서히 눈에 띄지 않게 임계 질량을 향해 증폭되어 간 많은 사소한 잘못 중 하나가 되었다.

277. 애초에 나는 산 정상에 이를 때면 온 마음이 벅찬 환희로 들끓어 오를 거라 예상했다. 그리고 결국 내가 어린 시절부터 줄곧 꿈꾸고 열망해 온 목표를 막 성취했다. 하지만 정상은 반환점에 불과했다. 앞으로 길고도 위험한 하산 길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암담한 기분에 자축하고 싶은 충동 같은 건 완전히 사그라들고 말았다.

330. 나는 요약해서 간추린 내용, 경과하는 시간을 통한 모든 것, 자신이 이야기하는 걸 적절히 통제하고 있다는 호언장담을 불신한다.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아주 고요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 평온한 가운데 떠오른 감정을 갖고서 글을 쓴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바보거나 거짓말쟁이다. 이해한다는 건 전율하는 것이다. 회상한다는 건 과거의 그 순간으로 다시 들어가 갈가리 찢기는 것이다.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 앞에서 겸허하게 한 쪽 무릎을 꿇는 대가를 존경한다.


#존크라카우어 #희박한공기속으로 #민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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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대루
천쉐 지음, 허유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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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그대로 하늘까지 치솟은 높이 150미터, 지상 45층 고층 아파트 '마천대루'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피해자는 마천대루 상가에 입점해 인기를 누리던 카페의 매니저 중메이바오. 1부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 그녀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시선과 일상이 차례로 보여진다. 2부는 사건 후 주변인들의 진술, 3부는 범인이 밝혀지고 4부는 사건 이후 여전히 마천대루에 머무르거나 들어오고 나간 이들의 삶이 펼쳐진다.

범인이 누구냐에 치중하고 싶지 않았다던 작가의 말대로 범인에 대한 곤두선 신경을 누그러뜨리며 읽으려고 노력했다. 딱히 힘들 것도 없었던 게 다양한 군상의 인물이 등장했음에도 각각의 캐릭터나 환경에 대한 묘사가 너무 생생해 읽는 자체에 큰 재미가 있었다.

모두가 범인이 아닌 것 같았으면서 또 그 모두가 범인이어도 이상하지 않을 전개였다. 정작 드러난 범인을 보고 나선 왠지 아쉬운 느낌이 들었는데 난 누가 범인이길 바랐던 걸까. 누구나 빠져들게 만드는 미모에 상냥한 천성까지 지녔던 메이바오의 안타까운 삶이 가슴 아팠다.

인물들의 서사 속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종종 있어서 이야기뿐 아니라 흥미를 느꼈다. 누구나 자신이 보고 느끼는 대로 상대를 판단하는 모습은 사실 나조차도 깨닫지 못한 채 저지르게 되는 나쁜 선입견 중 하나인데 글로 읽게 되면 화들짝 놀라고 만다.

🔖다썬은 나 같은 환경에서 자란 여자는 항상 즐겁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내 마음속은 증오로 가득 차 있다. 그건 돈으로도 메울 수 없는 것이다. (p.327)

🔖그녀는 나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거죠. 나처럼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모든 게 순조로워서 그녀가 짊어지고 감당해야 했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고 착각한 거예요. 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아니,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었어요. 감당하면 되니까. 난 감당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내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어요. (p.337)

상대의 판단에 내가 이러라 저러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어쩌면 가까이에서도 눈 감고 입 닫고 나 편한 대로 나의 잣대로 누군가를 정의내리고 있지는 않았나 돌이켜 보게 된다. 인간에 대한 세밀하고 농도 깊은 작가의 관찰력이 돋보였달까. 각박해지는 세상 속 같은 공간에서 어쩌면 서로의 일상을 넘나들면서도 현관문을 닫으면 각각의 세계로 단절(p.482)되는 모습이 지금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 착잡했다.

작가의 말처럼 범인에 치중하기보다 인물 하나하나에 깊은 관심을 두고 읽으면 읽는 재미 충만한 탄탄했던 소설이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서로를 구원하는 사랑은 존재할 수 있는 건지 막연한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안젤라 베이비가 주연을 맡아 드라마로도 성공했다고 하니 작품성과 대중성까지 다 잡은 이야기임에도 틀림 없고. 흡입력이 좋아서 몇 페이지 보려고 앉았다가 금세 새벽 3시가 되었던 내 경험은 추가 옵션요. 자, 이제 드라마로 다시 마천대루를 시작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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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 남들 앞에선 비뚤어진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그가 무방비 상태일 때 가까운 사람들은 그걸 느낄 수가 있어요. 나도 어느 정도는 그와 비슷한 부류예요. 겉으로는 아무랄데 없이 바르고 얌전해요. 부모 속 한번 안 썩이고 자랐고 학교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 장래가 유명해 보이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어요. 하지만 눈만 감으면 모든 걸 내려놓고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가장 위험한 여행,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 문란한 섹스, 사치스러운 충동구매를 꿈꾸죠.

🔖320. 가끔 자신이 낯선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뭐랄까. 자신에게 여러가지 모습이 있는데 좋은 남자, 좋은 아빠, 좋은 아들, 좋은 남편이라는 얼굴에 가려져 있는 거죠. 그러다가 깊은 밤 샤워를 마치고 거울 속 초췌한 자신의 얼굴을 대할 때 문득 미소 한 점 없는 그 얼굴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지 않아요? 칼로 그은 듯 팔자 주름이 깊게 파이고 줄줄 흘러내린 얼굴이. 얼굴 속에 감춰져 있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하는 느낌이죠.

🔖355. 내가 하고 싶은 건 그뿐이었어요. 그녀의 몸을 받쳐 파도 위에서 부유하게 하며 그 삶의 무게를 조금 나누어 짊어지는 것이요.

#천쉐 #마천대루 #인플루엔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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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황홀한 순간
강지영 지음 / 나무옆의자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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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에 완독. 흡입력 넘치는 소설!!

목차는 매 월별로 두 여성의 시선으로 번갈아 자리한다. 김하임과 이무영. 두 여자의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1월의 김하임과 1월의 이무영으로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11월 이후는 이무영 이름의 목차 없이 김하임의 11월, 12월만 있는 게 처음부터 왠지 긴장이 되었다.

긴장했던 것도 잠시 김하임의 이야기는 산뜻하고 재치발랄 코믹 그 자체였다. 할아버지를 도와 연향역 매점을 맡아 일하게 된 김하임은 전남자 친구를 잊을 새로운 사랑을 기다리고 있다. 늘 티격태격하지만 곁에서 묵묵히 도와주는 소꿉친구 성기와의 케미도 귀엽고.

긴장을 놓던 순간 마주한 1월의 이무영은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부모의 도움으로 오갈 데 없던 희태가 집에 들어온 이후 산산이 조각난 무영의 삶. 희태는 완벽에 가까운 연기로 모두를 속이고 고등학생 신분이던 무영을 겁탈해 임신하게 만들었고 무영은 부모의 충격을 염려해 모든 걸 버리고 떠나 딸을 낳고 숨어 산다. 아직 딸 민아가 어렸던 시절 자신들을 찾아낸 희태를 피하지 못한 채 십 년의 세월을 함께 살아온 무영의 1월부터 가슴 절절하게 아려왔다.

하임은 역무원 지완에게 첫눈에 반하여 사랑을 싹틔우게 되고 지완도 하임에게 점차 마음을 여는 풋풋한 모습과 매번 극강으로 대비되는 무영의 처절한 삶의 모습이 어우러져 불행이란 말로도 부족한 지옥 그 자체를 생생히 보여준다. 여전히 지 버릇 개 못 준 쓰레기 희태는 무영과 민아를 처참히 괴롭히고 딸을 지키기 위한 무영은 조용히 모든 걸 참아낸다. 생계를 잇기 위해 연향으로 오게 된 무영과 연향에서 계속 머물러 있던 하임의 연결고리는 중반부부터 풀어지기 시작한다. 하임과 무영의 거의 황홀한 순간은 과연 오긴 오는 걸까.

직접 쓰면서도 고통스러웠다는 작가의 말을 깊이 공감한다. 읽으며 괴롭고 아팠지만 피할 수도 없었던 이유가 문장들이 탄탄하고 안정적이었고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능력이 탁월해서 넋을 놓고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냥 홀려 버렸다. 설득하게 만드는 필력에 감탄했다. 하임이 막무가내로 무지하지 않아서 좋았고 무영이 끝끝내 강단이 있어 좋았다. 내 주변에도 아마 많은 무영과 하임이가 있겠지. 나 역시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 되는 시대가 머지않았길(p.285)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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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나는 지완이 놓고 간 육백 원을 손에 꼭 쥐고 그와 나 사이에 놓인 스무 발자국쯤 되는 공간을 종이접기 하듯 살풋 접어 답삭 붙여 놓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89. 가장 좋은 걸 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매대에 쌓인 싸구려 사과 중 가장 예쁜 걸 골라도 좋고, 읽던 책 중 가장 낡아도 괜찮았다. 좋아서 준다는 그 마음 하나면 값이 비싸졌다.

🔖121. 음지에 뿌리류 내리고, 양지를 향해 가지를 뻗어가는 식믤처럼 희태의 친절에선 언제나 퀴퀴한 늪지의 개흙 냄새가 풍겼다.

🔖178. 마데카솔로는 어림도 없는 절망의 병, 그게 불행이다. 나의 불행이 지완의 평탄한 삶을 감염시켜 농양을 만들고 부스럼을 일으킬까 두려웠다. 그걸 알면서도 지완을 떨칠 수 없는 건, 죽음 앞에 이기적으로 돌변하는 인간의 악마적 본성일지 몰랐다. 미안한 사람이 또 한 명 생겨버리고 말았다.

🔖196. 남과 다르다는 건 튀어나온 못처럼 뽑아내고싶거나 박아 넣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키게 마련이다.

🔖198. 가요, 천 길 낭떠러지든 해변 오두막이든 세상 끝이든.

🔖229. 아무래도 낭떠러지 같다고, 그래서 혼자 간다고. 쫓아오면 뛰어내리겠다고 전해.

#강지영 #거의황홀한순간 #나무옆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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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밍 소설Y
최정원 지음 / 창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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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서울의 수백만 명이 나무로 변한 세상. 살아남은 사람들은 재빨리 대피해 서울을 막을 큰 방벽을 세워 대책을 연구했다. 9년이 흐른 지금, 서울 상공에 '우산'이라는 광역 방역 시스템인 기구를 설치해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우산'을 실행하기 위해 최소한의 인력을 서울로 투입한다.

주인공 여운은 서울에서 엄마를 잃고 이모와 도망쳐 살고 있으면서 늘 엄마의 생사에 대한 희망을 품는다. 큰돈을 벌어 방벽 근처 바이러스의 위험 상황에서 일하는 이모를 편히 살게 할 목적으로 서울에 투입하기로 한다. 여운과 함께 파견된 R은 인공지능 로봇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며 흔들림이 없어 여운을 완벽히 보필한다. 완전 면역을 가진 채 서울에서 고립됐지만 살아 남아 나무들을(가족과 친구들을) 돌보던 정인을 만나게 되고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 마음을 주고 의지하게 된다.

책을 읽는 동안은 쏟아져 내리는 질문들 속에 파묻혔던 시간들이었다. 나무 바이러스는 변이를 거치며 투입된 사람을 공격하기도 해서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느껴야 했던 막막함과 두려움. 고스란히 느껴졌다.

우린 코로나19를 겪었고 그때의 상황과 겹쳐 보이는 장면들이 있었다. 바이러스, 감염, 팬데믹. 여러 재난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과 그저 운 좋게 재난을 피한 사람들의 대립되는 마음이 씁쓸했다. 진정한 애도는 어떻게, 얼마나 표현해야 하는 건지, 허울뿐인 위로와 진심은 구별될 수 있는지 한참을 고민하게 했다.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기필고 두드러지게 나뉘고야마는 강자와 약자. 언제나 무시되기 쉬운 부류는 소수였다. 다수의 '합리'라는 말로 얼마나 많은 소수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아 왔는지도 떠올려 본다.

"수가 적으면 목소리가 작죠. 목소리가 작으면, 못 들은 척할 수 있지. 그런 멍청한 짓이 통하는 것도 지금의 감염자 수가 전체 인구수에 비해 적기 때문이다. 그럴싸한 합리화를 거친 끝에 모두 지워 버리기로 작정할 수 있을 만큼. 함께 감당할 다른 방법을 찾기보다, 한시라도 빨리 싫은 것을 눈앞에서 삭제하고 싶어 하는 본성에 충실할 수 있을 만큼." (p.296)

함께 감당하고 이겨내는 마음을 품어본다. 인공지능이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비춰지는 인간의 모습은 약간은 비합리적이고 어리석기도 하며 대책없는 무모함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렇기에 인공지능이 절대 가지지 못할, 이해하지도 못할 인간의 고유함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합리적이고 공정함이라 함은 어떤 입장에서는 매우 비합리적이며 불공정한 상태일 수도 있음을 항상 헤아려야 할 것 같다. 살짝 개연성이 낮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기도 했지만 한 권으로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독자를 생각의 늪에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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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지구가 드디어 인간을 치워 버리겠다고 결심하고 스스로 백신 주사를 놓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74. 비록 영원히 헤어질 수밖에 없었지밀 고통 없이 평온하길 바랐던 가족이, 저런 모습으로 아직도 움직이고 있는 걸 보게 된다면...... 누구든,

🔖136. 이별은 각오한다고 무뎌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148. 웃는 이유요? 밝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예요. 편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요.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거든요. 잘 이겨 낸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예요. 그냥...... 평범하게, 똑같은 사람으로 봐 달라는 아부 같은 거예요. 동정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243. 더 자세히 설명하라면, 당신의 그 비합리성이 너무나 흥미로웠다고, 그 순간부터 인간의 모든 삶에서 그 부분부터 찾고 들여다보게 되었다고, 그렇게 배워 나가다 보니 그 흔해 빠진 어리석음과 대책 없음이 인간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아주 마음에 들어 버렸다고 말해 줄 수 있다.

#최정원 #허밍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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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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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동안 왜인지 마음이 불편했다. 어딘가 꽉 막힌 듯한 좌불안석 느낌.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불편하지만 알아야 할, 기억해야 할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가볍게 한 편 읽어 보겠다고 책을 들었다가 한 자리에서 끝까지 읽었다. 표제작인 '너의 유토피아'와 다른 듯 비슷한 결의 7편, 총 8편의 sf 단편 소설이다.

유토피아를 '세상에 진짜로 변화를 가져오는 움직임'이라고 표현한 사회학자가 있다고 한다. 세상은 계속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지만 옳은 방향의 나아감인지 아리송한 순간들이 늘 있다. 재난, 전쟁, 혐오와 차별 속에서 주어진 환경에 대한 자각 없이는 어쩌면 평온한 삶을 살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정보라 작가의 단편들을 읽고 나서는 어쩐지 불편하고 괴롭고 막막하더라도 나서서 깨닫고, 깊이 애도하고 연대하며 미약하나마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8편 이야기 중에 제일 읽기 힘들었으면서도 뇌리에 박힌 작품은 '여행의 끝'. 식육을 하게 되는 바이러스가 순식간에 전파되어 전염이 되지 않은 확실한 생존자들을 우주로 보내 지구를 구할 방법을 찾아 오는 임무를 맡은 주인공과 동료들. 우주선 내에도 감염자가 발생하면서 최대의 위기를 맡게 된다. 적나라한 글에 여러 번 괴로웠으니 나에겐 굉장히 하드한 SF였다. 결말을 살짝 예상하긴 했지만 적잖이 놀랐고 그래서인지 강한 인상을 줬던 이야기였다.

'one more kiss, dear'도 참 좋았다. 개인과 거주지, 아파트와 건물 전체가 동기화 되는 가상의 미래. 왠지 터무니없는 소재는 아닌 것도 같다. 사물인터넷의 확장으로 개인의 행동과 취향 등 거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세상에서 주인공이 거주하는 아파트 건물 내의 엘리베이터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끌어간다. 엘리베이터의 시선으로 보여지는 한 사람의 일상과 숨은 의미들을 함께 쫓다 보면 왠지 삭막하지만 온기 있는 풍경이 느껴진다.

제일 처음 수록된 '영생불사연구소'는 키득거리며 재미있게 읽다가 뒷통수 한 대 맞는 기분을 선사하며 낯설지 않게 책의 문을 열었다는 생각이 든다. 'maria, gratia plena'는 영화 한 편을 시청하는 듯한 몰입감을 줬고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는 사람의 뇌파를 이용해 그 사람의 경험 혹은 꿈을 생생히 들여다볼 수 있는 설정이 기발하게 느껴졌다. 표제작 '너의 유토피아'는 지옥 같은 상황에 떨어져 있어도 조금이나마 계속 나아가겠다는 의지와 희망이 제일 많이 드러났던(이 소설 중에서) 작품이었다.

불편해도 인식해야 하는 것. 그리고 계속 나아가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마음을 작게나마 품는다. 어두운 현실이지만 언젠가 만나게 될 유토피아는 결국 모두가 힘을 합쳐 꾸준히 만들어가야 하는 세상이니까. 작은 변화의 움직임이 거대한 물결이 될 때까지 우리는 계속 움직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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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그렇게 나와 녀석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우주선 구석에 나란히 앉아서 서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늘어 놓으면서도 또 그 알아듣지 못할 바를 무조건적으로, 무비판적으로 들어주었다. 사실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법이다.

🔖108. 대화란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 '협상'이니 '의견 조율' 따위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하더라도 결국 끝에 가서는 어느 한쪽이 이기고 다른 쪽이 굴복하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 의견이 대립되는 상황에서 관련자 모두가 100퍼센트 만족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관련 당사자들이 모두 상대를 위해 '양보'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더 많이 양보하고 더 많이 참아야 하는 사람이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타협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대화는 결국 전쟁이고, 그 결과는 언제나 어느 한쪽에게 강압적이고 때론 폭력적이다.

🔖120. 희망은 그러니까,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거야.

🔖160. 희망은 있다고 생각하면 있고, 의미는 만들어서 부여하면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주관적인 믿음이다. 객관적인 상황이 그런 주관적인 믿음을 뒷받침해준다는 보장은 없다. 우주 삼라만상이 나 한 사람의 뜻에 일일이 따라주어야만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정보라 #너의유토피아 #래빗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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