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시선 -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
이윤희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벌써 졸업한지도 10년이 넘어서 가물가물하지만 대학생 때는 영역별로 필수로 들어야하는 교양 강의가 있었다. 나는 그중 예술 분야에서는 서양 미술사를 수강했다. 강의 시간에 시대별로 대표적인 화풍의 그림들을 보며 서양의 미술이 어떤 흐름을 거쳐 현대에 이르렀는지를 배웠다. 이제 시간이 많이 흘러서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지만 아직도 생생한 기억이 있다. 어느날 강의 시간에 <나이 든 여인>이라는 그림을 봤을 때 뭔가 위화감을 느끼고 불쾌했던 기억이다. 내가 실제로 혹은 그림이나 영상에서 봤던 할머니들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고, 화가가 악의를 가지고 그린걸까 의심스러울 정도의 그림이었다. 그런데도 그 불편한 감정이 무엇 때문인지는 정확히 몰랐다. 

이 책에서는 그동안 그림을 보며 묘하게 불편함을 느꼈던, 하지만 그 불편함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던 나같은 사람을 위해 다양한 그림과 그 그림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짚어가며 이야기해준다. 나는 책에서 '노화' 파트를 읽으며 예전에 봤던 그 그림에 악의가 다분했음을 깨달았다. 노화를 포함해 의문, 시선, 누드, 악녀, 혐오, 허영, 모성, 소녀, 위반이라는 10개의 키워드로 나누어 차근차근 불편한 시선의 정체를 알아가는데, 꽤 두꺼운 책인데도 재미있게 금방 읽었다.



앞서 내가 서양 미술사 강의를 들으면서 느꼈던 불편한 감정도, 불편하기는 했지만 왜 불편한지 무엇이 불편한지를 콕 찝어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미술 작품이나 배경에 대한 내 지식이 부족해서라고 어렴풋이 짐작했었는데, 책의 앞머리에서 미술사의 전문가인 작가님도 그랬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왠지 모를 안도를 느꼈다. 불편함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상태에서 300쪽에 가깝게 그 불편함의 실체에 대해 다루고 있을 것 같아서 내용이 기대됐다. 

10개의 키워드를 분석한 내용을 모두 읽고 나니 마지막 부분에 이 책의 내용이 또 다른 불편함을 되도록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써 있었다. 이분법적 편 가르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테지만 많지 않기를 바란다는 작가님의 말이 무엇을 예상하고 의식한 것인지를 알 것 같아서 읽으며 마음이 조금 착잡했다. 



책을 읽다가 반가운 부분이 있었다. 나도 성별을 특정해서 써야할 때는 '여류' 작가라는 말보다 '여성' 작가라는 말을 사용하려고 하는 편인데, 이 책의 저자도 정확히 같은 이유로 그 말을 사용한다고 되어 있었다. 여류는 '어떤 전문적인 일에 능숙한 여자를 이르는 말'이라는 사전적 정의가 있지만, 나는 전문적인 일에 능숙한 사람은 성별에 관계없이 전문가 혹은 그 직업을 나타내는 말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직업 앞에 '여류' 혹은 '여'라는 말이 붙는 순간 그 직업의 주 종사자가 남성이고 여성은 소수라는 것을 반증한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직업뿐이 아니다. 여대생, 여고생이 아니라 여자든 남자든 그냥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으로 불렸으면 좋겠다. 책에서 여성이 바지를 입고 길에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경범죄였던 시절의 이야기를, 입고 싶은 옷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입을 수 있는 시대에 읽으니 기가 막혔다. 너무 멀지 않은 미래의 사람들은 예전에는 여류라는 말을 썼다는 사실을 읽으며 충격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읽었다. 언젠가는 직업이나 신분 앞에 '여'가 붙는 것이 더 어색한 시대가 오지 않을까?



책의 표지에도 수록되어 있는 <올랭피아>를 전에도 몇번 보기는 했지만, 당대의 남성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항상 그림 속 여성이 수줍게 시선을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던 시대에 화면 밖을 똑바로 응시하는 여성을 담은 <올랭피아>를 보고, 지팡이나 우산으로 그림을 훼손하려는 관객도 있었다고 해서 놀라웠다. 수천년을 이어오던 시선의 역전을 이룬 이 그림의 실제 모델이, 다방면에 재능있는 빅토린 뫼랑이라는 화가였다는 사실을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는 것도 나에게는 꽤나 충격이었다.



어떤 책을 읽다가 그 책에 나온 다른 책을 읽고 싶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번에는 작품 중심의 책이라서 파생 도서가 없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이번에도 읽고 싶은 책이 몇권 나왔다. 그중에는 게릴라 걸스의 책도 있다. <여성은 벌거벗어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는가?>라는 공공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이들인데, 문제제기 내용이나 방식이 재기발랄하고 참신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함으로써 받기로 예정되었던 기금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광고도 곧 실을 수 없게 되었지만 당초 목적이었던 문제제기에는 성공했다. 이 게릴라 걸스의 서양미술사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게릴라 걸스 외에도 기존의 상황에 문제를 제기하며 불합리한 상황을 바꿔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에는 많이 담겨있고, 그 사람들로 인해 상황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도 알 수 있었다.



책의 앞부분에 요즘 어린이들이 읽는 위인전에 프리다 칼로와 나혜석이 포함된 걸 보고 생소함을 느꼈다는 작가님의 이야기가 나온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이 책에 나온 수많은 여성 화가들의 이름을 보기 전에 프리다 칼로와 나혜석 외에는 떠오르는 여성 화가가 없었다. 그러다가 신사임당의 이야기가 나온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신사임당을 아예 화가 카테고리의 인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산수도로 높이 평가 받았고 화가 신씨로 일컬어졌으며, 지폐에까지 등장한 인물인데도 여성 화가로는 바로 떠올리지 못한 이유는 책을 읽으며 알았다. 가정을 돌보고 육아를 하는 일도 소중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신사임당의 경우 그림에 대한 훌륭한 재능보다 어머니로서의 모습만이 부각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17세기 유교적 세계관이 도대체 뭘 어떻게 바꿔놓은 걸까 생각하게 되었다.



여성은 인물화의 모델로 그려지기도 했지만, 정물과 같은 취급을 당하기도 하고, 실제와는 다르게 미화되거나 왜곡되기도 했다는 내용을 읽으며 살짝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구약 외경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용기를 낸 영웅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유디트는 클림트의 그림 안에서 악녀에 가깝게 그려진다. 다른 키워드도 흥미롭게 읽었지만, 나에게는 '악녀' 파트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가정에 속박되었던 여성이 사회활동을 시작하고 참정권을 요구하기 시작한 19세기부터 유독 많은 악녀들과 팜므파탈이 그림에 등장했다는 게 의미심장하다.



외모의 미추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남성 화가와 다르게 여성 화가들의 외모에 대한 평가는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고 한다. 뛰어난 재능으로 유럽 전체를 매료시켰던 로살바 카리에라 역시 외모에 대한 아쉬운 소리를 들었고, 무례한 소문이 무성했다고 하는데 정작 본인은 신경쓰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책에 나온 로살바 카리에라의 두 자화상을 아주 인상깊게 봤다. 자신이 해온 작품 활동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이 은은하게 느껴지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책에는 나이 든 여성 화가의 자화상이 그 밖에도 실려있는데, 그 그림들을 보면서 나는 서양 미술사 강의에서 봤던 <나이 든 여인>이 얼마나 악의를 가득 담아 그린 그림이었을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 문장은 사실 책의 제법 앞부분에 등장하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이 부분을 보니까 느낌이 새로웠다. 내가 몰랐던 역사 속 많은 여성 미술가들에게는 작품 활동을 하기에 썩 적합한 환경이 주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지만, 어떻게든 각자의 자리에서 투쟁에 가까운 작품 활동을 해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묵묵히 작품 활동을 했던 여성 화가들이 이미 너무나 대단해보였다.


책 자체의 내용이 풍성하기도 했지만, 유독 공감하거나 마음에 남았던 문장들이 많아서 노트앱에 따로 기록하는 문장들이 역대급으로 많았다. 그 중에서 필사할 문장을 다시 어떻게 추릴지 고민을 많이 했다. 책을 읽기 전에는 미술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데 읽어도 괜찮을까, 너무 어렵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술술 읽을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딸과 아들들이 유쾌하고 재미있게 미술을 접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집필했다고 하는 이 책이,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계기가 되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2-08-10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에 손글씨를 ! 너무 좋아요~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