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사방에 있다 - 시와 일상의 풍경
김정란 지음 / 한얼미디어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세상은 거대한 텍스트이다. 그러니 눈이 밝은 자는 심심할 틈이 없다. 사물들에게는 저마다 입이 달려 있다. 아주 작은 말들, 가벼운 말들, 그러나 너무나 의미심장한 말들을 속삭이는 작은 입들이.”(p190에서)


김정란의 산문집 <빛은 사방에 있다>는 이처럼 삶의 작은 부분의 세심하고 면밀한 관찰에서 시작된다. 여성작가의 특유의 아름다움과 서정성을 담은 제목이 일상을 향해 머금은 잔잔한 미소를 떠 올리게 한다.


가끔 TV 등에서 진보적인 여성학자로 등장해서 보수적인 진영의 인사들을 공격하는 말투가 제법 날이 제대로 서 있다는 인상을 주는 논객으로만 봤지, 책이나 문학적 성향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논객으로 곧잘 우리사회에 만연한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정체와 지난날 우리의 암울했던 정치적 역정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명료함은 이내 저자의 됨됨이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빛은 사방에 있다>는 시를 위주로 쓴 평론과 이념적 성향의 글들을 제외하면 다분히 사회비판적인 시각의 내용을 담은 짧은 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회비판적인 시각들이 문학 작품과 공유되면서 날카롭고 아프지만 시 본령의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잊어 버리지 않고 있다. 


시인답게 전체적인 토막글들이 주는 인상은 다분히 서정적이었다. 하지만 문체적인 성향만 그렇지, 담고 있는 내용은 때론 시적인 서정성을 넘어 사회 참여적 성향을 여실히 드러내기도 한다. 어떤 부분에서는 70, 80년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우리 독재의 뿌리를 가감없이 드러내며, 현정부를 마치 빨갱이처럼 취급하는 일부 극우주의자들을 향해 신랄한 비판의 칼날들을 들이대고 하다.


김수영의 대표적인 참여시인 “풀”을 분석하면서 저자는 작금의 우리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직설적이면서 비유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시커먼 안경을 쓴 쿠데타 사령관은 총에 맞아 죽어 다음에도 여전히 공동체의 맥락에의 맥락을 휘저으며 돌아다니고 있다. 그리고 풀이 이제 바람보다 빠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그 쿠데타 사령관을 신처럼 섬기며, 풀들에게 ‘빨갱이’누명을 씌우려는 시도를 중단하지 않고 있다”(p97에서)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예수를 믿고 예수쟁이지만, 현재 우리 나라의 개신교가 빚어 내고 있는 종교적 양태는 마치 미국 지상주의를 희구하는 배부른자들의 욕심과 야만이라고 그 속내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강대국의 정신적 시민이 된 한국 개신교도들이 가지고 있는 턱없는 ‘선민의식’과 ‘우월의식’은 토속 종료의 아이콘들을 공격하는 무지한 문화적 테러마저 감행하게 만든다. 그들은 단군상의 목을 자르고도 매우 당당하다”(p248에서)


위와 같은 사회 비판적인 성격의 내용이 책 한편의 씨줄을 엮어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상의 잔잔한 삶의 조각들에서 철학적이며 시적인 영상을 날줄로 엮어 내고 있다. 이성적인 씨줄과 감성적인 날줄이 엮이어 이 책 전체의 맥락을 밀도있게 구성해 낸다.


<빛은 사방에 있다>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우리 삶의 주변에서 희망과 아름다움의 조각들을 찾아 내면서 삶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물어가고 있다. 특히 일상의 영역에서 발견한 소중한 사유의 흔적들을 시와 함께 삶의 형이상학적 본질로 승화시키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목욕’은 현실속에 안주하며 지극한 편안함을 찾는 행위이기에 우파적이고, ‘샤워’는 서서 긴장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항상 밖으로 뛰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행위이기에 좌파적이라고 지적한 현존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의 일상의 철학에서 그 단적인 ‘빛’의 형상들을 찾아내고 있음을 한 예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저자는 삶의 작은 부분에서 지극한 실존적 쾌감과 나아가 사회적인 비판의식까지 아우르는 작업을 해 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전반적으로 그 작업들이 다소 시라는 영역 때문에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색채를 드러내지만, 그것도 저자의 문체적 경향으로 본다면 그렇게 큰 무리없이 볼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일상의 잔잔한 부분을 다루는 산문치고는 다소 소재나 내용면에서 추상성이나 관념성을 완전히 제거하기란 힘들 듯 하다. 시가 가지는 상징성을 여지없이 작품 전체에 깔아 놓은 듯한 저자의 의도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빛은 사방에 있다>는 기존의 읽어 왔던 여성 작가들이 서정적이면서 감성적인 산문류와는 차별화되어 있다는 인상을 많이 받는다. 시를 작품을 전개해 나가는 주 기제로 사용하면서도 그 내용들이 다분히 사회적 이념적인 부분들을 직접적으로 건드리기 때문에 때론 생경한 인상마저 주고 있다.


하지만 기존의 읽어왔던 여성작가들의 가벼운 일상의 입담과는 다른 또 다른 차원의 산문류라는 점에서 분명 <빛은 사방에 있다>는 일독의 가치가 있었다. 


기존 수많은 작가들의 가벼운 산문류를 읽어가다 보면 이내 그네들의 삶의 모습을 속속들이, 때론 적나라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빛은 사방에 있다>역시 그런 점에서는 기존의 산문류와 맥을 같이 했다. 하지만 단순한 일상의 잔잔한 서정성 짙은 묘사에서 벗어나, 여성 작가지만 미시적이 아닌 거시적인 입장에서 이 사회를 읽어내고 따져가는 모습에서 이 시대의 또 다른 여성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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