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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 붕괴
해도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평점 :
📖 첫 번째 단편, <검은 절벽>
정신을 차려보니 광막한 우주 한가운데서 우주복을 입은 채 비행선 외벽에 서 있었다. 지구도 태양도 사람도 없는 고요하고 낯선 공간. 처음엔 황당했지만 차츰 기억이 돌아온다. 왕복 20여 년이 걸리는 행성 탐사 중이었다는 것. 그런데 왜 내가 선체 바깥에 나와 있는 걸까?
그 질문에서 시작된 <검은 절벽>은 차가운 우주 속에서 펼쳐지는 정적의 미스터리이자, 한 존재의 균열과 흔들림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주인공 라미는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승무원이지만 그녀에게 우주라는 공간은 묘하게 낯설고 이질적이다. 캄캄한 우주는 두려움이면서도 해방이며 감정을 투영해내는 거울처럼 작용하기도 한다. 인상 깊었던 점은 라미를 포함한 모든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장르’를 살고 있다는 것. 누군가는 스릴러의 주인공, 누군가는 치정극 속 인물, 또 다른 누군가는 크리처물의 캐릭터처럼 느껴진다. 같은 사건과 같은 배경이지만 누구를 중심에 놓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읽히는 점이 특히 흥미로웠다.
이런 설정 덕분에 작품은 짧지만 재독의 여지를 충분히 남긴다. 처음에는 사건 자체에 집중하게 되지만 다시 읽으면 인물들의 심리나 무너지는 내면의 구조에 더 눈이 간다. ‘우주’라는 소재는 SF에서 가장 흔한 무대일 수 있지만 해도연 작가는 그 안에서 인간의 정체성과 감정, 믿음이 서서히 붕괴하는 순간들을 아주 정밀하게 그려낸다.
어쩌면, 우주보다 더 낯선 것은 인간의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스포일 수 있지만 마지막까지 가장 크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었다.
“인공지능과 인간이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 MBTI가 INFJ인 나는 머리로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쩌면 정말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떤 감정은 이성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도달하니까. 아마 이 질문 하나가 이 이야기를 오래도록 기억하게 할 것 같다.
📖 두 번째 단편, <텅 빈 거품>
진공거품, 이름부터 공허하고 쓸쓸하다.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든다는 이 미지의 존재가 지구를 향해 다가온다는 설정부터 이미 강렬하다. 인류는 그 종말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대신 마지막 유토피아를 만든다. 함께 사라질 것을 각오하고 아름다운 최후를 선택한 이들과, 반대로 진공거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계에서 도착한 초광속 우주선을 타고 떠나기로 작정한 사람들. 이 소설은 그 갈림길에 선 인류의 선택을 보여준다.
<텅 빈 거품>은 물리학적인 상상력보다도 그 안에 있는 인간에게 훨씬 더 초점을 맞춘다. 선택 앞에서 망설이는 사람들. 남기로 한 이유, 떠나기로 한 이유. 각자의 입장은 그 나름대로 설득력 있고 타당해서 쉽게 옳고 그름을 나눌 수 없다. 오히려 이 이야기의 가장 깊은 지점은 ‘누구의 선택이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나에게 의미 있는가’를 묻는 데 있다.
소멸을 눈앞에 두고도 인간은 여전히 관계를 맺고, 아름다움을 찾고, 미래를 고민한다. 그건 어떤 면에서는 희망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허무에 대한 저항일지도 모른다. 진공거품이 덮친 후, 모든 것이 정말 사라진다면. 그 선택의 무게는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당신이라면,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여기서의 떠남은 도망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떠날 것 같다. 끝을 피하는 몸짓이 아니고 무엇인가를 위해 새롭게 나아가는 것이니. 상미와 신시아의 선택이 더 나에게 의미있다. 하지만 내가 죽기 전까지는 남은 세상이 유토피아로 유지된다면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지, 후회는 조금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