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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의 숲속 일기 - 메릴랜드 숲에서 만난 열두 달 식물 이야기
신혜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평점 :
식물학자의 연구 방식부터 식물과 함께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식물학자의 숲속 일기>는 단순한 과학 에세이를 넘어 식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태도와 자연을 품은 삶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고 있다. 특히 식물을 둘러싼 더 큰 존재인 자연 속에서 식물학자인 저자가 얻는 깨달음들이 무척 인상깊은 책이다.
책에는 식물의 구조와 생태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은 물론 식물학자가 실제로 하는 연구 활동들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읽다 보면 연구소가 자리한 공간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자연과 식물이 어우러진 그 공간은 단순한 연구의 배경이 아니라, 저자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스승 같은 존재이기도 한 것 같다.
저자는 그런 환경 속에서 자연의 섭리와 흐름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삶의 어떤 순간들을 맞닥뜨릴 때면, 그것을 식물과 자연의 세계에 비추어 바라보고 해답을 찾아가기도 한다. 자연의 시계에 익숙해지고 자신의 상황을 조용히 자연에 대입하며 답을 얻는 모습에서, 식물학자라는 직업이 단지 식물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이 아닌 자연의 언어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다해 응답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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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곳에 가면 새로운 식물이 기다리고 있다. (p.32)
위의 말은 단순히 식물학자로서 직업적인 관찰을 넘어서, 세상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담겨 있는 문장처럼 다가왔다. 식물학자임에도 낯선 땅을 밟을 때조차 ‘탐험’이나 ‘정복’의 마음이 아니라, 그저 기다리고 있는 식물을 만나러 가는 겸손하고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게 너무 인상 깊었다.
그 마인드가 곧 자연을 대하는 태도, 나아가 식물을 대하는 자세,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이는 자세와도 닿아 있는 것 같아서 참 본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나도 뭔가 새로운 일을 앞두고 긴장될 때, 이 문장처럼 “그곳엔 나를 기다리는 무언가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를 불현듯 얻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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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살면서 자신이 지닌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씩 지식을 넓혀나간다. 경험이 많으면 더 넓고 더 쉽게 이해한다. 예측도 쉬워진다. 그러나 과연 인간의 지식으로 자연은 예측할 수 있는 것일까? (p.119)
저자가 자신과 독자에게 동시에 던지는 이 질문을 보고 자연을 가까이서 오래 바라본 사람만이 던질 수 있는 물음 같다고 생각했다.
자연은 인간의 지식으로 ‘부분적으로는’ 예측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완전히 예측할 수는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전히 자연에 대해 끊임없이 관찰하고 측정하고, 과학적으로 원리를 파헤치지만 자연은 언제나 그 너머를 가진 존재라. 계절이 바뀌는 리듬처럼 익숙한 것도 있고, 기후 변화처럼 예측을 벗어나는 현상도 있는 자연은 익숙함 속에 낯섦을 늘 숨기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어쩌면 예측하려는 태도 자체가 인간 중심적인 욕망인지도 모른다. 자연은 우리가 통제하고 예측하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며 배워가는 존재고 우리는 무엇보다 자연 안에 포함된 부속이니까. 식물학자인 저자처럼 자연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갖고 예측하려는 대신 기다리고 응답하는 자세, 그게 진짜 앎에 가까운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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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가 짙은 곳에 서 있으면 딛고 선 발 밑의 땅만 느껴진다. 주변이 보이지 않고 막막하다. 무섭고 답답한 마음에 안개를 벗어나려 뛰어본들 부딪히고 다칠 뿐이다. 차분히 조금만 기다려 안개가 걷히고 나면 하나둘 곁에 있는 풀과 나무가 보인다. 이후엔 저 멀리 산과 강도 볼 수 있고 다시 길을 찾게 될 것이다. (p.231)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이다. 늘 타국에서 연구하며 느껴온 외로움과 쓸쓸함 속에서 어떠한 사고를 계기로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들의 존재를 새삼 깨닫고 쓴 문단. 이 문단은 단순히 자연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저자가 외롭고 막막한 시기를 지나오며 삶을 마주하는 태도를 자연의 이미지에 빗대어 전한 것이기에 더욱 깊게 다가왔다.
안개 같은 시기엔 조급히 벗어나려 애쓰기보다 잠시 멈춰 서서 기다리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자연이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줬다는 것이 뭉클했다. 나의 곁에 사람이 있다는 걸 ‘사람’이 아닌 ‘식물’과 ‘자연’을 통해 더 깊이 깨닫는다는 것이, 단순한 외로움의 해소가 아니라 연결의 본질을 다시 발견하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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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정도 시간을 여유있게 두고 자기 전에 틈틈이 읽었다. <식물학자의 숲속 일기>는 과학과 감성, 연구와 사유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귀한 기록같단 생각이 든다. 그저 식물을 연구하는 일을 넘어 식물을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대하며 삶의 방식까지 닮아가는 한 사람의 진심 어린 일기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자연과 더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 혹은 삶의 리듬을 다시 조율하고 싶은 이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