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
클레어 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반타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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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삶의 마지막 숨이 뱉어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해리 오거스트는 자신이 태어난 장소인 기차 화장실로 되돌아간다. 선형적 시간을 살아내는 필멸인 사람들과 달리 그의 시간은 죽음과 동시에 1918년부터 다시 반복된다. 망각은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이라 하였던가. 그에게 그런 축복은 찾아오지 않았고 해리는 그가 지나쳐온 모든 시간을 기억한다. 


해리 오거스트의 인생은 친부모에게 외면 당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 아내의 외도로 복수심에 불탄 해리의 친부 로리은 하녀와 하룻밤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해리는 쫓기듯 기차의 여자 화장실에서 태어난다. 집안에서 반기지 않는 아이, 집안의 치부와도 같은 생명. 양어머니를 병으로 떠나 보낸 이후엔 고향을 떠나 그저 그런 삶을 산다. 외로웠던 첫 번째 죽음을 맞이하고 눈은 감은 해리 오거스트. 그의 인생은 모든 기억을 안은 채 1918년 다시 시작한다.


두 번째 삶을 살게 된 그는 갑작스레 찾아온 이전 생의 기억으로 미쳐 버린다.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기억이다. 전쟁이 일어나고, 사람이 죽고 죽이고, 사는 것이 버겁고 외로웠다. 지겹도록 길고 긴 생들을 반복하면서 해리는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 점점 알 수 없어진다. 신은 존재하는가, 나의 시련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끝나기는 하는 것인가. 이것은 형벌인가.


해리와 같은 존재가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 그들은 크로노스 클럽이라 불리운다. 이전의 삶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들은 새로 태어난 자신들과 같은 존재들이 미쳐버리지 않도록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기록을 남기고, 말을 전하고, 가난과 과거가 그들을 죽게 만들지 않도록 도와준다. 


크로노스 클럽의 일원들은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선형적 시간의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전쟁을 막거나, 희대의 살인마를 죽이거나, 국가의 정치 체계를 바꿔 놓는다거나 혹은 그 반대인 것들. 그렇다면 그저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가. 내가 만난 사람을 죽이는 개자식을 그냥 두고만 봐야 하는가. 세상을 파괴시킬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것을 그저 바라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과거가 미래에게, 또 미래에서 과거로 이야기는 전해진다. 어린아이에게 노인이, 또 노인에게 어린아이가. 해리는 그렇게 크리스타라는 여자아이를 통해 미래에서 전달된 말을 듣는다. 세상이 멸망하고 있어요, 해리. 그렇다 세상은 멸망하고 있다.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교수 생활을 하던 시절의 제자, 빈센트. 과학을 사랑하는 순진무구한 청년. 그런데 그 이후의 생에서 만난 그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는 세상을 멸망시키려 한다. 그 역시 그와 같은 '존재'인가. 빈센트 역시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나. 해리와 빈센트는 서로 쫓고 쫓기는 관계가 된다. 누가 이길 것인가. 누가 상대를 완벽한 죽음으로 몰아 넣을 수 있을 것인가.


해리의 암울한 일대기와 세상의 멸망을 앞둔 상황에서도 나는 기어코 작가의 유머에 피식거리곤 했다. 1973년도에 “빌어먹을 마이클 잭슨”이라고 말하는 크로노스 일원 같은 것들에 말이다. 

640페이지라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책을 넘기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해리가 살아온 15번의 삶을 나는 순식간에 읽어 냈지만 그 생들은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어떤 사건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대체로 불행의 형태로 찾아온다. 죽음, 병, 전쟁, 고립과 같이 말이다. 해리는 수많은 과정을 거쳐 이들은 끝내 받아들였고, 동시에 자신의 손으로 막아내길 바랬다. 짊어지고 갈 수 없을 듯한 기억의 무게도 견뎌내며 그렇게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이 한번의 생은 보잘 것 없으면서도 빛나 보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에겐 '망각'이라는 죽음이 주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해당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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