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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아타나시우스 지음, 피넬로피 로슨.오현미 옮김 / 죠이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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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신뢰할만한 것이 되는데는 '누가' 그것을 썼느냐?와 그것애 대해 누가 추천하느냐? 하는 것이 크게 좌우한다.
평생에 처음 접해보는 저자이기에 익숙한 것이 더 편한 나에게는 분명 도전이었다. C.S 루이스가 서문을 썼다기에 책을 읽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났고 그런 욕구를 따라서 책을 읽었다. 그렇지만 그리 두껍지 않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오래 끌면서 마무리를 했다. 그렇게 더디게 읽은 데는 분명 내탓도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예수님의 성육신에 관해서 여러 주제를 제시하며 써내려 가고 있다.
예수님, 즉 말씀이신 그분에 관해 창조로부터 부활까지 말하고 이런 성육신에 대해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가진 생각을 논박함으로 글을 매듭짓는다. 교리서를 하나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다. 수월하게 읽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일까?
불타는 논리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아타나시우스를 볼 때 마치 그의 면전에서 이야기를 듣는 듯했다. 이는 아타나시우스라는 저자를 처음 접하는 독자의 어색함일 것이고, 나머지는 교리에 가까운 글의 구성이 글을 단숨에 읽지 못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이신 그분이 창조, 타락, 구속의 과정에서 성육신으로 이루어 내신 바를 차근차근 짚어 나간 부분은 현대의 어떤 신학자도 짚어낼 수 없는 소중한 논리였다. 간다. 아타나시우스를 통해 풍성해지고 깊어진다.

나의 생각과 별개로 책에서 상정하고 있는 유대인고 헬라인의 불신앙고 조롱은 충분히 예견하고 있는 바였나 싶다. 그는 길게 이 주제를 기술하지는 않았지만 그 결과로 불신을 예견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유대인의 불신앙과 이방인의 조롱을 반박한다.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성육신과 십자가를 도무지 이해도 안 될뿐 아니라 온당치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방인도 불신앙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반론에 대해 아타나시우스는 여러 증거들을 꺼내 놓으며 이야기한다. 명쾌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설복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최소한 그들이 이 글을 읽으면서 말씀의 성육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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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하나님나라 - 전혀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 하나님 나라로 읽는 성경
김형국 지음 / 비아토르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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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가 말해 주듯이 이 책은 성경강해집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해서 도시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향해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강해라고 하면 원어의 의미를 최대한 살려내는 것이 우선된 일이다. 그런 원칙에 충실했다. 두 개의 성경번역본을 기록해 둔 것은 그런 차원에서 배려이다. 동시에 원어의 의미를 현대를 사는 이들에게 살려내는 것에 애를 쓴 흔적을 책 전체에서 볼 수 있다. 많은 설교집들, 강해설교라고 하는 책에서까지 강해설교인지 예화집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주객을 전도시키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 책은 그런 불편을 맞닥뜨리지 않아도 된다. 

9번에 걸친 강해를 통해서 도시라는 상황에 맞춰서 교회 공동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구어체 형식이라서 흐름을 따라가기가 수월하다. 

곧바로 본문으로 진입하지 않고, 데살로니가라는 도시에 대해서 충분히 살핀 것은 강해집을 읽는 사람들에게 큰 배려이면서 본이 된다. 웬만한 사람들은 저자를 알 것이다. 한 두권의 설교집이나 책을 읽었을 것이다. 나로서는 지난 번의 주기도문 강해집을 읽은 이후에 처음이다. 누군가의 설교를 따라 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군더더기 없이 본문을 파고드는 저자가 좋은 본이 되었다. 

본문을 대하면서 결국 설교이기 때문에 적용이 느낌으로 가지 않고 논리로 가고 있다는 것은 책을 읽는 내내 보게 되는 장점이었다. 그래서 개념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는 지점까지 다다르게 된다. 한국교회의 일상들이 뼈아프게 느껴지도록 고발하는 내용은 고발을 위한 고발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지적임을 보게 된다. 그것은 저자의 방법이 아니라 성경말씀의 방법이고, 그 방법을 신뢰했기 때문에 저자는 담대하게 성경을 말하고 있다. 

성경본문이 다루는 부분에 대해서 빙둘러 잠깐 언급하는 것으로 회피하지 않고, 본문이 대면하는 주제를 저자도 직면한다. 내식대로 해석하지 않는 성경해석의 자세, 설교자의 자세를 보게 된다. 사실 성, 돈에 대한 이야기는 암묵적으로 회피하는 주제이다. 그러나 저자는 달랐다. 그런것들조차 말씀앞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데살로니가교회를 통해서 현대의 도시교회가 들어야 하는 메시지를 명확하고 정갈하게 들려주고 있다. 한편의 설교가 결코 짧지 않은데, 술술 읽히는 이유는 본문을 대하는 저자의 진지함과 더불어서 듣는 자들을 충분히 배려하는 언어로 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괜찮은 강해서를 한 권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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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의 시편 이해 - 기도의 책 믿음의 글들 241
디이트리히 본회퍼 지음, 최진경 옮김 / 홍성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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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가 이해한 시편에 관한 책이다. 그의 유명한 책들에 비하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책이다. 

본회퍼는 시편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는 철저히 시편을 기도로 이해했다. 그것도 주님의 기도로 이해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시편에서 주기도문을 거의 담아내고 있다고 보았다. 그의 주장은 허황되거나 과장된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이해한 십여편의 글은 그가 시편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글들이 짧다. 하지만 쉽지 않다. 한번 스윽 읽고 지나갈 책은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기도한다고 말한다. 일견 맞는 말인듯 하지만 본회퍼는 이를 부정한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기도는 인간 본래의 외침이 아니라 반드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과 대화이기 때문에 누구나가 기도하거나 기도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기도하기를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어디서 어떻게 배울까? 그가 제시하는 길은 시편이다. 시편을 통해 배우라고 한다. 그가 제시하는 시편은 예수님의 기도 언어가 담겼다고 말한다. 십여 가지의 주제를 통해서 관련성을 살피고 있다. 술술 읽힌다. 하지만 좀더 들여다 보아야 읽히는 것도 있다. 그에 관한 이야기도 곁들여 놓은 것은 그를 더 잘 이해하는 자료가 된다.

죽었으나 살아있는 그를 보면 거의 비슷하게 살고 죽었던 예수를 닮았다고 생각된다. 그는 이런 미래를 알았을까? 이렇게 된 까닭은 깊이 예수의 기도를 통해서 시편을 이해하고 묵상한 때문이 아닐까? 

본회퍼의 시편 이해는 지나칠 만큼 구속적인 관점이 짙다. 처음부터 그것을 의도했던 게 분명하다. 그래서 본문을 있는 그대로 읽어왔던 자들에게는 어색하고 불편한지도 모른다. 
읽고자 하면 금방이라도 읽겠지만 정작 읽고자 해도 읽히지 않는 까닭은 본회퍼의 문장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기도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자문하게 만든다. 

짧아서 손에 잡았지만 쉽게 놓지 못하는 책이 된다. 그 속에 시가 들어 있고 기도가 되기 때문이다.
시편을 즐겨 읽었던 신앙인이었다면 본회퍼의 눈으로 읽었던 시편도 한 번 경험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전혀 새로운 차원이라기보다는 그 나름의 시편 묵상이 가져다 주는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의 시편읽기라고 제목을 붙이면 어떨까? 본회퍼는 시편을 그렇게 즐겨 기도하면서 히틀러의 총이 무서웠지만 피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본회퍼는 그렇게 시편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죽어도 살아있는 자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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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시인이 온다
월터 브루그만 지음, 김순현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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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로서 책을 뽑아드는 이유는 '더 잘(?)' 설교를 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더 잘 설교를 한다는 것은 모두가 이해하고 있듯이 청중들이 듣고 싶어하는 바를 전달하는게 아니라 전하려고 하는 이의 뜻을 잘 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는 해석을 필요로 하고 그 해석을 제대로 하고서 설교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만 해석된 바를 잘 전하는 것도 다른 어떤 것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수많은 방법론에 손이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방법론을 찾다가 이 책을 뽑아 들었다면 큰 낭패를 볼 것이다. 왜냐하면 책은 독자로 하여금 방법이 아니라 존재 즉 '시인'이 되라고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그런 학자이다. 특히 그의 학문적 깊이 만큼이나 그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니 책이란게 단순히 누가 말하는 것처럼 설교자의 '호모 시부리우스(?)'가 되어 버리는 경박하고 시끄러운 나팔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해주려면 저자에 대해서 먼저 신뢰할수 있어야 한다. 메신저는 곧 메시지라고 과격하게 말한는 사람도 있지 않는가? 

30년전 대학교에서 진행한 설교에 주안점을 둔 강좌를 엮어서 책으로 만들었다. 3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오늘의 우리에게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그렇게 예언자의 음성을 발하고 말았던 것인가? 
현실은 설교에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발언하는 능력, 돌보는 능력, 주목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런 현실에서 더 참혹한 것은 성경본문연구와 해석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보았다. 이에 제언을 하기를 대체로 무시해왔던 담화형식을 담은 본문속에서 찾아내려고 했다. 저자가 제안하는 새로운 형식의 담화는 극적이고, 예술적이며, 사람들에게 또 다른 대화에 참여하도록 구ㅝㄴ위하는 담화, 과학기술의 이성을 탈피한 담화, 추상성을 띤 존재론에 얽매이지 않는 담화, 구체성을 겁내지 않는 담화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할때 다른 방식의 설교는 다른 형태의 삶을 가능하게 하여야 한다고 말하다. 
더이상 축소된 설교가 아니라 전복적이면서 낡은 세계를 깨뜨리는 시적언어를 구사할때 드러나는 것이라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 저자는 모든 설교자들로 하여금 청중속에 자리잡은 기존의 현실을 부수고 새로운 가능성을 환기시키는 시인의 목소리를 내라고 한다. 저자는 설교를 일컬어서 대안세게에 대한 시적 해석으로 간주하고 진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환원주의로부터 진리를 구출하여 펼쳐보이며 무시무시한 합리성을 깨부수는 목적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가능한가? 
시적 담화를 실행할때 가능하다고 보고 이를 계속 실행하는 것이 교회와 설교의 주요 책임이라고까지 말한다. 저자가 다루는 주제는 치유, 친교, 순종, 자유이다. 이런 주제들은 산문형태로 선포할때 신앙공동체는 복음의 오용으로 말미암는 삶의 왜곡을 가져올 것이라고 판단한다. 
설교자는 복음의 희망이 치유, 친교, 순종, 자유라는데 동의하면서도 공통된 신앙속에 담아내지 못한 현실을 직시하고서 복음적 가능성을 지닌 다른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시적이 표현이며 그런 표현을 하는 시인이 마침내 온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시인이 온다는 것은 시인을 기대한다. 시인이 와야한다는 간절함의 외침일 것이다. 진정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복음이 너무도 밋밋한 아무런 변화도 이루지 못하는 화석이 되어버리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절박함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볼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라면, 특히 설교자로 서기 원하는 사람은 글을 읽으면서 흥분하게 될 것이다. 책이 주는 강력한 도전은 바로 이런 담화형식을 나도 해보리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쉽사리 그런 설교를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초입에 재기했던 것처럼 이미 우리는 현실에 너무도 익숙한 존재가 되어버린게 아닌가? 싶을 것이다. 
책을 읽고 나서 다시 읽어야 하겠다고 생각이 드는 경우는 강하게 끄는 힘때문이거나 제대로 파악이 안된 것으로 인해서 갖게 되는 부담 때문일텐데,,,, 이 책은 두가지가 뒤섞이면서 몇번이고 읽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읽어도 그리고 전해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여기는 모든 설교자들이 반드시 만나봐야 하는 설교자의 관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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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과 해석 - 그리스도인의 삶, 영성
정성국 지음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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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안경이 있다. 눈에 꼭 맞는 안경이다. 눈이란게 때때로 그 기능을 잃게 되는데  나이듦도 그 이유가 된다.

눈이 나빠진다는 말은 사물들이 제대로 안보인다는 말이다. 그렇게 나빠진 눈을 계속 내버려두면 고생하는 것은 그 눈을 가진 쪽이다. 그래서 안경도 끼고 수술도하고 그런다. 그런데 가끔은 수술까지는 아니더라도 눈이 나빠 맞춘 안경이 영 아니올시다인 경우가 있다. 더 어지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작은 것 하나에도 이렇게 큰 영향을 받는 것처럼 우리는 약하고 약하다.

삶에서 이런 경우는 허다하다. 특히 문서를 읽을 때 해석의 안경이 그럴 것 같다. 문서를 읽을 때 그것의 의미를 옳게 바르게 정확하게 알고 싶은 마음은 독자 모두의 바램일 것이다. 그것이 성경일 경우는 더욱 강렬해 지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 같다. 아직도 성경읽기가 마치 신세계를 경험하는 것처럼 "와우"라는 감탄사를 쓰면ㅅ니 유혹하거나 광고하는 것을 보면 그러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이럴 때 좋은 지침을 주어 본래의 의미를 잘 알고 깨달아 저작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게 만드는 안경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묵상과 해석/정병국/성서유니온]]은 이런 바램을 충족시키기에 넘치는 안내서요, 안경으로 여겨진다. 

1.시의적절한 책이다. 책을 만들려고 했다기보다 묵상하는 독자들을 위해 월간지에 연재했던 글이라 더 시의적절했다고 할 것이다. 책을 위한 책이거나 저자를 위핫 책이 아니라 독자를 위한 책이라는 말이다.

2.모로우의 표현에 의하면 이 책은 실천적인 책이라고 할 것이다. 책에서 말하는 4가지 안경은 성경 어디를 붙잡고 들여다봐도 사용가능한 안경이기 때문에 실천을 위한 책이라고 할 것이다.

3.선교적해석과 공동체적 해석이 제시된 것은 이 책의 특별함이면서 성경해석에 꼭 필요한 안경이라고 할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영적이고 그래서 부분적인 해석을 함으로 만들어낸 한국교회의 현실이 성경해석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진단했다.책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대안을 제시했다. 너무 잘맞춘 안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4. 성경읽기와 묵상에 약간의 관심을 가진 이라면, 또 나름의 갈증으로 목말라하고 있었다면 금방 읽힐 책이다. 그리 크지 않아 한손에 잡혀서 그렇기도하지만 읽기 쉽게 써놓은 게 가속도를 내서 읽도록 만드는 것이다. 

일독을 권한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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