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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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일 : 202396

* 페이지 수 : 768

* 분야 : 일본소설

* 체감 난이도 : 보통


* 특징

1. 소설이 보여주는 세계의 이미지가 매력적임

2. 모호하게 느껴지는 것이 많음

3. 1부의 내용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비슷함

(중간부터는 전혀 다름)


* 추천대상

1. 하루키가 그려내는 환상적인 세계가 궁금한 사람

2.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좋아했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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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높은 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어.” 너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침묵의 밑바닥을 뒤져 말을 찾아 온다. 맨몸으로 심해에 내려가 진주를 캐는 사람처럼. “그다지 큰 도시는 아니야. 하지만 한눈에 다 들어올 만큼 작지도 않아.”

네가 그 도시를 입에 올린 건 이번이 두번째다. 그렇게 도시에는 사방을 둘러싼 높은 벽이 생겼다. (p. 12)


한발작도 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힘들고 지친 사람들의 세계가 이러할까.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사랑하는 연인을 포함하여 애타게 원했던 무언가를 상실했을 때의 인간이 느끼는 슬픔과 절망을 보여주고, 그것에 괴로워하다 자신만의 세계로 도피해 움츠리고 있던 한 인간이 서서히 마음을 치유해가는 과정 같다고 느꼈다.


마지막 장을 덮고도 한참이나 마음이 어지러웠다. 뭐가 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작가가 그려낸 세계를 더는 구경할 수 없는 것도 아쉽고, 그곳의 정체를 명확히 밝혀내지 못한 것도 아쉽다. 그렇지만 읽는 내내 즐거웠던 건 분명하다. 모호해서 아리송하긴 했지만 한편으론 모호하기 때문에 곁가지를 뻗어 나가며 다양한 생각을 이어갈 수 있는 점도 재미있었다.


나를 아프고 슬프게 했던 기억들, 심하게는 나를 무너뜨려 넘어지게 만든 기억들로부터 빠져나오는 데에 가장 필요한 것은 용기인 것 같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깊은 물 웅덩이 속으로 몸을 던질 수 있는, 빈틈없이 견고한 벽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할 수 있을 만큼의 용기 말이다. 때로는 나쁜 기억들이 나의 앞을 가로 막고 나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릴지 몰라도.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그 곳으로부터 스스로 걸어 나와야 한다는 것을 하루키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사실 이 모든 것은 내 생각만큼 캄캄하지 않을지도, 견고하지 않을지도, 숨막히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 웅덩이를 만들고 벽은 세운 것도 바로 나 자신이었으니까.


누가 그림자이고 누가 본체였든, 어디가 현실이고 어디가 가상이든, 그곳이 벽 안이었든 바깥이었든 그런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결국 그림자와 나는 뗄 수 없는 하나이며,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아무리 도망치고 싶은 현실일지라도 다시 한번 너 자신을 믿고 현실을 살아 보라고 이야기한다고 느껴졌다. 세상이 나를 이해해주지 않고, 주저앉은 외톨이처럼 느껴지더라도 절대로 삶에서 도망치지 말라고, 포기하지 말라고 외치는 것처럼 들렸다.


지난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느꼈던 결말의 아쉬움을 이번 작품으로 달랠 수 있어 좋았다. 하루키가 그려낸 미지의 세계를 주인공과 함께 거닐며 이곳의 정체에 대해 생각해보며 참으로 즐거운 며칠을 보냈다. 출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단박에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호기심이 생긴다면 주저없이 읽어 보길 추천하고 싶다. 특히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전작 중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좋아했다면 꼭! 이 작품도 읽어 보았으면 한다. 비슷하지만 다른, 세계의 끝의 또다른 변주를 놓치지 않고 만나 보길 바란다.






물론 무섭습니다. 생각만 해도 오싹해요. 하지만 우리는 이미 마음먹었잖아요. 애당초 이 도시를 만들어낸 건 당신 아닙니까. 당신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어요. 실제로 조금 전, 눈앞에 우뚝 선 단단한 벽을 무사히 통과했고요. 그렇죠? 중요한 건 공포를 이겨내는 겁니다.” (p. 212)


티없이 순수한 사랑을 한번 맛본 사람은, 말하자면 마음의 일부가 뜨거운 빛에 노출된 셈입니다. 타버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더욱이 그 사랑이 어떤 이유로 도중에 끊겨버린 경우라면요. 그런 사랑은 본인에게 둘도 없는 행복인 동시에, 어찌 보면 성가신 저주이기도 합니다.” (p. 449)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p. 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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