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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와 박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8월
평점 :
55세 변호사 시라이시
겐스케는 흉기로 복부를 찔린 채 불법 주차된 차량의 뒷좌석에서 발견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범인이
자백했고, 사건은 순조롭게 풀리는 듯 보였다.
【 범인이 자백을 했고 이제 사건의 진상은 다 밝혀졌다고 모두들 말한다. 그리고
그 진상을 바탕으로 재판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진상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이 세상에 어머니와 자신뿐이라고 미레이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또 있었다. 가해자의 가족도 역시 이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 (p.
274)
【 “둘 다 사건의 진상을 납득하지 못했다는 점이야. 분명 또 다른 진실이 있다, 그것을 꼭 밝혀내겠다, 라고 마음먹고 있어. 그런데 경찰은 이미 수사는 끝났다는 식이고
검찰이니 변호인은 오로지 재판 준비에만 골몰했지. 가해자 측과 피해자 측으로 서로 적의 입장이지만 오히려
그 둘의 목적이 같았던 거야. 그렇다면 한 팀이 되기로 한 것도 실은 이상할 게 없어.”
( ··· 중략 ··· ) “빛과 그림자, 낮과 밤, 마치 백조와 박쥐가 함께 하늘을 나는 듯한 얘기잖아요.” 】 (p. 421)
소설은 한 살인 사건의 범인을 쫓는 내용으로 전개되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예상과는 다르게 극 초반부에 가해자의 자백으로 범인이 밝혀진다. 그
뒤로 이 사건의 수사와 재판 과정, 가해자 가족과 피해자 가족의 생각,
언론과 시민들의 반응을 보여주며 내용이 전개된다. 처음엔 추리물이라 생각하고 펼쳤던 소설이라
너무 쉽게 범인이 밝혀지는 것에 맥이 빠졌는데, 읽을수록 뉴스를 장식하는 범죄 사건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는 기분이어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거기다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사건의 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이 서서히
밝혀지게 되어 그때부터 소설은 재미를 되찾기 시작했고, 마지막엔 커다란 반전까지 안겨줘 기분 좋게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하나의 범죄 사건을 단순히 선과 악, 범죄자와 희생자로 나누어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범죄 뒤에 남겨진
가족들의 마음 또한 그랬다. 돌이켜보니 나는 그동안 뉴스 기사로 전해지는 몇 자의 글을 가지고 너무
쉽게 그들을 재단하고 판단했던 것 같았다. 어쩌면 사건의 진상보다는 와글와글 떠들어대는 것 자체에 흥미를
가졌던 것 같기도 하다.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사건의 가해자나 피해자에게 가해자다움과 피해자다움을 은연중에
기대하고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이들에게는 묘한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되었다. 이
작품 덕분에 내가 그동안 범죄 사건에 가져온 시선에 대해 생각해 보며 그것의 옳고 그름에 대해 돌아볼 수 있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선과 악의 그림자가
오르내린다. 그들은 선한 백조가 되기도 했다가 악한 박쥐가 되기도 한다. 사건의 테두리 밖에 있는 이들은 오르내림의 변화에 따라 박쥐가 되는 이를 향해 비난을 퍼붓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리기 바빴다. 비난의 화살을 맞고 있는 이들의 아픔을 공감해 주고 기억해 주는 이는 그 화살을
맞아본 사람들뿐이었다.
동정심에서 시작된 선의는 또 다른 불행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이 작품은 얽힌 인연의 고리 때문에 살인 사건의 가해자를 나쁘게만 볼 수도 없고 피해자를 불쌍히 여길 수만도
없게 된다. 소설은 이것을 통해 독자들이 정의에 대해, 죄와
벌이 가진 무게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답을 찾도록 만든다. 얼마 전에 읽었던 <인어가 잠든 집>에서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작가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들려주기보다는 독자가 소설 속 인물들의 상황과 마음을 느껴보며 스스로 생각하도록
이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초반엔 조금 지루하게 느껴져 그만 덮을까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역시나 끝까지 읽길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마지막 장을 덮었다. 히가시노
게이고 판 죄와 벌이라 불리는 작품 <백조와 박쥐>는
묵직한 메시지와 흥미로운 스토리를 통해 독자들을 복잡한 고민 속에 집어넣는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좋아한다면 이 작품도 놓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