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의 정원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고요한숨 / 2020년 8월
평점 :
품절



출장에서 돌아오던 길. 피곤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전차를 탔던 주인공 스즈가미 세이치는 목적지가 아닌 역에서 내려버렸고, 중요한 서류가 들어있던 가방까지 잃어버리고 만다. 자포자기 한 심정으로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단 생각을 했던 세이치. 그런데 그는 갑자기 벚꽃 잎이 날리는 봄날의 벤치에서 깨어난다. 어떤 이유인지 모른 채 낯선 장소에 와 있던 그는 자신이 살던 도쿄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곳 사람들 어느 누구도 도쿄를 알지 못했고 돌아갈 수 있는 방법도 찾지 못했다. 거기다 세이치 자신도 이상하게 점점 과거의 기억이 희미해져 갔다.


멋진 풍경과 맛있는 음식, 친절한 이웃들과 걱정 없는 풍족한 삶. 세이치는 낯선 그곳에서의 삶에 적응하고 있었고, 그곳이 점점 좋아져갔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내각총리대신이란 사람에게서 이상한 편지를 받게 된다.


저 불길한 날 이후 예전의 평화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일본국은 지금도 존재하며 국가는 총력을 다해 당신을 구출할 적정입니다. 이는 인류에게 주어진 시련입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이제 하나로 뭉쳐서 이 재난에 맞서 평화를 되찾읍시다.

귀하는 혼자가 아닙니다. 희망을 잃지 말기를. (p. 36)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날을 보내고 있는 세이치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전하고 있는 걸까. 그는 어떤 사건에 휘말린 것이고, 세계는 어떤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일까.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재난. 속수무책으로 인류는 미지의 존재에게 당하고 만다. 그야말로 지옥 속에서 살아갔던 인류는 평화를 되찾기 위해 미지의 존재를 쫓아낼 유일한 방법을 찾아낸다. 그러나 그 방법은 모든 인류에게는 희망이었지만, 한 인간에게는 크나큰 절망이었다. 세계를 회복하는 과정이 한 인간에게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과정과 맞물리는 설정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아무리 그것이 실제가 아닌 환상의 삶이라고 해도,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바라던 것이 모두 실현되는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 외롭고 팍팍한 현실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다수의 행복을 위해 개인의 희망은 짓밟혀도 되는가. 인간을 지구의 주인이라고 볼 수 있는가. 우리의 도덕적 기준이 지켜질 수 있는 테두리는 어디까지 인가. 소설은 흥미롭게 흘러가는 스토리 속에 단단한 알맹이들이 심어져 있어, 그것들을 하나씩 건져 올려 고민해 보는 재미 또한 얻을 수 있었다.


소설에서 인간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포니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몇 년째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겹쳐 보이기도 했다. (일본에선 코로나 시대 이전에 출간된 작품이다.) 또한 몰랑하고 하얀, 언뜻 보기엔 귀여운 물성을 가졌지만 사람을 뒤덮어 죽게 만드는 이미지는 조예은의 소설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을 떠올리게 했고,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세계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다는 설정에서는 나기라 유의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가 떠오르기도 했다. 물론 이는 설정만 일부 비슷하게 느꼈다는 말일뿐 내용은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이 두 작품보다 <멸망의 정원>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전개되어 매우 재미있게 읽었고, 몰입도가 좋아 몇 시간 만에 다 읽어냈던 작품이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도 좋을 만한 스토리였다. <멸망의 정원>은 한 해 출간된 소설 중 가장 재미있는 작품을 뽑는다는야마다 후타로상최종 후보에 올랐던(2018) 작품이라고 한다. (아니, 최종 후보도 이렇게나 재미있는데 수상작은 얼마나 더 재미있다는 말인지?!) ‘재미만을 놓고 보자면 올해 읽었던 소설 중에서는 최고였다. 기발한 상상력을 가진 이야기꾼 쓰네카와 고타로는 이번에도 역시 실망시키지 않았다.


sf, 판타지, 환상 문학에 거부감이 없는 이라면 이 작품도 꼭 읽어 보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 작품인 <야시>, <가을의 감옥>, <천둥의 계절>을 재미있게 읽었던 이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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