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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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릿한 피 냄새. 머릿속을 떠다니는 어지러운 장면들. 그것들 사이에서 깨어난 주인공 유진은 이러한 자극이 약을 끊었기 때문에 찾아온 환각이라고 생각했다. 곧이어 찾아올 발작에 대비하고자 다시 눈을 감았을 때 마침 전화벨이 울렸고, 통화를 마친 뒤 그는 몸을 일으켜 방의 전등을 켰다. 그런데 불이 켜지자 그는 말도 안 되는 끔찍한 광경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눈을 떴다. 아래층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고, 주방과 계단을 가르는 칸막이벽 밑에는 피 웅덩이가 고여 있고, 웅덩이 안에 맨발 한 쌍이 놓여 있었다. 발꿈치는 은색 대리석 바닥에, 발부리는 천장 쪽으로 세우고 나란하게. 발목 위쪽은 칸막이벽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흡사 발만 뚝 잘라다 조형물처럼 배치해놓은 것 같았다.


( ··· 중략 ··· ) 놀란 고양이처럼 치뜬 눈, 길고 검은 속눈썹에 눈물처럼 맺힌 핏방울, 홀쭉한 뺨과 날카로운 턱선, 동그랗게 벌어진 입술. 여자는 손바닥 발찌의 주인이었다. 16년 전, 그 섬에서 남편과 맏아들을 잃은 여자였다. 16년 동안 나한테만 매달려 살아온 여자였다. 자기 유전자 절반을 내게 물려준 여자였다. 어머니였다. (p. 31~33)



누가 이런 끔찍한 일을 벌인 것일까. 아무리 어제의 일을 떠올려보아도 유진의 기억에는 공백이 있었고, 조각난 단서들은 전부 유진이 범인임을 가리키는 듯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유진이 자신의 어머니를 잔혹하게 살해한 것일까? 대체 그는 왜 그런 일을 벌인 걸까?


소설은 시작부터 끔찍한 장면들이 나열되며 긴장감을 높였다. 이 작품은 글로써 읽고 있음에도 마치 영화를 보듯 읽혔는데, 주인공의 생각과 시선을 따라가며 보여지는 장면들은 몰입력이 매우 커 읽는 이를 소설 속 공간 깊숙이 끌고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초반부에 묘사되는 장면들이 잔인해 다소 거북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사건의 진상이 무엇인지, 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궁금해 책을 손에서 놓기가 어려웠다.


타인의 감정을 읽기 어려워하고 공감력 또한 없었던 유진은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였다. 뉴스를 통해 보아온 끔찍한 사건들. 특히 사이코패스가 저지른 사건들을 사건 밖의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기만 하다가, 이 소설을 통해 당사자의 입장과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어 새로웠다. 주인공이 겪는 기억의 공백 때문에 사건의 단서를 모으며 모서리들을 맞춰가는 식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도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자극하게 만들어 소설의 재미를 높였다.


더위를 싹 가시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여름에 읽기 좋은 무서운 이야기를 찾는 이에게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영화를 보듯 이미지가 매우 잘 그려지는 소설, 몰입감이 높은 소설을 찾는 이에게도 권해보고 싶다. 여름에는 역시 정유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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