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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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 리카는 한동안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연쇄 의문사 사건을 취재하고 있었다. 사건의 피의자는 가지이 마나코라는 여성으로, 결혼 사이트에서 남성들을 만나 금품을 갈취하고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블로그에 올렸던 맛집과 사치품에 대한 사진들, 젊지도 예쁘지도 않았던 용의자의 외모 때문에 그녀는 사건이 일어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한테 여자는 누구에게나 너그러워야 한다고 배우며 자랐어요. 그러나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어요. 페미니스트와 마가린.”

리카는 어색하게 웃으며 죄송합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버터간장밥을 만드세요.”

순간, 무슨 소린지 몰라서 나도 모르게, ? 하는 소리가 조그맣게 나왔다.

갓 지은 밥에 버터와 간장을 넣고 비며 먹는 거예요. 요리를 하지 않는 당신도 그 정도는 하겠죠. 버터가 얼마나 훌륭한지 가장 잘 알 수 있는 음식이에요.” (p. 38~39)




가지이 마나코가 음식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에서 리카는 침을 꼴깍하며 듣게 되는데, 그 장면을 읽고 있던 나 역시 식욕이 돋아나며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음식의 맛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뛰어난 소설이라 읽고 있으니 자꾸 배가 고파진다. 좋아하지 않는 음식 중 하나였던 버터 간장밥까지 먹고 싶어졌다.




리카의 목 안에서 신기한 바람이 새어나왔다. 차가운 버터가 먼저 입천장에 서늘하게 부딪혔다. 갓 지은 밥과 버터의 대비가 질감, 온도와 함께 선명해졌다. 차가운 버터가 이에 닿았다. 부드럽게, 잇몸에까지 스며들 것 같은 식감이다. 이윽고 그녀의 말대로 녹은 버터가 밥알 사이로 흘러넘쳤다. 정말로 황금빛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맛이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구수하고 향기로운 큰 파도가 밥에 엉키며, 리카의 몸을 저 너머로 흘러가게 했다. (p. 43)


리카는 연노란색 버터가 자글자글 퍼져서 진한 황금빛이 되어, 반짝거리는 명란젓과 섞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유지방의 고소한 향이 바다 내음과 함께 모락모락 올라와서 한껏 냄새를 맡았다. 손으로 찢은 차조기 잎을 수북이 담아서 상자 식탁으로 날랐다. 명란젓의 어벙해 보이는 분홍빛이 버터의 걸쭉함과 섞이니 태평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마치 윤기가 흐르는 피부색 같은 파스타를 포크로 둘둘 말아 입으로 가져갔다. (p. 48)




버터를 유난히 좋아하는 여자 가지이 마나코. 그녀는 그녀의 범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음식에 대한 이야기로 주인공 리카와 만남을 이어간다. 편의점 도시락에 의존해 한 끼를 때우는 식사만 하던 리카는 가지이 마나코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음식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고 스스로 식사를 챙겨 먹기 시작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언의 폭력이라고 생각해요. 가까이에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것 역시 누군가에 대한 폭력이에요. 시노이 씨가 아무렇게나 살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만약 자신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안타까워요. ( ··· 중략 ··· ) 누군가가 소중히 여기지 않아도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길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p. 216 ~ 217)



사실 남이 어떻게 보든 신경쓸 필요 없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엇을 좋아할지도 남이 정해준 기준을 따르고 있었던 거야.” (p. 543)




소설의 도입부에서 이야기하는 그림책 <꼬마 삼보 이야기>는 소설 속 사건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동화에서는 호랑이들의 욕망이 엉켜 그들의 몸을 버터로 녹아내리게 만든다. 호랑이는 자신의 적당량을 지키지 못해 스스로를 망가뜨리게 된다. 처음에는 살인범 가지이가 삼보이고, 피해자들이 호랑이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러나 소설이 진행될수록 가지이는 때로는 삼보 같기도, 때로는 호랑이 같기도 했다.




유즈키 아사코는 2009년 일본을 경악시킨 한 사건에 주목한다. ‘수도권 연속 의문사 사건으로 일명 꽃뱀 살인사건이라고 불린 이 사건의 범인은 기지마 가나에라는 30대 여성으로 결혼을 미끼로 만난 남자들에게 10억 원이 넘는 돈을 갈취하고 교묘히 살해한 것이다. 범인의 사진이 매체에 실렸을 때, 일본 사람들은 크게 놀랐는데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꽃뱀의 이미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지키 아사코는 살인범 기지마 가나에가 유명 요리 교실을 다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요리 잘 하는 가정적인 여자에 대한 환상과 가족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가 자리잡고 있다고 본 작가는 소설 『버터』를 집필했고, 이 책으로 157회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다. 】 (책 표지에서 발췌)




이 책은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썼다고 한다. 소설은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모습에 대해서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뭔가 모를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사회의 기준이 아닌 나에게 맞는 기준을 세우라는 메시지를 건넨다. 세상이 정해 놓은 틀에 갇힐 필요는 없다. 그 속에서 걸어 나와 나의 길을 가는 것은 결국 스스로 해내야 하는 일이다. 입맛에 맞지도 않고 따라 하기도 어려운 정해진 레시피를 고지식하게 따르며 힘들어할 필요는 없다. 주인공 리카처럼 자신을 위한, 자신에게 맞는 레시피를 만들면 된다.



요리와 미스터리, 작가의 메시지까지 맛있게 잘 버무려 놓은 소설을 찾는 이에게, 최근 식욕이 부쩍 떨어진 이에게 이 책 <버터>를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오늘은 나만을 위한 요리가 먹고 싶어졌다.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만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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