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의 심장 - 교유서가 소설
이상욱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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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보고는
몽환적이고 공기중에 떠다니는 솜털 같은 이야기가 펼쳐지지
않을까 예상하며 책을 폈어요.

보통은 작가의 말을 먼저 읽는지라 책의 마지막 즈음을 펼쳤는데, 아, 읽기 힘들 수도 있겠구나 했습니다.

삶의 무게가 버거웠던 사람들의 숨결은
그 무게만큼, 어쩌면 더 무겁게 다른 이에게 다가가기 마련이거든요. 그 무게가 느껴져서 읽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
글 전반적으로 빛과 어둠의 대비가 강렬합니다.
모든 사물의 경계가 뚜려한 빛, 경계가 뭉그러지고 모든 것이 하나로 삼켜지는 듯한 어둠.
어찌 보면 인간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숙명론적인 관점과, 운명은 개척해 나가는 것이라는 관점의 대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그 경계를 허물어 보려고도 하고, 순응해가기도 하지만 인생은 한 편의 연극처럼 철저히 연출자의 의도대로 짜여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대에서 주연이기도 하고 조연이기도 하며 때로는 엑스트라이거나 소품인 것이죠.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운명이 아니라 나 자신을 믿는 것, 그것이 연극이라는 의심을 버릴 수 없음에도 최선을 다 한 연기를 펼쳐 보이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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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의 죽음>
"아저씨는 학생들이 왜 왕따를 만드는지 아세요?"
"생각해 본 적이 없구나."
"두려움 때문이에요. 언제 순위가 떨어질지 모르니까, 절대적인 약자를 만들어 자신을 위로하는 거죠."
"그 역할을 자청한다는 거니?"
"시로는 아무도 위로할 수 없으니까요."


🔖<라하이나 눈>
그림자 속엔 어두운 마음이 숨어 있거든. 원하던 걸 얻지 못할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몸에 병이 찾아오면, 그림자에 숨어 있던 어두운 마음이 슬그머니 나타나 발목을 움켜쥔단다....... 열심히 달리면 된단다. 달리는 동안엔 발에서 그림자가 떨어지거든. 어두운 마음이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발목을 잡지 못한단다.

오래전,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 없는 그 어느 시점에, 나는 이미 패배했음을. 이 지루한 술래잡기의 결과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음을. 그럼에도 다시 달렸다. 그림자가 쫓고 있으니까, 나는 쫓기고 있으니까.


🔖<기린의 심장>
가끔 마음이란 게 잔뜩 흠집난 유리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흠집이 많아질수록 유리는 점점 불투명해지고 마침내 저편이 보이지 않게 되는 거야. 어쩌면 죽음이 그런 건지도 모르겠어.

두려워 말게. 모든 사람이 선택을 강요받는다네. 익숙해지기만 하면 두려움 따윈 아무것도 아니지. 장담하건대 자넨 오늘의 선택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걸세.


🔖<마왕의 변>
운명보다는 너 자신을 믿어야 해.


🔖<허물>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을 만나기 마련이니까요..... 언젠가 웃으며 추억하게 될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절망이라 할 수 없습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잠시 후 슬픔이 그것을 덮고, 슬픔이 목까지 차오르면 그리움이 그것을 덮습니다. 그러다 다시 분노가 찾아오면 마음은 갈피를 잃고 어둠 속을 헤맵니다.


🔖<하얀 바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말 당신입니까.
믿을 수 없습니다. 진짜 이름이 무엇입니까?
어둠이 삼키기 전에, 마음이 슬퍼지기 전에.
이름이 무엇입니까?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경계>
재인은 책꽂이에서 <페르마의 정리>를 꺼내 무작정 펼쳤다. 힐베르트는 말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다음과 같은 외침을 듣는다. 문제가 있다면 해를 찾아라. 앞으로 수학에는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따위의 말은 없을 것이다.


🔖<연극의 시작>
자네의 인식이 미치지 않는다고 해서 저 어둠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일세. 다만 보이지 않을 뿐이지. 자네가 한 행동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모른다고 발뺌해도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해도, 자네의 행동은 이미 어떤 결과를 만들었다네.



🔖<25분>
책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풍경은 언제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내용도 장르도 두께도 다른 책들이 제목 첫 글자 자음에 따라 정리되어 있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지식이 질서라면 질서는 자음 위에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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