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이 소란하지 않은 계절 현대시학 시인선 107
이경선 지음 / 현대시학사 / 2022년 11월
평점 :
품절


영어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시라는 장르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교육과정뿐만 아니라 대학 수업에서도 시는 시험보고 평가받기 매우 곤란한 과목이었기 때문이다.

창의성을 발휘하여 해석하되,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고, 그 답을 쓰지 않으면 안 좋은 학점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내 성적증명서에는 단 하나의 시수업만 볼 수 있다.

시는 나에게 불편한 장르였고, 서점에 가서도 시집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시집을 보았다.

우연히 이 시집의 대표작 중 하나를 읽고 막연하게 가슴이 먹먹해졌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사로 잡았던 이 시집의 대표작을 소개하고자 한다.


소녀



당신은 소녀 같아라

머리 희끗하여도 눈주름 깊어지어도

날 부른 소리 때로 헛헛하여도

당신은 오늘도 소녀 같아라

​화사한 봄볕과 봉긋한 꽃무리

지천의 설렘 감추지 못했을

수줍은 소녀가

때의 당신보다도 자란 청년을 낳았구나

다 자란 청년 잉태하야

시절의 모습 온 데 없다 하였으나

무구한 심정 당신께 있으니

당신은 아직 소녀인 것이라

소녀에게 줄 꽃 한 송이 예 있다

탐스런 것 제쳐두고

멀리까정 들고 온 것이다

여기 새하얀 메밀꽃 있다

나의 소녀, 당신은 오래고 행복만 하여라

「소란이 소란하지 않은 계절」 - 이경선


오랜 기간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머니께 의존하여 살아왔다. 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하기 보다는 부모님의 의견에 따르는 모범적인 아들로서 살아왔었다. 그 기간이 길었던만큼, 독립하는 과정에서 정신적인 탯줄을 끊어내기 위해 더 노력해야 했고, 내 부모님께 더욱 모질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철쭉과 누이


철쭉은 누이를 닮았다


오망가지 색옷을 입고

잘난 체하고 있다


저마다의 품새 아름답다 하여

어깨는 봉긋 입술은 방긋 섰다


누이는 곧잘 잘난 척을 했다

철쭉을 보니 그럴 법도 하다 싶다


붉은빛 철쭉 무리에

시집가던 날 누이의 모습이 겹쳤다


연지 곤지 찍은

사뭇 어여쁜 누이의 모양새가 보였다


"어메, 철쭉이 참 곱소

누이는 잘 있을랑가?"


"그럼, 잘 있제, 연락 한 번 없으니."


철쭉이 저무는 날이면

나도 어메도 훌쩍 서운해질 것만 같았다


연락 닿지 않아 보지 못하는 이

이리 볼 수 있다 했건만


계절은 가고 금방 폭서 올 터이니

서운한 마음은 하나, 둘


다만 가는 계절에 실려 보낼 것이어라


「소란이 소란하지 않은 계절」 - 이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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