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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수집하는 노인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이현정 옮김 / 아고라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조이스 캐롤 오츠는 무척 유명한 작가지만 우리나라에선 왜 그런지 그렇게 인기있는 작가도 아니며 작품이 많이 소개되지도 않은 듯 하다. 나도 오츠의 책은 이 책이 처음 접한 거였고.
미국문학의 대가 다섯명의 마지막 순간을 테마로 하여 단편 다섯개를 엮은 책인데, 미국문학사에 지식이 없는 사람도 큰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물론 이 소설은 픽션이지만 동시에 작가가 꽤 꼼꼼하게 조사를 한 듯, 실제 사건과 교묘히 얽혀들어가는 부분도 있으니 아무래도 아는 게 많으면 그만큼 더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겠고.
'소녀수집하는 노인'은 '톰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의 말년을 그렸다. 늙음에 대한 한탄과 아내와 사랑하는 딸을 연달아 잃는 가정의 불행으로 인해 어리고 귀여운 소녀를 '수집'하는 취미를 갖게 된 클레멘스(트웨인의 본명) 할아버지. 물론 원조교제라는 말로 얼핏 떠오르는 그런 성욕의 측면은 아니지만, 또 쉽게 그런 오해를 받을 수도 있기에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하기도 하다. 자신이 원했지만 갖지 못했던 순수함과 귀여움의 상징으로서 소녀를 원하는 노인. 하지만 그 순수한 욕망은 동시에 '영원한 소녀는 없다'는 당연한 진리 앞에서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데...
헤밍웨이의 마지막을 다룬 '아이다호~'도 마찬가지다. 녹슬어가는 육체와 세상사에 대한 환멸로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 총으로 자살을 꿈꾸는 헤밍웨이. 강렬히 죽음을 원하면서도 막상 방아쇠를 당기지는 못한다. 실패하면 웃음거리가 될거란 핑계를 내세우지만, 그토록 죽음을 원하는 그의 모습이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강한 미련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자신의 젊은 날을 반성하며 한편으로 젊은 병사들에게 동성애 비슷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헨리 제임스의 이야기 '성 바르톨로뮤 병원의 대문호'는 내가 헨리 제임스의 책을 읽지 못했고 그의 삶에 대해서도 아는게 별로 없기에 큰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노년에 접어든 후에, 아니 어쩌면 노년에 접어들었기에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여 비난받을 일조차 서슴지 않는 모습에서, 다시금 삶과 죽음, 그리고 그 경계에 걸쳐있는 욕망이란 코드를 읽어낼 수 있었다.
정말 포가 다시 살아나서 쓰기라도 한 듯 포 특유의 환상적이면서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물씬 배어나는 '죽은 이후의 에드거 앨런 포 그리고 등대'도 마찬가지로 앞서 말한 삶과 죽음, 욕망이라는 주제를 변주하고 있다. 헨리 제임스와 나중에 나올 에밀리 디킨슨은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마크 트웨인과 헤밍웨이, 그리고 포를 다룬 세 편의 경우에는 정말 그 작가의 문체로 착각할만큼 탁월하게 문호들의 스타일을 재현해냈고 그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 정도의 연륜을 쌓은 대작가가 굳이 다른 작가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새로웠지만 유연하게 다른 사람의 문장스타일을 재현하는 것이 기가 막히기도 하면서 동시에 오츠 본인의 탁월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SF적인 상상력의 '레플리럭스'는 그 기발한 상상력에 그치지 않고 자연스럽고 매끈한 전개와 만만치않은 소설적 재미, 그리고 생사를 가르는 것이 무엇이며 인간답다는것은 또 무엇인지 우회적으로 묻고 있는 점까지, 실로 만족스러운 소설이었다. 역시나 디킨슨의 작품 세계를 잘 몰라서 조금 재미가 반감되긴 했지만 말이다.
정리해보자면 다섯 문호의 삶과 죽음, 그리고 욕망을 통해 우리의 인생이 어떠한 것인지 또 그것이 얼마나 지독한 집착이며 동시에 그러한 집착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기둥임을, 현란하게 문장스타일을 바꿔가면서 처연하게 얘기하고 있는 수작소설이다. 굳이 주제만 의식해서 강박적으로 읽을 필요도 없다. 그냥 재미있게 읽다보면 절로 욕망과 인생에 대해 각자 생각이 들 테니까.
이만한 작가를 아직 몰랐다는게 부끄러우면서 한편으론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이 작가 본연의 스타일은 어떤 것인지, 한번 다른 책을 찾아서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