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차가운 바람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며, 덩달아 마음까지 괜하게 쓸쓸해지는 계절이다. 따뜻한 커피잔과 새큼한 귤 몇 개가 놓여진 책상에 앉아 왠지 나와는 어울릴 법 하지 않는 연애소설을 한 장, 한 장 차분하게 읽어본다. 내가 사랑했었던, 이제는 아득하게까지 느껴지는 기억들을 더듬어가며 그때의 모습들과 소설 속 이야기들을 겹쳐보기도 하고, 또 그렇게 헛웃음도 지어보고 새삼 서러움이 북받쳐오르기도 하면서 그래도 페이지는 계속 넘어가는구나. 어느새 커피는 식어버렸고, 귤은 껍질만 뒹굴고 있으나 나의 마음은 책을 읽기 전이나 읽은 뒤나 모두 여전히 외롭고 허전할 뿐이다...
 

 

 

 ...뭐 이제 웬만한 단골들은 다 눈치챘겠지만 이건 훼이크고 ㅡㅡ;;; 아놔 시발 옛날엔 닭살돋는 글도 제법 썼는데 이제 막장뻘글 아니면 키보드가 안 나가 ㅠㅠㅠㅠㅠㅠㅠ 뭐 그렇다고 내가 정말 진지하게 "감수성 어린 말들을 촘촘히 엮어낸, 우리 시대 사랑이야기의 새로운 전범을 제시하는 투명하고 아름다운 소설"이라는둥, "이 작품에서 이메일은 유비쿼터스 시대를 맞아 어디서든 '접속'할순 있지만 반대로 '소통'하긴 쉽지않은 정보화사회의 그늘을 상징하는 매개체로서, 결국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숙명적인 불완전함에서 기인한 아픔을 서로 치유하는 과정을 나타낸... 어쩌구저쩌구" 하는 식의 글을 못 쓰는건 아니다. 근데 사실 요즘 악플러들이 늘어나면서 초심이 흔들리고 있긴하지만 이 블로그는 원칙적으로 내가 뻘글 싸지르려고 만든 곳이고, 내가 쓰고싶은데로 써갈기는 곳이니 내 맘대로 막장뻘글 쓰겠다이거라구. 그리고 사실 악플러들 포함해서 여기 구경 오는 횽들도 내가 갑자기 졸라 개후까시 잡고 솰라솰라거리는거 별로 바라지도 않잖아요? (사실 '찌질뱅이의 뻘생각' 카테고리에 개념글 좀 쓰려고 준비중인데 그건 별개 문제고 ㅋㅋ) 

 

 암튼 오랜만에 구역질나고 닭살돋는 연애소설을 한편 읽었다. 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꽤 괜찮은 느낌과 독특한 구성, 차분하고 깔끔한 결말까지 나름 준수한 소설이라고 하겠다. 잉게보르크 바하만 아줌마의 "삼십세" 이후 실로 몇년만에 읽은 오스트리아 소설이냐 ㅡ,.ㅡ 아니다, 피터 한트케도 오스트리아 넘이었던가? 뭐 암튼 굳이 국적을 따질 필요는 없겠지.

 

 내가 연애소설을 읽는건 뭐 졸라 안 어울리는 짓이란거 알고 있긴한데, 그래도 몇가지 이유는 있다구.

 

 일단 요즘 나오는 소설들은 뭔소린지도 모를 헛소리 잔뜩 늘어놓고나면 평론가가 '님 좀 짱인듯'하고 역시나 알아먹지도 못할 해설 곁들여 나오는 후까시책과 이뭐 동방신기랑 초나우딩요랑 결혼하는 식의 말도 안되는 개허접개유치한 똥덩어리들을 제외하면 읽을만한게 도통 없다. 그런 의미에서 차라리 솔직하게 '이거 연애소설임'하는 책들은 최소한 후까시는 없고, 또 미쿡이나 왜국 소설들처럼 아무거나 닥치는데로 번역하는게 아니라 나름 선별해서 번역하는 구라파쪽 소설이니 최소한 개허접 똥덩어리는 아닐거란 생각이 들어서...가 가장 큰 이유겠지.

 

 그외에도 사실 뻔하다면 뻔한 플롯을 갖고 얼마나 그걸 지루하지 않고 나름의 특색을 드러내면서 풀어내는가를 읽으면서 작가와 머리싸움 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아무리 내가 책덕후라고해도 "콩고강 상류 뭄바쿰바족의 최대 축제인 꿍살라아뷸라 희생제를 둘러싼 소동극과 이를 호시탐탐 노리는 떼이루카베루부족과의 갈등을..."하는 플롯은 먼저 읽어낼수가 없고, 그렇다고 머리아프게 "범인은 여기서 자빠진 흔적이 있으니 알고보면 고자일거임" 하는 추리소설 따윈 읽기 싫으니 나름 만만한 플롯을 가진 연애소설 읽으면서 싸워본다는 정도. 물론 이렇게 읽다가 너무나 전형적이고 허접스런 전개를 보인다면 그건 내 선구안 자체의 실패니 그냥 패배인정하고 도서관에 반납해야하는거고 말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이제는 점점 써먹기 힘들어지는 구세대 작업스킬이지만, 이런 류의 책을 읽어두는 것이 대테러, 아니 대미소녀전선에 나름 유용한 스킬로 써먹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작업모드에 들어가려는 즈음, "요즘 이런 책 읽어보셨나염? 웃흥~"하면서 제목이 그럴싸하거나 소재가 좀 특이한 책들로 떡밥을 던질 수 있단 얘기지(물론 그런 책이 어렵거나 지루하다면 말짱 꽝이다). 작가를 말한다면 보통 에쿠니 가오리나 야마다 에이미, 베르나르 베르베르, 경우에 따라 오쿠다 히데오나 기욤 뮈소까지 언급해야하는 경우도 있다. 뭐...하지만 그런 책조차 안 읽는 애들이 더 많으니 그냥 책덕후는 쳐웁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놔 시발 나와 함께 헤겔과 니체를 논하던 스마트걸 E는 지금은 그 어디서 내 생각 잊었단 말인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암튼 내가 딱히 원하는 읽을거리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과 자연스레 공통된 대화주제를 평소에 미리미리 찾아놓잔 생각으로도 읽는다, 이말입니다요.

 

 그나저나 책 리뷰라고 제목 달아놓고 아직까지 책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으니 오늘도 뻘글은 참 잘나가는군효 ㅋㅋㅋㅋㅋ

 

 이제부터라도 막장리뷰 해보겠습니다. 근데 사실 내 막장리뷰들을 꾸준히 읽어온(아마 존재하지 않겠지만) 분들이라면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겠는데 이렇게 단독 서평을 하는건 최소한 이 블로그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고, 단독 서평을 한다는거 자체가 이 책이 꽤 그럴싸하다는 반증이니까 그렇게 이해해주십쇼.

 

 암튼 "처음부터 끝까지 이메일로만 이뤄진 연애소설"이다. 분명 이런 문구를 접하면 첫 느낌은 "졸라 유치하거나 졸라 막장이거나 졸라 지루하겠군."이겠지만 최소한 내겐 유치하지도, 막장으로 치닫지도, 지루하게 읽히지도 않았다. 나름 자기 패를 많이 공개하고 시작했지만 그 패를 나열하는 솜씨는 제법 참신했다는 얘기.

 

 그리고 이 이메일의 소통도 "님하 버디버디에서 보구 연락해여~ 난 폭풍공고 2학년이구염. 강남간지스탈이에염" 하는 동방예의지국 스타일이 아니라 나름 고전적이라면 고전적인 스킬, 잘못 보낸 메일로 시작하는거다. 도입부가 딱히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다음 단개로 연결이 매끄러워 시작부터 제법 흥미를 돋궈주더라고.

 

 초반엔 서로 탐색전. 훼이크를 쓰기도하고 헛다리 짚기도 하면서, 차츰 서로에 대해 진심으로 흥미와 관심을 가져가며, 조금씩 서로 비밀스런 얘기도 꺼내놓으며 마음을 열어가다가 어느 순간 서로의 이메일에 강렬하게 빠져드는 과정이 구구절절한 설명이 없었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잘 흘러가더라구. 나같이 머리 나쁜 인간은 이런 '설명이 안돼있는데 읽다보면 다 알게되는'흐름을 아주 높이 평가하는바, 특히 '행간'을 읽는 맛도 매우 빼어난 편이었다. 뭔 소리냐면 이메일의 제목, 발신 시간, 글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뻔하게 읽히는 두 사람의 마음 등이 어떻게 보면 이메일 자체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더 많은 재미를 줬다고도 할 수 있다.

 

 그냥저냥 친해지고 관심이 생기다보면 당연히 '벙개'의 과정이 나오고, 슬슬 이쯤에서 '만나고나니 졸라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서 결국 4주후에 뵙는 것으로 끝나는 막장드라마 완성'이 아닐까 생각도 들었지만, 역시 이 책은 절묘하게 또 그런 매너리즘을 살짝 비켜간다. 두 주인공은 분명 같은 장소에서 만날 약속을 하고 그 장소로 나가지만 결국... 아, 스포일러는 자제할게요.

 

 그런 만남 아닌 만남을 둘러싼 공방전, 서로가 모니터를 보며 건배하는 와인파티, 남주의 직업과 여주의 상황으로 빚어지는 소소한 오해와 갈등들, 여자의 복잡한 성격을 절묘하게 그려낸 소개팅 이벤트까지 이런저런 흥미로운 상황들은 계속 이어지고, 실로 오랜만에 제대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소개팅 전후의 장면들은 제법 여자연구를 해온 나조차도 '아놔 이 ㅅㅂㄴ이 뭐래는거야'할 정도로 은근 짜증났던게 사실이니, 바꿔말해 그만큼 작가의 솜씨와 여자의 심리묘사 스킬이 뛰어났단 얘기가 되겠다.

 

 그러다가 결국 너무나도 중요한 제 3자가 개입을 하게 되고, 결국 이들의 '모니터를 바라보고 속삭이는 사랑'은 오프라인, 아니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히게 된다. 막판에 갈등이 제법 커지면서 둘의 감정도 급격하게 극한으로 달려가고, 읽는 사람의 똥줄도 롯데야구를 보는듯이 바작바작 타들어가는데... 결국 선을 넘지 않으면서, 약간은 아쉽지만 고개가 끄덕여질만큼 수긍할수도 있는, 그러나 역시 좀 안타깝다는 생각을 못내 떨칠수 없는 그런 결말로 깔끔차분하게 마무리되더라구.

 

 어이구 스포일러피하기는 참 어렵다니까. ㅡㅡ;;;; 여튼 독특하고 개성넘치지만 현실의 선을 넘지 않는 절제된 개성의 맛이라고나할까, 내 취향엔 참 잘 맞는 책이었다. 뭐 이게 한국소설 소재로 쓰였다면 바로 두 연놈이 미친듯이 떡을 치고나서는 되도 안한 말 시부렁거리면서 온갖 허세잡고, 흐지부지 마무리짓고 나면 평론가들이 기어나와서 "여성해방문학의 선두주자로서 기존 유교질서에 억압된 어쩌구저쩌구" 또 씨부렁거리겠지. 니넨 그렇게 평생 서로 딸딸이만 쳐주다가 살든말든 내 알바 아니고.

 

 암튼 대충 이런 구성의 책입니다. 차분한 음악이 깔리는 여유로운 오후의 티타임에 어울리는 책인듯도 하고, 연인에게 슬며시 권해주며 같이 읽어보는 책이 됨직도 하며, 동짓달 기나긴 밤을 바늘로 허벅지 찔러가며 지새워야하는 리얼암울솔로들의 현실도피용으로도 괜찮을 듯하군요. 그냥 여기저기에 다 무난하게 들이밀 수 있는 책인거 같습니다.

 

 물론 올해 최고의 감동소설이라는 둥,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충격의 문제작이라는 둥 하는 거창한 구호와는 안 맞겠습니다만 뭐 항상 너무 쎈거만 볼 수도 없는 일이니, 가볍게 읽어보고 각자 그 가치를 정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겠지요?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연말연시라는 솔로들의 시련기가 겹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방구석에 앉아 연애소설나부랭이나 보면서 열폭하지말고, 그냥 거리로 나가 "님하 시간 점..." 하는 용기가... 뭐 임마, 너부터 열폭하지 말라고요? 네, 정답입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해두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