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 로켓 고스트 변두리 로켓
이케이도 준 지음, 김은모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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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로켓 시리즈의 세 번째 책 <변두리 로켓 고스트>가 출간되었다. 변두리로켓 시리즈 주인공은 쓰쿠다 제작소라 할 수 있다. 이 회사의 사장 쓰쿠다 고헤이는 직원들과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가고 밸브 제작에 성공하기 때문에 회사 전체를 주인공이라는 뜻이다. 전편 <변두리로켓>에서는 로켓 발사에 주요 부품인 밸브를, 두 번째 <변두리로켓:가우디프로젝트>에서는 초소형 심장판막 부품을 만들어 낸다.쓰쿠다 제작소 하면 기술력이라는 자부심을 직원 전체가 가지고 있다. 이상주의자처럼 보이는 사장 쓰쿠다는 현실적인 문제들에 서툰 모습을 보이지만 그의 경영정신에 동의하는 직원들은 같이 회사를 지켜나가고 있다.

 

이번 책 <변두리로켓 고스트>가우디프로젝트이후 10여년이 지난 시점으로 사장 쓰쿠다도 50대가 되었고, 1권에서 중학생이었던 딸 리나가 데이코쿠 중공업에 입사해 로켓 발사를 지원하는 기술자가 되었다. 그럼 이제 쓰쿠다 제작소는 탄탄한 기술력으로 승승장구해서 대기업이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여전히 대기업에 횡포에 시달리는 중소기업이다. 전권과 비슷한 설정으로 서두에서 대기업 야마타니가 느닷없이 신제품 개발을 백지화하겠다고 해서 쓰쿠다가 황당해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동안 힘을 쏟았던 신형엔진 개발이 물거품되고 기존 제품 발주량까지 줄이겠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혹시 단가를 낮춘 경쟁업체가 있는지 물어봤더니 역시 있다.

 

다이달로스다이달로스의 강점은 생산력이다. 비용절감을 위해 생산거점을 해외로 옮기고 정직원도 해고한 회사다. 이류 제품을 싼 가격으로 파는 회사인데 사명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셈이다. 이 회사 때문에 시작부터 쓰쿠다는 휘청하지만 늘 그랬듯 쓰쿠다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이번 책에서 다루는 소재 농기계엔진이다. 쓰쿠다에서는 최상의 품질을 만들어낸다. 품질이 향상 되어 단가가 비싸졌지만 거래처 야마타니는 찬물을 끼얹었다. 시속 이삼십 킬로미터로 농로나 논밭을 달리는 트랙터에 엔진 효율이 좋아지는 건 별 의미가 없다며...

 

한편 경리부장 도노무라의 시골에 가서 트랙터를 몰아본 쓰쿠다 사장은 트랜스미션, 즉 변속기어를 개발할 계획을 세운다. 이번에도 트랜스미션에서 가장 중요한 부품은 밸브다. 트랜스미션 전체 노하우는 부족하지만 밸브 기술은 쓰쿠다가 제일이라고 자부하고 있으니 도전 의욕이 솟아 오른다.

 

"밸브를 정복하는 자가 트랜스미션을 재패한다."

 

트랜스미션 제조사를 찾다가 발견한 회사는 기어 고스트”, 데이코쿠 중공업에서 일했던 직원 두 명이 만든 회사다. 쓰쿠다 제작소는 기어 고스트와 합작하여 트랜스미션을 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고, 여기서부터는 기어 고스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정리하자면 자금 압박을 받게 된 기어 고스트는 15억엔에 회사를 팔아야 될 지경에 이르고 그러면 모든 기술도 넘겨야 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은 특허권 관련 소송으로 돈을 버는 변호사들의 농간이었다. 기어고스트의 창업자인 이타미와 시마즈는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순진하게 회사를 날릴 지경이었다.

 

이 상황에서 쓰쿠다는 트랜스미션 회사를 헐값에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쓰쿠다 고헤이가 그렇게 할 사람이 아니다. 앞의 두 권을 읽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거라 예상했다. 아마 이 책으로 쓰쿠다 고헤이를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속 터지는 장면과 대사에 답답해 할 것이다.

 

회사도 사람과 똑같거든. 손해와 이득 이전에 도의적으로 올바른지가 더 중요하지 않겠어?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없으면 애당초 사업 자체가 성립하지 않아.”

 

좋은 기회를 잡지 않고 저런 말을 하고 있는 사장을 보며 이제 직원들도 당연한 듯 여기며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장사에 서투른 건 우리 전매특허로군.”

 

도의만 따지면서 기어 고스트의 상황을 뒷짐 지고 지켜보고 있었을까. 그러면 또 쓰쿠다가 아니다! 쓰쿠다는 기어 고스트가 특허권 소송에서 이길 수 있도록 결정적 도움을 준다. 그리고 뒷통수를 맞는다. 기어 고스트의 사장 이타미가 다이달로스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그 상황이면 진짜 꼭지 확 돌 것 같은데 우리의 쓰쿠다 사장님, 이렇게 말한다.

 

공짜나 다름없이 매수는 못했지만, 기어 고스트와의 거래 폭은 훨씬 넓어지겠죠.”

 

여기에 한 수 더 뜨는 도노무라 부장!

 

사장님은 돈이 되느냐 마느냐 이전에 인간으로서 올바르냐 그르냐는 기준으로 경영 판단을 하신 겁니다. 참 멋지다고 생각해요,” 

 

쓰쿠다 제작소에 근무하면 다 저렇게 성인군자로 바뀌는 걸까? 아버지의 병환때문에 도노무라 부장은 가업을 잇기 위해 쓰쿠다 제작소를 떠난다. 그 가업이란 바로 논농사다. 평생 회사만 다니던 사람이 300년간 조상대대로 이어온 그 땅을, 가업을 결국 자신이 물려받아서 하기로 한 것이다. , 이익, 편안함 같은 것을 생각했다면 농사 짓겠다고 팔을 걷어붙이진 않을 것이다. 도노무라도 땅을 버릴 수는 없다는, 그 마음에 따라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 책에서 흥미진진한 부분은 기어 고스트의 특허권 소송과 공동경영자인 이타미, 시마즈의 데이코쿠중공업 직원이었을 때의 사연이다. 그 내용까지 쓰면 줄거리를 다 공개하는 것이 되므로 생략한다. 그러니 이번 책에 쓰쿠다 제작소의 밸브 개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전권들보다 책의 두께가 조금 얇아졌다 싶더니 이번에 내용이 마무리 되지 않고 끝났다. 다음 달 나올 4<야카가라스>로 내용이 연결될 모양이다. 완결되지 않아 아쉬웠지만 다음 책이 기다려진다.

 

이번 책은 전권에 비해 쫄깃함은 적었지만 작가의 스토리텔링 능력은 인정!이다. 직원들을 믿고 제품의 실력으로 승부를 걸며 약자의 뒷덜미를 물지 않는 정도경영인 쓰쿠다 고헤이 사장을 믿고 보는 재미가 있다.

에이, 실제로 저런 사람이 어딨겠어?’ 라며 소설이니까 가능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비현실적이라는 비판도 있을 것이다. 더 잔인하고 추잡한 현실을 뉴스기사로 만나는데 소설에서라도 저런 사장을 만나니 반갑기는 하다. 정상적이라 부르는 사람이, 정말 정도 경영을 하는 기업이 어딘가에 있으면 좋겠다. 쓰쿠다가 말하는 공정한 기업문화도...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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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용도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마크 마리 지음 / 1984Books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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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암에 걸렸다. 항암치료를 받는다. 머리카락이 모두 빠진다. 음모도 빠진다. 가슴 옆 겨드랑이 쪽에 카테테르라는 기기를 삽입하여 피부가 볼록 튀어나와 있다."

 

"섹스 후에 사진을 찍는다, 직후이거나 그 다음날 아침에 찍는다. 섹스 전에 벗어던진 옷가지들, 침대 아래 흩어진 신발들, 뭔가를 먹은 흔적이 있는 테이블 위를 찍는다. 사진 찍기에 동의했던 둘은 찍은 사진들로 글을 썼다."

 

위 두 활동에 어떤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가? 개별적인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나? 유방암에 걸려 항암치료를 받는 여성의 수기와 특이한 활동을 하는 커플의 상관 관계란?

 

있다! 60대 초반의 여성이 연하의 남성과 연애를 했고 섹스 후에 사진을 찍었으며 그 사진들을 같이 보다가 글을 쓰기로 했고 그것이 책으로 나왔으며 제목은 <사진의 용도>이고 작가는 아니 에르노이다. 공저자이자 그녀의 애인은 마크 마리이다. 아니 에르노는 유방암 치료를 하는 동안 마크 마리와 사귀었고 그들의 연애를 사진과 글로 남겼다.

 

얼마전 암을 치료하는 의사의 책을 읽으면서 항암치료하는 사람들의 사연들을 접했다. 그 책에 항암치료하며 연하의 남자와 연애하는 60대 여성의 사연은 없었다. 프랑스와 한국은 정서도, 사람들의 행동도 차이가 있다. 암치료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도 이렇게 달랐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암에 걸렸을 때의 반응이나 항암 치료를 받는다고 할 때의 분위기는 거의 초상집 분위기다. 우울하고 슬프다. 의도하지 않았건만 애잔한 배경음악이 귓가에 자동 재생된다

 

나는 경탄했다. 어째서 이 프랑스 작가의 항암치료는 이렇게 에로틱할 수가 있지?

 

p.41

나는 특히 이 사진의 무질서함이 좋다.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막 마쳤고, 침대 시트는 구겨졌고, 베개는 푹 꺼졌다. 침대 위, 바로 책상 앞에 놓인 것은 틀림없이 A의 검은 실크 셔츠일 것이다. 가발을 쓴 다른 두 장의 사진 속에서 그 옷을 입고 있다. 이곳에 머물면서 처음으로 그녀는 내게 민머리를 보여 준다. 아주 짧은 머리카락이 다시 자랐는데, 그녀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그 당시 브뤼셀에 등장하여 곳곳에 포스터가 깔린 애니 레녹스를 닮았다. 항암치료 후에 새로 나온 그녀의 머리카락, 나는 그것을 쓰다듬는 것이 좋다. 부드러운 솜털, 두 번째 탄생이다. 그녀에게 인위적인 헤어스타일을 벗어던지고 이렇게 외출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p.100

베니스 여행에서 돌아와 3주 후에 찍은 사진이다. 두 번의 화학요법 치료 사이에 여행의 날짜를 맞추기가 무척 어려웠다. 어느 오후, 우리는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의 종탑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먼저 와 있던 관광객들이 하나둘씩 내려가고 우리들만 남았다. 우리가 서로를 끌어안은 그곳에서 바로 아래로 수도원 경내와 산 조르조 수도원 내부의 정원이 보였다. 나는 티셔츠 밑으로 브래지어를 벗어서 수도원 경내에 떨어지길 바라며 공중에 던졌다. 그것은 오랫동안 미풍에 실려 반대 방향으로 날았다.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광경 중 하나였다. 그리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항암치료 받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슬픈 건 고사하고 아픈 사람 같지가 않았다. 머리카락이 빠졌다는 것, 병원을 다녀왔다는 것 정도의 서술만으로 치료 중이라는 걸 실감할 정도였다. 사진을 찍고 현상하고 그것을 같이 보며 이야기 하고, 그러다가 글로 써보자고 합의하고, 14장의 사진을 고르고, 각자가 글을 쓰되 쓰는 동안은 서로 보여주지는 말고 언급조차 하지 말자며,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켰고 책으로 냈다.

 

나는 결론내렸다. 이 활동들이 그녀의 유방암 치료에 큰 역할을 했을 거라고! 이 책을 쓴 게 2000년대 초반이었고 그녀는 아직 생존해 있으니!

 

그들에게 사진의 용도는 지난 밤에 한 행위의 확인이었을까? 인화된 사진을 보며 오래지 않은 일을 마치 추억처럼 회상하는 놀이였을까? 사진을 텍스트로 변환하며 새로운 발견을 했을까? 정지된 이미지만 보여지는 사진 속에 들어있는 움직임은 둘만의 비밀이다. 각 사진마다 언제 어디서 무얼 하다가 찍은 장면이라고, 글로 써서 책으로 내어 만천하에 공개했다지만, 독자는 모른다. 사진과 텍스트를 대조하며 읽어봐도 알 길이 없다. 지금은 헤어졌겠지만 당시의 기록은 각자의 비밀이 되었을 것 같다.

 

아니에르노 시리즈를 다섯 권 받아서 세 권을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놀랍다. 이번 책 <사진의 용도>를 읽으면서 그런 작업을 할 마음이 통하는 상대가 있다는 것에 더욱 그러했다. 누가 감히 이런 책을 낼 수 있을까! 그녀라서 가능했으리라.

 

아니에르노라는 문학!’

그저 프랑스 소설이나 프랑스 문학, 이런 수식보다 적확한 단어다.

 

 

**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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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옷장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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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소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 자꾸 생각하게 된다. 주인공이 작가의 실제 모습과 얼마나 유사할지 아닐지. 마치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라고 하면 코끼리 생각만 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첫 작품이라는 <빈옷장>을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의 시초’라고 소개하고 있다. 시리즈 다섯 권중 <남자의 자리>를 먼저 읽고 이 책 <빈옷장>을 읽다보니 자꾸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그냥 작가의 이야기가 아닐까?’

 

 

<남자의 자리>를 먼저 읽지 않았다면 <빈옷장>은 ‘드니즈 르쉬르’라는 여자의 성장소설로 읽었을 것이다. <빈옷장>에서 아무리 르쉬르 식료품점이라고 불러도 <남자의 자리>의 그 식료품점이 연상되니 부작용이 컸다. 그러나 <빈옷장>을 먼저 읽었다 해도 자전적 소설이라는 소개가 작가와 드니즈를 동일시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자전적 소설과 에세이의 차이를 계속 생각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인칭 단수>는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하루키 자신의 이야기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소설임에도 마치 에세이를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장난스런 트릭인가 싶은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등단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도 하루키의 모습이 많이 들어있다. 소설가는 주인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일정 부분 집어넣을 것이다. 본인의 함량이 몇 퍼센트 들어가 있는지는 작가만 알 것이고 독자는 알 길이 없다. 그러니 독자로서는 자전적 소설이라는 말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아니 에르노의 모습이 <빈옷장>의 드니즈에게 얼마나 함유되어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런데 왜 나는 그것에 이렇게 천착하고 있는가......

......

......

찾았다!

내 글쓰기 때문이다!

 

 

몇 년 동안 나는 책 리뷰에 몰두하고 있을 뿐 에세이는 쓰지 못하고 있다. 물론 리뷰 속에 내 경험이 들어가지만 그것은 책이라는 큰 산 뒤에 숨어있는 것이다.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는 에세이가 두렵다. 걸리는 게 너무 많다. 그럼 소설을 쓰면 되지 않냐고? 그건 일천한 경험과 부족한 깜냥으로 너무 힘든 일이다.

 

 

<빈옷장>을 읽으며 어린 아니 에르노를 생각했다. 생존에 아무 문제가 없었던, 안온했던 세계를 탈출하고 싶어했던 아니 에르노를. 그녀가 부모님의 식료품점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고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들과는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것이었다.

 

p.172

드니즈는 조용해요. 공부하거든요. 늘 공부를 잘 했어요. 다섯 살에 사전을 읽었죠! 그들은 평온했다. 그렇지만 남자애들과 어울리는 드니즈, 자유롭고 행복한 드니즈라니, 그들은 매우 분노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윤리 속에, 두려움 속에 나를 집어넣기 위해 나를 그들의 구유로 데려가서 더럽힐 것이다. 나 역시 두려워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성공할 수 없었다. 자신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녀는 부모가 사는 세계에서 차원이 다른 세계로의 월경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십대가 되었고 대학생인 그녀는 불법낙태수술을 받는다. 불결하고 시끄럽고 매너없는 르쉬르 식료품점이라는 세계에서 벗어난 것 같지만 그녀가 넘어간 세계로 쉽게 편입하기 힘들었다. 대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낙태수술은 한 세계와의 결별에 종지부를 찍는 의식과도 같다. 소설의 시작이 수술을 받기 위해 다리를 벌리고 누운 장면이었고 르쉬르 식료품점이 늘 함께했던 십대시절로 돌아갔다가 마지막에 대학 기숙사에서 수기와도 같은 글을 이렇게 끝낸다.

그 부르주아들, 그 좋은 사람들 때문에 내가 지금 뱃속에서 내 수치심의 조각들을 힘겹게 꺼내는 것이라면, 나를 증명하기 위해, 구별되기 위해, 이 모든 이야기가 거짓이었다면…… 임신 그러니까 그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경비는 여전히 아래층에 있다.

일요일, 기숙사에서 1973년 9월 30일.

 

 

드니즈는 이로써 새로운 세계의 편입에 성공한 걸까? 더 이상 르쉬르 식료품점에 가지 않으면? 부모를 만나지 않으면?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는데 그들의 생활태도를 고스란히 보고 같이 살았는데? 그녀는 이미 열다섯 살에 알고 있었으며 두려웠다.

 

p.129

어쨌든 그들은 늘 내부모이며 나는 그들의 푸념과 취향, 말하는 방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이곳을 빠져나가서 신분 상승하는 것을 막을 것이다.

 

 

다행이도 드니즈가 아닌 아니 에르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서슴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글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소설에 화려한 미사여구는 없다. 흔히 문학적이라고 하는 비유적 표현은 거의 없고 있는 그대로를 기술할 뿐이다. 자전적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였기에 자신의 삶에 분 바르고 싶은 유혹이 있었을 것 같은데 오히려 감출 것 같은 부분까지 죄다 까발려 보여준다.

 

 

허나! 모를 일이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자전적 소설이라는 이름표의 무한 가능성을 그녀는 일찍이 간파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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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며 파도치는 내 마음을 읽습니다 - 인생을 항해하는 스물아홉 선원 이야기
이동현 지음 / 이담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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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기록 : 어느 항해사의 이야기 : 흔들리는 파도 속에서 나를 읽다 : 그리고 매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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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며 파도치는 내 마음을 읽습니다 - 인생을 항해하는 스물아홉 선원 이야기
이동현 지음 / 이담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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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언택트 사회가 되었고 대면 만남의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다보니 직접 만나보지 못한 직업을 가진 이들이 낸 책에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책 <배를 타며 파도치는 내 마음을 읽습니다>의 저자 이동현씨는 대형컨테이너선 일등기관사이다. 주위에 선원이 한 명도 없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궁금해서 서평단에 신청해서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에는 스물아홉 살 청년 이동현씨의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기관사가 된 사연, 항해를 하면서 느낀 감정들과 업계에 대한 고민들이 실려 있다. 아직 젊은 나이지만 이십대 초반에 배를 탔기 때문에 세계 여러 곳을 다닌 경험, 정박한 곳에서의 에피소드, 조금은 다른 직딩의 애환도 들어 있다.

 

 

직딩의 삶이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지겨움이 베이스로 깔려있기 마련이지만 선원들은 그 기본에 몇 배는 가중된다. 한 번 출항하면 최대 10개월이다.(예전에는 2년씩 타기도 했지만 이젠 최대 10개월로 정해졌다고 한다) 배 안에서 생활하므로 매일 배로 출근하고 배로 퇴근한다. 집과 직장의 장소 구분이 없는 셈이다. 그리고 배를 타는 동안 만나는 사람은 많아야 20명 내외인데 같은 사람들하고만 1년 가까이 같이 지내야 한다. 가족을 만날 수 없고 인터넷도 되지 않으며 중간 정박지에 입항해야만 땅을 밟아볼 수 있다.

 

 

 

 

배를 탄다는 것은 외로움과의 싸움이 아닐까 싶다. 그 외로움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결해야 덜 지겨울 것이다. 저자는 고등학교때부터 일기를 써왔기 때문에 배에서도 일기를 계속 썼다고 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이런 책도 낼 수 있게 되었다.

 

 

배를 타는 동안의 외로움을 견디는 것보다 힘든 것은 가족과의 유대인 것 같았다. 저자는 아직 미혼이지만 결혼 한 선배들의 사연을 보니 애잔했다. 태어난 아기를 두고 나갔다가 돌아오니 아기가 아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낯설어 우는 경우, 평소보다 집에 오래 있게 되었더니 고등학생 딸이 아빠 언제 가냐며 짜증내는 경우 등이다. 가족이란 몸 부대끼며 같이 지내야한다는 걸 누가 모를까만, 그렇다고 직업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꿈이 있어서 선택한 것일 수도 있고 급여가 높아서 다른 직업으로 바꾸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도 옛말인 모양이다. 예전에는 선원의 보수가 보통 3~4배 정도 많았는데 요즘엔 육상 근무자와 별 차이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러니 선원들의 고민이 클 수밖에... 급여의 차이는 없는데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고 정보 접근은 느리니 말이다. 저자도 책 말미에 이런 고민을 밝혔다. 업계에서는 일할 선원이 없다고 아우성이고, 선원들은 처우와 시스템 개선을 요구하는데 뭔가 소통이 안 되는 것 같았다. 다 밝히지 않은 것 같아서 나처럼 전혀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조금 답답했다. 어쩌면 자세히 쓰기엔 걸리는 게 많아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p.263

어제와 다를 게 없는 오늘, 언제나 비슷한 하루, 기관실을 내려가고 일지를 적고, 어제와 같은 사람을 만나고, 기름을 닦고, 저번 주에 먹던 비슷한 음식을 먹고, 자고 그렇게 같은 하루. 마주치는 상대가 변할 리 없는 그런 일상, 식사하며 배에 관한 이야기뿐인 그런 세상, 그저 먹고만 살면 되는 게 삶인 걸까?

 

 

번듯한 직업이 있어도 이 땅의 여느 청춘들처럼 고민이 있다. 저자는 기관사로서 배를 계속 탈지, 다른 일을 하게 될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청춘이기에 가능성이 있고 무슨 일이든 도전해볼 수 있다. 전문적인 일을 일찍 시작한 경험과 일기를 써온 습관 덕분에 이렇게 책도 내게 되었으니 이동현씨의 미래는 밝다고 생각한다. 그의 미래를 응원한다!

 

 

 

**위 리뷰는 네이버카페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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