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지키는 여자
샐리 페이지 지음, 노진선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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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도 하지 마. 씨발, 한 마디도 하지 말라고.”

청소도우미 재니스가 B부인의 집에 처음 갔을 때 만난 개 데키우스가 그녀를 보며 한 말이다. 재니스는 4년 째 데키우스를 만나고 있는데 그녀는 데키우스를 너무나 사랑한다.


p.60

재니스는 두 손으로 강아지의 얼굴을 감쌀 때 느껴지는 복슬복슬하고 뻣뻣한 털의 감촉을 사랑한다. 발레리나처럼 발끝으로 사뿐사뿐 걷는 모습도 좋아하고, 배에 실을 묶어서 위에서 잡아당기듯이 통통 튀는 걸음걸이도 너무 사랑스럽다. 데키우스를 데리고 케임브리지의 들판과 초원을 산책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 마음속 도서관에 데키우스의 이야기를 넣기 위해 동물을 위한 코너도 만들까 생각 중이다.


나는 이 소설 <이야기를 지키는 여자>를 읽으며 데키우스가 나올 장면을 기다렸다. 몇 달 전 고양이 루키가 세상을 떠난 후로 책을 읽다 동물이 나오면 심장이 찌르르 했다. 데키우스는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데 욕쟁이에다 촌철살인의 화법을 구사한다. 재니스와 함께 있을 때 그 상황에 꼭 맞는 표정과 멘트를 날려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데키우스의 목소리는 재니스만 들을 수 있다. 재니스는 이야기를 수집하고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지만 그녀는 정작 마음을 털어놓지 못한다. 자신의 위치가 그러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독보적인 청소도우미라 칭하지만 남편 마이크는 그녀의 직업을 하찮게 여긴다.


재니스가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 놓이거나 뭐라 말해야 할지 난감할 때 데키우스는 그녀의 심정을 정확하게 꿰뚫어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해주고 시원하게 욕도한다. 데키우스는 그야말로 신스틸러다. 재니스는 데키우스가 곁에 없을 때조차 데키우스의 목소리와 눈빛을 상상한다. 재니스의 귀에만 들리는 데키우스의 목소리는 어쩌면 그녀가 자신에게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욕을 내뱉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고객 앞에서 울리는 내면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내 눈을 빤히 바라보던 루키의 눈동자를 기억한다. 데키우스처럼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루키와 나는 눈으로 대화했다. 함께 있는 인간과는 대화가 안 됐는데 루키의 눈동자는 나를 위로해 주었고 내게 제 심장소리를 들려주었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데키우스는 살아있었지만 루키는 이제 내 곁에 없다. 충실한 반려인이 아니었던 남편 대신 재니스에게 데키우스가 있어 다행이었고, 버스 운전수 유언의 비중이 많아지면서 데키우스가 나오는 빈도가 줄어들어 아쉬웠다.


그러나 유언과의 관계가 진전되면서 재니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게 되었다.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재니스'가 미들 네임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호프라는 이름은 어릴 때 이후로 불리길 원치 않았다. 희망(호프)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으며 이름대로 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재니스가 청소하는 집과 그 사람들의 이야기로 주를 이루던 내용은 유언과 대화를 하게 되면서 점차 재니스의 이야기로 나아갔고, B부인에게 어릴 때의 비밀을 털어놓음으로서 서서히 자존감을 회복하게 된다.


재니스는 어릴 때부터 부모를 대신해 동생을 지켰고, 이른 나이에 남편을 만나 아들을 낳아 키우고 가정 경제를 책임졌다. 일생을 허투루 산 적이 없었다. 나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온 재니스가 동물 아닌 사람에게서 공감받길 바랐다. 타인의 이야기를 모으면서, 이야기를 갖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순간을 찾는 것임을 알게 된 그녀에게 완벽한 순간은 언제였을까. B부인은 재니스가 열두 살 때부터 짐 진 죄책감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해주었고 유언과는 책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을 나누기 시작했다. B부인은 재니스가 유언을 만나 행복해졌다는 것을 바로 알아봤다. B부인은 엄마다운 엄마가 없었던 재니스 인생에 엄마 같은 사람이었다.


고진감래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결말이 자칫 식상할 수도 있지만 재니스가 만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현실적이고 연결도 촘촘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충분히 공감할수 있다. 커피 한 잔 제 손으로 타먹지 않으며 여러모로 마누라 알차게 부려먹는 마이크 같은 남편들은 한국에도 널렸고, 부모 재산이 당연히 제 것이라 착각하는 자식들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재니스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훌륭한 재능과 선함, 용기가 숨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런 사람이 바로 재니스다. 그렇기에 성실하게 살아온 주인공에게 통쾌한 일이 벌어지길 기대하며 읽게 되는데 이 소설은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앞으로 재니스의 인생이 반짝반짝거릴 것임을 알기에 흐뭇했다.


이야기의 힘을 믿는 재니스처럼 독자들도 그러하다. 내 이야기가 지금까지는 시시했더라도 이 소설을 읽은 뒤엔 즐겁고 행복한 이야기로 펼쳐지길 바랄 것이다. 어떤 이야기를 만들지는 자기 자신이 정할 것이므로 희망하는 대로 말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가제본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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