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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의 시대 ㅣ 새소설 17
장은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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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의 시대>라는 소설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요즘 얘기일거라 예상했다. 요즘 나는 도대체가, 부끄러워서 살 수가 없다. 답답해서 죽을 것 같고 화도 난다. 내겐 왜 그를 처리할 능력이 없는 것인지! 소설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제목만 보고 멋대로 기대했다. 부끄러운 시대를 건너려면 이러이러해야한다는 지침을 주지 않을까. 아니면 현실보다 훨씬 부끄러운 시대가 여깄으니 위안 삼으라 할 줄 알았다. 비장한 내 예상과는 달리 소설은 밝았고 예뻤다.
소설의 첫 문장 “나의 아버지는 유령이다.”는 호텔 청소부의 정체성이다. 이 소설의 놀라운 점은, 우리가 어떤 단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지점에 있다. 소설에서 작가가 사용한 단어는 유령, 우산, 부끄러움이고, ‘이봐요’와 ‘DO NOT DISTURB’도 있다.
수공예 우산을 만드는 ‘강한해’가 들려주는 그의 가족사에 놀랐다. 저렇게 순수한 사람들이 있단 말인가.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와 둘이 살고 있었는데 이혼한 누나가 집으로 들어와 다시 세 식구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호텔에서 청소 일을 한다. 평생 같은 호텔에서 청소를 해왔는데 청소노동자로서의 유령 같은 정체성은 삶에서도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삶의 태도를 ‘부끄러움’이라고 정의 내렸다.
어머니도 아버지와 직업이 같았지만 성격은 아버지와 정반대였다. 있는지도 모르는 청소노동을 하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고 선두에 나서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녀 인생의 첫 번째 행동은 고등학교 때 막말을 하는 담임에게 “천하의 개새끼!”라 욕하고 교실을 나온 것이었다. 두 번째는 퇴학당한 막내딸을 집안의 수치로 여기는 부모에게서 당당하게 독립한 일이었다. 스무살 생일을 지나자마자 가출한 것이긴 하지만. 그런 어머니가 정반대의 인품을 가진 아버지를 만나 결혼했다.
누나의 과감한 행동은 어머니를 닮은 것처럼 보였다. 남편 이빨 사이에 낀 고춧가루와 셔츠 사이로 삐져나온 가슴 털 한 가닥 때문에 밥맛이 뚝 떨어져서 이혼했다는 누나가 친정으로 돌아와 빈둥빈둥거리는 게 동생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김치찌개 국물과 블루베리 얼룩이 묻은 목 늘어난 티셔츠를 닷새째 입고 있는 누나가 아버지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고 커피까지 받아 마시는 꼴을 보니, 동생의 입에서 부끄럽지 않냐는 말이 절로 나온다. 우리가 부끄러움이라는 단어를 쓸 때가 바로 저런 장면이다. 그런데 누나는 이혼이 부끄러운 거냐며 반문했다.
소설에서는 부끄러움이 수줍음, 좋아함, 존경심처럼 여러 모습으로 정의된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의 수줍어하는 부끄러움, 존경하는 이에게 부끄럽게 표현하고픈 경외감. 이런 것은 서두에 밝혔던 요즘 나의 부끄러움과는 다르다. 갑갑한 현실 때문에 내 사고가 갇혀버린 것이다. 부끄러움이란 화두는 같은데 칙칙하고 답답한 현실과 이 소설은 달라서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 화자인 강한해가 주인공인 것 같지만 나는 아버지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회에서 없어선 안 될 직업인 청소부, 그것도 항상 깨끗하게 유지해야하는 호텔 객실을 청소하는 유령 같은 존재인 아버지는 일상에서도 유령처럼 살았다.
지위에 맞지 않는 짓거리만 자행하는 자가 국가의 아버지 격인 리더랍시고 떡하니 자릴 차지하고선 제 행실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부끄러움은 오로지 국민의 몫이다. 이에 대학교수들과 문인들이 속속 시국 선언을 하고 있다. 첫 문장을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로 시작하는 경희대학교 교수들의 시국 선언은, 참담한 현실을 바꾸겠다는 의지다. 격하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부끄럽지 않다. 사람들이 부끄럽다며 기피할 직업을 강한해의 아버지는 평생 성실하고 당당하게 수행했고, 생의 마지막을 유령처럼 마감했다. 소설 속 감염 상황은 코로나 팬데믹 시절의 장례와 같이 치러졌다. 그렇게 아버지는 떠났지만 아들에겐 대화록이 남았다. 수줍어서 비대면인 문자를 선호했던 아버지는 시인 같은 문장들을 남겼고 아들은 그 문자 대화록을 아버지의 유품이라고 여긴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문자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정과 마음이 엿보여 지우지 않고 보관해 두었는데 태우거나 버리지 않을 유품이 될 것이다.
"우리 아들 한해 많이 지쳤지? 내일은 꼭 집에서 같이 저녁 먹자. 네가 좋아하는 순두부째개 해놓을게. 오늘 밤은 가을 달이 순두부처럼 말캉하구나."
아버지의 이런 감수성의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만남이 있었는데 그는 호텔 투숙객이었고 강한해의 스승님인 우산 장인이다. 우산을 손으로 직접 만드는 강한해의 이야기와 호텔을 청소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또는 겹쳐지며 진행되었다. 전혀 다른 직업의 작업 과정을 두 축으로 보여주다가 어느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스승님이다. 부자가 같이 존경했던 사람이었다. 한해가 스승님의 언행을 복기할 때마다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는데 아버지와 스승님이 호텔 직원과 투숙객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그 실체가 명확해진다.
이 소설은 참 신기한 소설이다.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자간의 갈등이 없다. 남매간의 격렬한 다툼도 없다. 가족이 이렇게 따뜻할 수 있나 싶다. 하찮게 여겨지는 직업인 청소노동자와 함부로 버려지는 우산을 손으로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이야기 안에서 진정한 직업의식을 만날 수 있다. 고충만을 토로하거나 단점을 부각시키지도 비하하지도 않는다. 자주 등장하는 부끄러움은 그 외의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한해는 아버지의 죽음을 한마디로 “방해하지마!”라고 정의했다. 아버지는 생을 끝내고 나서야 저 말을 세상에 외칠 수 있게 된 것이다. 배제당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말에서 비로소 벗어난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의 시대를 잘 지키고 버텨냈기 때문에 한해는 자신의 삶이 부끄럽지가 않다. 자신이 바로 아버지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인생은 존버!’이란 말과 비슷하게 자주 쓰이는 ‘버티고 견디는 게 인생’이라는 말로 소설이 끝나서 조금 식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뻔한 게 인생이 아니던가. 다 달라보여도 죄 비슷하니까 말이다.
또 일반적이지 않은 것 하나는, 한해가 사귀게 될 여성 ‘이봐요’씨의 이름을 끝내 밝히지 않고 소설이 끝난 것이다. 사람 대 사람의 만남에서 통성명은 기본이고, 소설 속에서 주요한 인물은 어떤 식으로든 불리어져 독자에게 알린다. 이봐요씨가 이름을 말하지 않은 것은 부끄러워서였을까...
부끄러움을 모르고 사는 자들이 분노를 유발하는 시대에 읽어보면 좋을 책으로 추천한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