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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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이모는 한 번에 콱 죽어버릴 거라고 늘 말했었다. 몇 년 전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썼다. 그녀는 지난 6월 유방암 4기 판정을 받았다. 양쪽 가슴에 모두 암덩어리가 많이 자라 있고 임파선과 어깨로까지 퍼져있는 상태로 현재는 항암치료 중이다. 그간 연락이 되지 않던 이모와 얼마 전 통화를 했는데 목소리가 꽤 밝았다. 종양 크기를 줄이기 위해 항암 약을 복용중이라며 통증도 별로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통화가 끝났다. 그러나 큰이모와 통화해보니 전혀 다른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파 죽겠으니까 자꾸 전화하지 말라며 말하는 것도 싫다고 했다니 대체 나와 통화한 사람은 누구인가 싶었다.


이모의 상황을 알게 된 후 정보라 작가의 신간 <고통에 관하여>라는 제목이 나를 끌어당겼다. 이모의 통증이 어느 정도일지 나는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렇듯 우리는 타인의 고통의 수위를 체감할 수 없으니 공감할 수 없다. 또한 자신의 고통을 언어로 표현하기도 쉽지 않다. 고통을 언어로 표현하는 이유는 타인에게 통증의 정도를 알리기 위해서다. 의사에게든, 가족이나 지인에게든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야 상대가 어느 정도 가늠이 되어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도 소설에서 이렇게 썼다.


p.128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신체의 감각과 기능을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 그 어떤 환희나 쾌락도 오로지 감각하는 사람 자신만의 것이며 고통과 괴로움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육체가 경험하는 감각과 사고를 언어 혹은 다른 방식으로 타인에게 전달할 수는 있으니 인간은 오랫동안 그렇게 전달하고 소통하고 공유하려 애썼으나 그 어떤 표현의 방식도 결국은 불충분하다. 완전한 의사소통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신체 안에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공유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시작하여 소통 역시 마찬가지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문장을 읽고 놀랐다. 그리고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신체 안에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에서는 감탄했다. 소통의 어려움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나는 결론지었다. 작가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라고. 제 몸의 고통을 타인과 소통할 수 없는 근원적인 이유는 몸 때문이라고. 인간이 살아있거나 죽었다는 표현은 물리적인 상태의 몸이 있기에 쓸 수 있다. 타인과의 소통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제 몸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다. 그러나 고통과 삶의 의미를 찾고 죽을 때까지 타인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것 역시 인간이다.


이에 작가는, '인간은 결국 죽는 존재이나 죽음을 언제나 똑바로 바라보는 채로 하루하루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다' 고도 했다. 죽음 앞에 서보지 않는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형 선고와 같은 시한부를 통보 받은 이모의 심경은 어땠을까그렇게 생에 미련이 없다는 투로 말해왔고 연명치료도 받지 않을 거라고 큰소리 쳤던 이모는 큰이모에게 열심히 치료받을 거라고 했단다. 치료 잘 받아서 꼭 나을 거라고. 왜 한 입으로 두 말하냐고 할 수 없다. 아무리 죽음에 의연했더라도 자신 앞에 죽음이 성큼 다가오면 두려울 것이 분명하고 갑자기 생에 의지가 불타오를 수 있다.


작가는 소설에서 이라는 인물의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고통을 없애려는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고통은 언제나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며 고통을 느낀다고 해서 어딘가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데서 커다란 위안을 얻었다고. 이모는 지금 암으로 인한 이 고통이 그간 살아오며 겪어온 숱한 어려운 일들에 다름 아니라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평생을 워커홀릭으로 살아왔고 아들 둘을 위해 돈을 모으고 또 모았다. 어지간한 통증은 통증으로 치지도 않았고 자신은 몹시도 건강한 사람이라고 큰소리 쳤었다. 지금 암으로 인한 고통 역시 충분히 견뎌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다. 언니에게 고통을 호소하기는 했으니 말이다.


항암 치료 결과가 좋지 못해 죽음에 이르게 된다면 그토록 열심히 살아온 자신의 삶을 어떻게 평가할까. 이모는 후회할까, 덤덤하게 받아들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이모는 웬만해선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고, 나는 이모와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도 엄살을 잘 부리지 않는 편이다. 남들에게, 심지어 가족에게도 내 심정을 시시콜콜 표현하지도 않는다. 만약 내가 이모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어떨까? 내 고통을 누구에게 호소할 리는 없을 것 같다. 고통은 오롯이 내 몫일 것이므로...


소설 <고통에 관하여>를 통해 작가는, 고통이 없는 삶은 자신을 자각하지 못하는 삶이라고 말한다. 고통이 없는 진통제를 개발해 낸 제약회사, 고통을 통한 초월을 주장하는 종교 단체, 이와 관련되어 있는 인물들을 통해 독자에게 묻는다. 고통 없는 삶이 행복할 것 같냐고. 그런데 한국 사회는 왜 이렇게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내모는 거냐고. 고통에 중독되어 고통을 자각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한 번 보라고.


내 생활을 돌아본다. 하루 동안 해내야 할 일들에 헉헉거리며 24시간이 모자라 잠을 줄여 책을 읽고 신간을 훑어본다. 한동안 자제했는데 또 다시 출판사의 서평단 공지가 뜨는 족족 신청하고 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다. 중독은 쾌락을 좇는 것이라고 했는데 내가 하는 이 짓들은 쾌락 때문인가.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쾌감을 즐기는 것인가. 느긋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으려는 심리인가. 내게 가하는 고통에 관하여 생각해 본다.


이렇게 끝내려니 서평으론 많이 부족한 것 같아 덧붙인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외자(漢字)로 지어 한자가 내포하고 있는 여러 의미가 인물이 지닌 특성을 골고루 드러내도록 했다. 독자 입장에선 다소 낯설고 그 인물이 단박에 그려지지 않을 수 있다. 작가의 의도인 듯하다. 이 소설의 장르는 SF. 비현실적이어도 개의치 않고 읽을 수 있다. 여성 동성 간 결혼과 그 커플의 체세포와 난자로 인공 수정하여 임신에 성공하는 것에 공감하지 못할 수 있으나 근미래에 다가올 일임을 예상할 수 있다.


나처럼 고통에 치우쳐 생각할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 책으로 독서 모임을 한다면 통증과 고통에 관해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면 좋겠다. 정희진 선생이 자신의 오디오 매거진(정희진의 공부)에서 어떤 단어 하나로 이야기 나누어 보기를 추천한 게 기억난다. 통증과 고통으로 무궁무진하게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을 것 같다굉장한 소통의 장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100% 아니겠지만.      



**위 리뷰는 네이버카페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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