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픽션 걷는사람 소설집 11
최지애 지음 / 걷는사람 / 2023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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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픽션 앞에 ‘달콤한’을 놓았다.

픽션이니까 당연히 달콤할겠지라는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최지애 작가는 노린 걸까?

독자의 뒷통수를 때리고 싶었던 거?

메~롱!

당신들이 상상하던 달콤함은 여기 없다구!

책을 덮으며 나는 물었다.

그럼 우린 어디서 맛볼 수 있나요, 달콤함을...

킬링 타임용 영화를 주로 보는 관객은 말한다. 세상이 갑갑한데 영화마저 그런 걸 봐야하냐며, 두 시간 동안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낄낄거리고 싶다고, 때려부수는 걸 보며 스트레스 풀고 싶다고!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멸종 위기 인간이 되어가는 ‘독자’라는 사람들은 어떨까?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다. 요 사이엔 친구도 거의 못 만나고 가족과 직장 동료 몇몇 뿐이다. 소설을 펼치면 평소 전혀 만날 수 없는 직업을 가진 사람, 한국이 아닌 곳에 사는 사람, 나와 연령대가 아주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의 삶을 읽으면 부럽다가 애잔했다가 울다 웃게 된다. 그리고 나를 돌아본다. 결국 소설 읽기는 나를 만나는 일이다.

최지애 작가의 단편집 <달콤한 픽션>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삶은 달콤하지 않았다. 돈에 치이고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세상에서 소외된다. 그들은 누구보다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왔으며,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고 돈 많이 벌어 효자가 되고 싶었다. 실천하지는 못했으나 제 삶을 스스로 마감하고 싶었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달콤한 픽션> 속 미주는 외친다. "자고로 모든 결말은 해피엔딩이어야 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의 낭만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우리도 그렇게 되길 바라기에 달콤한 픽션과 달리 현실은 반대이기에 웃프다. 소설 속 부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내 옆에, 우리 주위에 있을 것이다. 길을 걷다 스쳐지나가는 사람 중에, 은행 ATM기기 앞에 줄 서 있는 사람이,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일 수도 있다. 우리는 해피엔딩을 바라며 살아간다. 지금이 비록 남루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작가는 각 소설의 끝을 열어두었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삶은 사는 것이고 계속 되어하니까.

단편 하나하나 인상 깊었고 그 주인공들의 등을 토닥여주고 싶었다. 어떤 이의 삶은 더 이상 알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끝까지 읽어내었다. 이 리뷰에서 여덟 편 전체를 언급할 수는 없어서 <선인장 화분 죽이기>와 <까마귀 소년>를 소개한다.

<선인장 화분 죽이기>의 주인공은 60대 여성으로 외손주를 돌보고 있다. 딸 내외는 주말부부인데 딸은 늘 늦게 퇴근한다. 남편은 젊었을 때 바람을 피워 집을 나갔다가 딸의 결혼식 때 슬그머니 돌아왔다. 주인공은 딸을 결혼시킨 다음 이혼하려고 했으나 남편은 뇌출혈로 쓰러져 집에 눌러앉았다. 그녀는 남편이 오전 산책을 하고 뒤뚱거리며 집으로 들어올 때마다 선인장 화분을 집어 든다. 남편이 지나갈 때 베란다 밖으로 화분을 던지면 머리 위에 정통으로 떨어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장면은 어찌 보면 섬뜩하지만 한편으론 그녀의 심정이 십분 이해되었다. 그러나 제목처럼 선인장 화분을 죽이지는 못한다.

남편과 이혼하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를 하고 싶은 그녀는 문화센터 일본어 회화 강의를 하는 센세를 흠모하고 있다.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헤어보톡스로 머리밑이 휑하지 않도록 치장한다. 손자에겐 할머니로 불려도, 아줌마와 할머니 어디 쯤인 60대는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고 싶다. 그러나 자신 외에 한 명 더 있는 학생 김상과 센세가 마치 부부처럼 나란히 백화점으로 식당가를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소설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인데 이 장면 이후 그녀의 심경은 서술되지 않았다.

그리고 손자를 데리고 전시장에서 시간을 보낸 후 지친 몸으로 아이를 업고 집으로 돌아온다. 양손 가득 마트 봉지를 들고 오는 딸과 밤 산책을 하고 들어오는 남편을 보며 그녀가 우두커니 서있는 채로 소설은 끝이 났다. 그녀는 망가진 몸을 이끌고 밤 산책을 다니는 남편에게 화가 치밀었지만 “한 번도 꽃 피우지 못한 멜로칵투스 화분이 끝내 제자리에 놓여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서술이 그녀의 성정을 대변한다. 혼자 가정을 지켰고 무책임한 남편을 미워하면서도 끝내 그 가정을 스스로 파괴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어쩌면 손자의 출생의 비밀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기에, 너무나도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까마귀 소년>의 주인공은 야시마 타로의 그림책 <까마귀 소년> 속 이소베 선생님 같은 어른이 제게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집에서 돌보며 닭갈빗집에서 철판 닦는 일을 한다. 주인공은 까마귀 소년이 되고 싶다. 가출팸에서 생활하던 열일곱 은주를 집으로 데려와 같이 살았다. 엄마와 은주는 그에게 가족이었고 어떻게든 그들을 지키고 싶었다. 그는 까마귀 소년이 되고 싶다.

어느 날 은주가 사라진 뒤 뉴스에 나왔다.

식물인간 엄마가 방치된 집에서 동거해 임신까지 한 십대, 생활고는 성매매로

십대 소년이 지키고 싶었던 가정은 저리도 쉽사리 한 줄 요약되었다. 아이가 생겼지만 수술할 거라는 은주의 문자를 받은 소년은 까마귀 소년이 되기로 했다.

소설의 처음과 마지막은 아파트 옥상 난간에서 까마귀 울음 소리를 내는 소년의 모습으로 수미상관을 이룬다.

까아아악 까아악.

이제 그것은 죽음을 애도하는 레퀴엠

소년은 이소베 선생님을 떠올리며 간절하게 입을 벌렸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길 바라며 날개를 힘껏 휘저었다.

돌봄을 받아야 할 나이에 보살펴야 할 사람이 생긴 소년은 열심히 살았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학교를 다닌 이유는 이소베 선생님 같은 선생님이 그곳에 있을 거라는 일말의 기대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은주가 떠나고 아기마저 지울거라는 말을 듣고는 엄마에게 안녕을 고했다. 십대 소년의 어깨에 놓인 짐이 너무나 무거웠던 것이다.

까마귀가 되어 비행하려고 한 소년은 정말이지 땅꼬마(책 까마귀 소년의 주인공)가 되고 싶었다. 이름 없고 존재조차 미미했던 땅꼬마는 이소베 선생님의 관심으로 까마귀 소년으로 불리게 되었다. 소년에게 이소베 선생님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옥상으로 올라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레퀴엠이라는 단어까지 등장했기에 소년은 뛰어내렸을 것이다.

첫 소설 <선인장 화분 죽이기>의 주인공은 화분을 죽이지 않았지만 소년은 죽음을 택했다. 60년 넘게 산 여성은 힘들긴 해도 돌봄이 익숙하다. 허나 남자 고등학생에겐 아니다. 사회적 돌봄의 손길이 필요했던 소년은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이었으나 잊기 위해 까마귀 소리를 내보았다. 그리고 까마귀 소리를 누군가 듣길 바랐다.

소년은 진짜 옥상에서 뛰어내렸을까. 나는 아니길 바랐다. 더 이상 현실을 버텨내기 어려울지라도 살아있길... 어쩌면 소년의 까마귀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결말이었으면 했다. 철판을 닦느라 엉망이 되어버린 손에 바르라고 촉촉한 핸드크림을 하나 사 주고 싶다.

두 소설을 소개하다보니 이 소설집이 너무 어둡지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사족을 붙인다. 그저 달콤한 맛을 원한다면 이 책을 추천하지는 않겠다. 우리네 삶이 늘 달콤한 것도 또 쓰기만 한 것도 아니다. 해피엔딩을 꿈꾸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번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고개를 들었을 때 당신 눈에 비치는 낯 모르는 사람을 따스한 연민의 눈길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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