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아는 풀꽃 향기 - 나태주 시인이 딸에게 보내는 편지
나태주.나민애 지음 / &(앤드)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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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편지글을 좋아한다. 작년에 모자가 주고받은 서간문 <그 편지에 마음을 볶았다>를, 이번에는 부녀 사이의 편지글을 읽었다. <나만 아는 풀꽃 향기>는 시인 나태주와 문학평론가 나민애가 주고받은 편지다. 전자는 아들의 진로 문제를 주제로 전체가 편지글이었고, 이 부녀간의 편지는 나태주 시인의 개인사를 엿볼 수 있었다. 주고받은 편지는 부록으로 마지막에 수록했고 3장에 실린 나태주 시인과 나민애 평론가의 에세이는 부녀간의 애정을 과시했다. 분량은 3대1 정도로 나태주 시인의 에세이가 많았는데 딸을 향한 사랑이 담뿍 담겨있다. 시인과 문학평론가라는 수식을 떼고 보자면 여느 집 부녀와 별다를 것 없을 이야기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질투심이 솟았다. 어느 서평가의 남이 잘 쓴 글을 보면 속이 뒤집힌다는 고백과 같은 심정이면 좋으련만, 그건 아니다. 나는 그이의 발가락 때 만도 못한 수준으로, 그저 끄적이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속 좁은 내 성정을 표현할 말조차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는 주제에 저렇게 부모자식 간에 편지를 주고 받은 걸 보니 그냥 부러워 죽겠는거다. 어느 어머니가 아들이 힘든 길을 가겠다는데 냉큼 그러라고 하겠는가. 어느 아버지가 딸을 귀히 여기고 아까워하지 않겠는가. 모든 부모는 다 그러할진대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 내는 이가 있고 그렇지 않은 이가 있는 것이다.


마음은 굴뚝 같아도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아무런 결과가 없다. 어느 정치인 때문에 항간에 유행어가 되어버린 말,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내게 똑 맞다. 올해 친정아버지 팔순을 맞아 재작년부터 생각해온 것은, 아버지의 삶을 글로 옮겨보자는 것이었다. 생각만 했지 어영부영 2021년을 보내고 작년 이맘 때 일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 거의 잊고 지냈다. 올해 초가 되어서야 정신이 들어, 아버지와 한 달에 한 두 번이라도 만나 아버지 인생 이야기를 들어드리려고 했다. 아버지와의 데이트! 꽤 효녀 코스프레 같다는 생각에 괜스레 낯뜨거워졌지만 이 역시도 생각만 했을 뿐... 반년이 다 되도록 아무 짓도 안 하고 있다. 변명의 여지없이 게을러터진 인간이다.


<나만 아는 풀꽃 향기>를 읽으며 공감과 감동보다는 자책이 더 크게 다가왔다. 이 글을 마무리하고는 꼭 실천으로 옮겨야한다. 첫 딸인 나를 낳고 어떠셨는지, 어린 자식과 아내를 데리고 낯선 부산으로 왔을 때 아버지는 어떤 심정이셨는지, 집을 마련할 돈이 없어 천막을 치고 살았던 그 시절에 대해 이야기 들어보고 싶다. 이 책은 나태주 시인의 가난한 신혼 시절부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서 그의 시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유명세는 나에게 선입견을 심어주었다. 시인은 가난이란 단어와는 영 상관없을 거라는! 만석꾼 조부를 두지 않고서야 70~80년대 필부필부들의 살림이 넉넉할리 없었을텐데 말이다.


가난한 초등학교 선생이자 시인이었던 아버지 나태주는 딸의 성장을 하나하나 기록해 두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눈에 그린 듯 당시를 서술할 수 있었을까 싶다. 태어나던 날의 상황과 학교 다니던 내내 모범생이었던 딸, 대학원 공부와 살림과 육아에 얼마나 힘이 들지, 한마디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향한 사랑이 이 한 권에 담겨있다. 딸이라면 누구나 이 글들을 읽으며 자신과 아버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나태주 시인이 소환한 딸의 출생과 성장 전반을 자신에 대입해 볼 것이고, 사이사이 자신의 아버지가 등장하게 될 터이다. 아쉬움과 원망의 기억보다는 행복했던 시간을 추억하면 좋겠다. 독자에게 ‘나도 아버지께 편지 한 통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한다면 이 책은 충분한 값어치를 한 것이다.


시인은 가난해서 집 한칸 제대로 장만하지 못했으나 작은 것에 감동할 줄 아는 감성을 딸에게 심어주었다.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웠던 감나무 안집에서 초여름 깊은 밤을 기억하는 시인의 심상은 그저 아름다웠다.


초록빛 머금은 바람이 감꽃 향내를 머금은 채 들어오면 자고 있는 식구들을 깨워 함께 맡아 보자고 말하고 싶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소리는 자욱한 안개가 되어 떼를 지어 밀려들어 왔지만 아내는 잠은 잘 온다고 말했다.



이 책에 실린 시 중에 나는 ‘행복’을 읽으며 영화 맘마미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도나가 결혼식 준비를 하는 딸의 방에 들어가 부르는 노래 ‘Slipping through my fingers’가 오버랩 되었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한 웃음을 떠뜨리게 했지만 이 노래가 나오는 씬에서 나는 울컥했다. 딸도 없으면서 왜? 아, 또 부러워서... 딸의 머리를 빗겨줄 기회를 못 가진 아쉬움, 친구처럼 아웅다웅 티격태격할 딸이 없어서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 시를 읽으니 그 ost의 가사와 메릴스트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행복


1

딸아아의 머리를 빗겨 주는

뚱뚱한 아내를 바라볼 때

잠시 나는 행복하다

저의 엄마에게 긴 머리를 통째로 맡긴 채

반쯤 입을 벌리고

반쯤은 눈을 감고

꿈꾸는 듯 귀여운 작은 숙녀

딸아이를 바라볼 때

나는 잠시 더 행복하다


2

학교 가는 딸아이

배웅하러 손잡고 골목길 가는

아내의 뒤를 따라가면서

꼭 식모 아줌마가

주인댁 아가씨 모시고 가는 것 같애

놀려주면서

나는 조금 행복해진다

딸아이 손을 바꿔 잡고 가는 나를

아내가 뒤따라 오면서

꼭 머슴 아저씨가

주인댁 아가씨 모시고 가는 것 같애

놀림을 당하면서

나는 조금 더 행복해진다



딸이 잘 자라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고 아버지와 비슷한 일을 하게 되었으니 어찌 뿌듯하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시인이 가난했던 시절 어린 딸을 바라보며 푹 빠져있던 감성을 읽으며 대리만족했다. 아들만 둘 키운 내가 가져보지 못한 감정들을 말이다.


이젠 아버지에게 약속을 지키러 가야한다. 물론 혼자 한 약속이지만... 아버지와 손을 잡고 걸으며 도란도란 옛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 팔순잔치나 해외여행 같은 게 아닌 하나뿐인 딸과의 데이트를 선물하고 싶다. 아버지 입가에 지긋이 번질 미소를 보고 싶다.




**위 리뷰는 네이버카페 컬처블룸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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