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라는 그리운 말 - 사라진 시절과 공간에 관한 작은 기록
미진 지음 / 책과이음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집이라는 그리운 말>이라는 책을 읽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하면 뭐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지 물어보았다. 고향이라는 답이 많았고 엄마, 친정 같은 가족을 떠올리는 사람, 어린 시절, 편안함, 행복 같은 느낌을 나타내는 단어들도 있었다. 한편 아파트, 주택 같은 주거형태에 해당하는 대답이나 부정적인 정서를 드러내는 이도 있었다. 리뷰를 쓰기 전에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본 건 처음이었다. 지난 달 팟캐스트 매거진 정희진의 공부에서 정희진씨는 지인과 사과(apple)’라는 단어로 연상되는 것을 이야기해보았다며 구독자들도 한 번 해보라고 했다. 같은 단어라 하더라도 개인의 경험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으며 풍부하고 즐거운 대화가 가능할 것이라며. 나는 이라는 단어로 시도해 보았으나 단답식 답변만 나왔고 길게 이야기를 끌어나가지는 못했다. 대부분 내 또래의 여성들이라 그런지 엄마와 편안함이라는 낱말을 연결지어 말한 사람이 많았으나 정반대로 책임과 의무만 남은 시댁이나 친정을 떠올리는 이도 있었다.


<집이라는 그리운 말>이라는 책을 쓴 미진 작가는 집에 대한 어떤 추억이 있기에 그리워하는지 궁금해하며 책을 펼쳤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너무나 사소해서 일기장에 간직할 법한 이야기지만 사람들 앞에서 두 손 모으고 정성들여 노래하는 어린아이처럼 기록했다고 썼다. 그랬더니 사소한 기억이 물 먹은 종이처럼 부풀어 기쁜 일도 슬픈 일도 하나가 되더라고 했다. 나는 그의 기록들을 읽으며 내 어린 시절과 겹치는 정서가 많아서 놀라웠고, 내가 가보지 못한 그 시절 서울 중구 일대를 둘러보았다. 작가는 일기로 간직하면 그만일 사소한 글을 굳이 책이라는 형태로 낼 필요가 있을지 저어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지극히 개인적 기록이 독자에게 낯익은 생경함을 줄 수 있다. 이 책은 개별성이 품고 있는 보편성이 어떤 것인지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작가가 어렸을 때 살았던 서울 중구 만리동은 소설 <아홉 살 인생>의 여민이가 살던 동네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단 여민이네 산동네 사람들이 악다구니 치던 모습보다는 귀엽고 따뜻해 보였다. 작가의 어린 시절 만리동은 푸근했던 모양이다. 친구와 동네 사람들의 에피소드를 읽으며 내 어렸을 때가 오버랩되었다. 우리 엄마는 꼭 내가 TV 만화영화 <캔디>를 보고 있을 때 옥상에 가서 빨래를 걷어오라고 시켰는데 이거 다 보고 할게!”라며 짜증을 부렸던 기억,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을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즐겁게 만들었던 기억 등등...


책 제목에서 지칭하는 은 단순히 작가가 살았던 집의 추억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동네 전체, 학교, 교회, 친구들,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기억이었다. 이사를 하고, 집을 짓고,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임대인에서 임차인이 된 경험까지, 작가의 지나온 시간들에 대한 회상이었다. 그 시간들을 관통하는 큰 줄기가 집이고 작가는 그 시간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운 시간 속에서 가장 애틋한 이는 바로 작가의 친정 엄마다. 우리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모두 좋기만 한 것은 아니고, 어떤 기억은 몹시도 자의적으로 왜곡되기도 혹은 윤색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래 내용은 작가의 엄마에 대한 감정이 잘 드러난 부분이라 인용한다.


p.196


엄마를 생각하는 내 얼굴에는 늘 행복, 슬픔, 분노, 그리움이 조금씩 섞여 있다. 행복의 순간에 불현듯 두려움과 슬픔, 분노 같은 감정이 소리 없이 밀려오듯, 검은 하늘에 박힌 별처럼 이름 모를 무수한 감정이 잘게 부서진다. 문득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 가는 엄마의 걸음걸이가 떠올라 웃음보가 터지다가도, 젊은 시절 출근길에서 부닥친 엄마의 깜짝 등장에 반가워지다가도,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고 마음에는 서러움과 분노가 서로 싸우며 으르렁댄다. 그렇게 한바탕 다 울고 나면 다시 푸른색 그리움이 꼬리를 휘젓는다. 젊음에 겨워 눈부신 천 개의 얼굴이 세월을 타고 넘으면 한 개의 엄마 얼굴이 된다.


작가는 악착같이 부지런하게 살았던 엄마를, 이젠 떠나보낸 지 20여 년이 된 엄마를 떠올리며 자신의 얼굴에서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운 엄마의 얼굴을 한 채로는 낯부끄런 행동은 하지 않을 성 싶다. 작가가 그리워하는 집이 사실은 엄마가 아니었을까. 본문 마지막 문단에서 작가는 이렇게 썼다.


"내게 단 한 번 시간을 얼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엄마의 손길을 얼리고 싶다. 그리고 아주 힘든 어느 날 따뜻한 햇볕에 녹여 만지고 싶다. 그럼 그 기억을 가슴에 품고 남은 시간을 또 마냥 철없이 조금은 뻔뻔히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동네 사람들이 가족 같았던 시절, 예전 만리동, 아현동 일대의 모습들, 특히 돌아가신 친정엄마가 그리운 사람들이 읽으면 자신의 기억들이 자연스레 떠올라 미소를 머금게 될 것이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