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흄세 에세이 1
알베르 카뮈 지음, 박해현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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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가 20대 때 쓴 서정성 짙은 에세이라는 소개에 이끌려 서평단에 신청했다. 카뮈에 대한 호불호는 없다. 얼마 전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두 편을 읽으면서 불어를 안다면 원서로 읽는 맛은 어떨지 궁금했다. 그래서 카뮈의 에세이라기에 불어 번역일 것이니 한 번 읽어보고 싶었다. 책을 받고 감각적 디자인과 콤팩트한 그립감이 마음에 폭 들었다. 그러나 본문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당황했다. 스스로를 지탄했다. 카뮈의 소설이라고는 <이방인> 한 권 밖에 읽지 않은데다 불어도 모르는 주제에 번역본에서 카뮈 문체를 뭐 그리 느끼겠다고 서평단에 신청했는가. 또 책 욕심이었던 게지...

해설 포함 100여 쪽 밖에 되지 않는 책을 몇날 며칠 들고 있었다. 알제리 북부 도시들의 화려한 색감과 향취, 바다에서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헤엄치는 사람들의 묘사는 단숨에 나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한숨도 같이 새어나왔다. 과연 내가 서평을 쓸 수 있을까? 카뮈의 감각적 표현에 감탄은 해도 서평은 어불성설이다. 내가 무슨 수로 그의 글을 평가한단 말인가. 일독 후 역자의 해설을 읽어보았다. 해설조차 단숨에 이해되지 않았다. 김화영 선생으로부터 카뮈문학을 배웠고 평생을 불어와 관련된 일을 한 전문가의 시선을 좇기엔 내가 카뮈에 대해 일자무식이니 당연했다. 그래서 서평은커녕 독후감이라도 제대로 쓰면 다행이라 생각하고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부끄럽지만 자신 있게 쓴다. 재독 삼독을 해보아도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에세이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감히 이 말은 할 수 있다. 책이 얇다고, 에세이라 해서 함부로 선택할 책이 아니라고! 카뮈의 일생과 문학관에 대해 공부하고 그의 소설들을 읽은 연후에 읽는 것은 말리지 않겠다. 무슨 서평도 아니고 독후감도 아닌 것 같은 이 따위 글의 서두가 이다지도 기냐고 비난해도 할 말이 없다. 이 글이 카뮈의 <결혼>이라는 에세이를 읽은 소감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변명을 길게 했다. 카뮈의 아름다운 문장을 알리고 싶어 소감보다 본문 발췌를 많이 했는데 이 역시 궁색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티파사에서의 결혼]

첫 문장 - “봄이 오면, 티파사에는 신들이 강림해서 수런거린다.”

책의 제목이 결혼이고, 이 에세이의 제목에도 결혼이 들어가기에 내용에서 인간의 결혼식 장면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단순무식한 예측이었다. 네 편의 에세이 중에 이 첫 에세이가 가장 젊음이 꿈틀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티파사라는 곳을 찾아본 후 다시 읽어보니 한층 더 감각적으로 다가왔다. 바다를 향해 열린 마을 이곳저곳의 피어난 알록달록한 꽃들과 내음, 카뮈의 그곳 사랑이 느껴졌다. 그곳 자연과의 결혼이 그가 말하는 결혼이 아닐까... 내가 그렇게 생각한 문장들을 옮긴다.

p.13

나를 송두리째 휘어잡는 것은 저 자연과 바다의 위대하고 자유분방한 사랑이다. 이러한 폐허와 봄의 결혼 속에서 폐허의 잔해들은 다시 돌이 되어 인간의 손길이 낸 광택을 지워버리면서 자연으로 회귀했다. 그 방탕한 딸내미들의 귀환을 맞아 자연은 아낌없이 꽃을 피워놓았다.

p.23

태양과 바다로부터 태어나서 활달하고 풍류를 즐기고, 단순함 속에서 위대함을 길어 올리고, 해변에 똑바로 서서 저 하늘의 찬란한 미소에 공모의 미소를 던지는 종족이 있었다. 나는 그 종족 전체와 더불어 세계와 나 사이의 사랑을 공유하기로 의식했고, 거기에 자긍심을 느꼈다.

[제밀라의 바람]

첫 문장 - “정신 자체를 부정하는 어떤 진실은 그 정신이 죽는 장소에서 태어난다.”

카뮈가 제밀라를 돌아보며 쓴 이 글을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제밀라는 정복자들이 세운 문명의 표식을 가진 곳이지만 하늘 속에는 정복과 야심의 표식을 새겨놓지 못했다고. 그가 오래전 제밀라에서 생각한 것을 읽으며 지금의 나, 우리의 모습에 대입해 생각해 보았다.

p.33

사람은 익숙한 몇몇 생각들을 품고 살아간다. 기껏해야 두세 가지 생각이다. 어쩌다 이런저런 사회와 사람들을 만남에 따라 그 생각들을 닦고 손본다. 진짜 자기 것이라고 내놓고 말할 수 있는 생각을 확보하기까지 10년은 걸린다.

☞ 요즘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만나면 맨 옛날 얘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가 잘 아는 것만 이야기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다른 사람을 만나 자신의 생각을 손보는 이는 얼마나 될까? 가짜뉴스에 휘둘리고, 전문가입네 하는 이들에게 현혹된다. 카뮈는 진짜 자기 것이라고 내놓을 만한 생각을 확보하는데 10년은 걸린다고 했다. 요즘 책 안 읽는 성인이 절반이 넘는다는데, 학자가 아닌 일반인이 학교 졸업 후 진짜 자기 생각을 확보하려는 노력이나 할까? 최종 졸업 학교 이력으로 평생을 잘 우려먹고 살 수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익숙하지 않은, 전혀 다른 새로운 생각들을 만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알제의 여름]

첫 문장 - “흔히 우리는 어떤 도시와 은밀한 사랑을 나눈다.”

카뮈는 프랑스인이지만 알제리에서 태어났다.(1913년) 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 중 전사했고 청각장애인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알제리의 아름다운 자연과 유년시절의 가난한 일상은 카뮈 작품의 뿌리가 되었다고 한다. [알제의 여름]은 그곳 사람들의 삶이 잘 드러난 글이란 생각이 든다. 태양이 작열하는 8월에 바다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의 피부빛이 달라지는 모습, 이른 나이에 결혼하고 서둘러 노동하고, 10년 만에 일생의 경험을 다 맛본다는 벨쿠르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가본 적 없는 그곳 사람들이 가깝게 다가왔다.

p.60

인류의 죄악이 득실거리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그리스인들은 맨 마지막에 가장 끔찍한 죄악인 희망을 꺼냈다. 나는 그보다 더 감동적인 상징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희망이란, 통념과는 달리 체념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다는 것은 스스로 체념하지 않는 일이다.

☞ 산다는 것은 스스로 체념하지 않는 것이란다. 희망과 체념이 같은 것이라면서... 요즘은 희망이니 낙관이니 이런 말들을 쓰기 어려운 시국이다. 파국으로 치닫는 것 같아 절망적이다. 희망을 가지고 살자는 말보다 “산다는 것은 스스로 체념하지 않는 일이다.”라는 문장이 더 위로가 되었다. 불어로 어떻게 쓰였는지 궁금하다.

[사막]

첫 문장 - “산다는 것은, 당연히, 어찌 보면 표현한다는 것의 반대쪽이 된다.”

카뮈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에게 바친 글로 피렌체 여행기이다. 미술작품 해석과 토스카나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프란체스카 수도원에 들렀다 피렌체로 돌아오는 여정, 그리고 피에솔레와 제밀라를 햇빛 속의 항구로 연결한다. 네 편의 에세이 중에 가장 이해가 어려운 글이 [사막]이었다. 그런데 아래 발췌 문장들은 어디선가 자주 인용된 것 같은데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p.70

영혼의 불멸성은 실제로 고상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진실이 육체인데도, 그 진수를 다 맛보기도 전에 거부하기 때문에 영혼의 불멸성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불어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졌다. <이방인>을 읽을 때 전혀 들지 않았던 마음이다. 허나 이 나이에? 잘 번역된 카뮈의 다른 작품들을 읽는 것이 먼저다. 이런 맘을 품은 나를 마감 임박한 서평단 책과 읽고 싶어 사둔 책들이 째려보고 있다.





**위 리뷰는 네이버카페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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