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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숨
김혜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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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랑한다’는 낱말을 사용할 때, 그 대상은 보통 이성을 일컫는다. 대부분 이성애를 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말은 곧 동성애는 비정상적이며, 이성끼리의 관계는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는 뜻도 내포한다. 김혜나 작가의 소설집 <깊은 숨>을 읽으며 아주 오래전에 내가 의문을 품었던 문제를 떠올렸다.
‘남녀 간에는 친구가 될 수 없나?’
‘남녀가 사랑하면 꼭 섹스를 해야 하고, 결혼을 해야 사랑이 완성되는가?’
20대 초반에 천착했던 문제였고, 해답을 구하지 못한 채 이른 나이에 결혼했다. 육아와 가사노동에 절어있던 시기에 그런 문제를 떠올리는 건 사치였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는 하루하루를 무사히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세월을 지냈다.
<깊은 숨>에 수록된 일곱 편의 소설 주인공은 20대에서 50대의 여성이다. 크게 보면 사랑이 소재다. 동성애를 포함하며 이성이라해서 섹스를 포함하는 관계는 아니다. “레드 벨벳”과 “코너 스툴”은 남녀 관계에서 친구란 성립할 수 없는 것인가를 묻는다. 두 소설의 여자 주인공은 비슷한 일을 하는 남성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영혼이 통한다는 것을 느끼며 충만함을 느낀다. 그런데 여성이 싱글이고 남성이 유부남일 경우, 그들은 불륜이 된다.
“레드 벨벳”의 영어 강사 해럴드는 아내가 있다는 이유로 주인공과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길 거절한다. 주인공이 불륜을 하자고 한 게 아니었다. 영문학 번역 및 토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해럴드의 행동을 주인공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대면 만남을 피하면서도 주인공에게 그녀의 영어 실력이 향상되길 바라는 자료를 우편으로 보냈다.
해럴드가 학원을 그만두기 전 마지막에 사용한 수업 교재는 엘리자베스 버그의 <아서 씨는 진짜 사랑입니다>라는 책이었고, 그녀에게 전자책 파일을 보내주었다. 주인공은 어리둥절했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는 어디까지가 친구이고 어디서부터 연인일까? 사람들은 애초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친구 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모든 인간과 인간이 언제나 연애 감정을 가지고 누군가를 만나고 있다는 말인가?’ -p.236~237
내가 예전에 궁금해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을 소설에서 만났다. 위 질문에 대한 답으로 작가는 10대 소녀와 여든 다섯 살 할아버지의 만남을 다룬 이야기를 집어넣은 것 같다. <아서 씨는 진짜 사랑입니다>가 밀리의 서재에 있기에 바로 다운로드 받았다.
“코너 스툴”의 주인공 소설가 이오진 역시 책방지기 박호산과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나누었고 만족스러웠다. 호산은 자신이 쓴 습작 소설을 오진에게 한 번 읽어봐 달라고 해서 두어 번 만남이 이루어졌으나 호산의 아내가 둘의 관계를 오해하게 된다. 그녀가 보낸 편지를 본 아내가 오진을 불러 이렇게 말한다.
“아이, 씨발. 진짜 이 개 같은 년이 어디서 자꾸 호산 씨래? 야, 어디서 감히 남의 남편을 함부로 만나고 이딴 걸 써서 보내? 왜 남의 남자한테 수작을 부려? 어?”
오진은 그런 거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고, 이렇게 생각했다.
‘박호산씨를 남자로 대한 적이 없다고, 나는 그와 연애하고 싶은 게 아니라고, 나는 그를 남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인간으로, 나와 같은 존재로, 나와 같은 영혼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라고, 그게 다라고 말하고 싶었어. 그리고 나는, 나는... 레즈비언이라고 말하고 싶었어.’
“오지 않은 미래”에서도 애인이 있는 남자와 만남을 회피하려는 주인공이 나온다. 그 남자가 주인공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셋이 만나고 있는 동안에 커플 진수와 민서가 주인공 여경에게 스스럼없이 대하고 진수가 여경의 글을 좋아한다고 대놓고 말한다. 여경은 부다페스트에서 진수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거리감을 두려고 노력했고, 한국에 돌아와 셋이 같이 만났을 때도 그 만남을 얼른 끝내고 싶어 한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여경의 행동은 몹시 조심스럽다. 상대 커플이 부부관계가 아님에도, 커플의 여성, 즉 민서가 여경을 경계하지 않음에도, 여경이 먼저 철벽을 친다. 이상한 시선을 받게 될 것을 우려한 본능적 행동이다.
이 소설들을 읽으며 인간관계의 협소함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남녀 간의 만남은 사랑과 섹스뿐이라는 단순성은 언제부터 만들어진 걸까. 오랜 시간 재생산 되어온 미디어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사랑의 원형처럼 읽히는 소설들로 인해 우리 인식에 자리 잡은 것이란 생각이다. 내 생각엔 원조 러브스토리로 “로미오와 줄리엣”, “마담 보바리” 같은 불륜 소설이 대표주자인 것 같다. 예전에 비하면 요즘은 다양한 소재의 소설이나 영화가 나오고 있지만, 사랑을 소재로 한 것들은 여전히 대중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남녀가 만나면 사랑하고, 섹스하고, 결혼하거나, 불륜인 내용들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김혜나 작가는 이 소설집을 통해 인간애를 말하고 있다. 이성끼리 만나서 사랑만 하는 건 아니라고. 배우자가 있는 사람과 만나면 죄다 불륜인 것은 아니라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소통하고 마음을 나누는 관계도 있다고. 사랑조차 이분법적인 세상에서 작가의 이야기가 소설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치부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가가 말하는 인간애가 성별 구분이 없어지길 바란다. 나도 마음 터놓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좋겠다. 남자여도 여자여도, 나이가 많건 적건 상관없다. 공통 관심사로 손뼉치며 웃고 떠들고 밤새도록 이야기 하고 싶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