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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스퀘어
안드레 애치먼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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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은 봤지만 소설은 읽지 못했다. 그래서 김영사에서 출간한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의 작가 안드레 애치먼의 소설 <하버드 스퀘어>를 읽게 되었다. 작가는 1951년 이집트에서 태어났으나 반유대주의를 비롯한 정치적 문제로 1965년에 가족 전체가 고국에서 추방당한 후 로마를 거쳐 뉴욕에 정착했다. 이번 <하버드 스퀘어>는 그의 자전적 소설이다. 실제로 하버드에서 약 7년간 학업에 정진하던 애치먼은 전문적인 연구가 오히려 문학에 대한 개인적인 사랑을 짓누른다고 느끼고 학교를 떠나 증권사에 입사했다가 되돌아와 비교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스스로 ‘하버드에서의 나날은 증오와 사랑의 시간’이라고 밝혔듯, 자기애와 자기혐오가 뒤섞인 청춘의 기록이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소설 주인공은 아들과 캠퍼스 투어를 위해 하버드에 왔다가 지난 날의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1977년 여름, 이집트 유학생이던 ‘나’는 종합시험 재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도서관 알바, 프랑스어 과외로 바빴고 하버드에 적응하느라 더웠던 나날들이었다. 카페 알제에서 ‘칼라지’라는 아랍인을 만나며 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프랑스어를 쓰는 아랍인과 유대인의 만남은 신선한 충격과 동시에 동지를 재회한 듯했다. 택시 운전사와 아이비리그 대학생의 조합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둘은 자연스레 어울리게 된다. ‘대화는 인간이 다른 인간과 함께 있을 때 즐기는 것이자 자연스러운 것이고, 일요일 오후에 사람들은 대화하고 웃고 커피를 마시며 산다는 것’을 잊고 살던 시절이었다.
‘나’는 칼리지를 닮고 싶고 좋아하면서도 이질감을 허물기 어려웠다. 그러면서도 이방인이라는 동질감의 자장 안에 있었다.
p.74
나는 그를 부러워했다. 그에게서 배우고 싶었다. 그는 진정한 남자였다. 나는……. 나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그는 목소리였고, 내 과거와의 잃어버린 연결고리였으며, 내가 다른 길을 택했다면 나의 롤모델이 되었을 사람이었다. 그는 야성적이었지만 나는 길들여지고 억눌려 있었다. 그런 누군가 나를 강력한 용액에 담가서 내가 학교에서 배운 모든 습관과 미국에서 양보한 모든 것을 내 피부에서 벗겨낸다면 내가 아니라 그가 발견될 것이다.
p.96
우리 둘 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내겐 버티고 설 땅이 있었고 그는 언제나 방랑자였다. 내게는 영주권이, 그에게는 운전면허증이 있었다. 그는 날마다 벼랑 끝에 서 있었지만 나는 벼랑 밑을 내려다봐야 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게는 그 심연을 가릴 담장이나 생울타리가 항상 있었던 반면 그에게는 그런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 한편 또 다른 차이도 있었다. 그는 그 벼랑에서 물러서서 살아나올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벼랑과 나 사이에 그를 세워놓았다. 그는 내 가림막, 내 스승, 내 목소리였다. 어쩌면 내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추구했던 삶이 그의 삶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칼라지의 이민국 인터뷰 준비를 도와주던 장면과 월든 호수 피크닉은 칼라지의 엉뚱한 매력을 드러낸다. 조르바와 체게바라가 여실히 오버랩되는 장면이었다. 주인공이 감탄했던 칼라지의 문장들은 프랑스어였다. ‘옆방에선 아무도 자지 않는다’와 ‘이 집에선 아무도 음악을 듣지 않는다’가 절묘하게 대구를 이룬다고 했는데, 한글 번역본이므로 프랑스어의 맛을 느낄 수 없어 살짝 아쉬웠다. 시처럼 보였던 그 글은 이민국 직원들이 할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써둔 것이었다.
그해 여름, 주인공은 자신의 이율배반적 감정이 혼란스러웠다. 카페 알제에 가면 언제든 만날 수 있고 어떤 이야기든 나눌 수 있는 친구지만 하버드의 구성원으로 자리잡아가면서부터 서서히 그를 피하기 시작한다. 새 여자친구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엔 우연히라도 마주치기 싫었다.
p.303
나는 그를 부끄러워했고, 그를 부끄러워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가 속물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우리의 공통점이 열악한 경제 형편 말고도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들키는 것이 부끄러웠다. 내가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게 ,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은 저급한 카페에서 어울리기 좋아하는 극빈자 정체성뿐이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급기야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나’는 칼라지와 마주칠까봐 두려워하고 변명거리를 걱정하는 상황에 지쳐갔다. 그를 떨쳐내지 못하면서 그와 엮일까봐 걱정하는 자신이 싫었다. 운전면허가 정지된 칼라지를 프랑스어 시간강사 자리에 소개해 일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 집에서 살게 되고 그의 직장까지 주선해주었으면서도 사적인 영역이 침범당하고 점령당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런 양가감정에 괴로워하다가 결국은 칼라지가 미국을 떠나던 날 그를 배웅하러 가지 않았다.
p.372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고 싶었던 것은 눈물의 작별이었다는 끔찍한 사실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나는 그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울고 싶지도 않았다. 포옹도 싫었고, 야단스러운 약속도 싫었고, 슬픔을 과장하는 피상적인 말도, 비참한 기분도 싫었다. 깨끗하고 태연하게 작별하고 싶었다. 나는 완전히 구제불능으로 가식적인 인간이었다.
칼라지가 자신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며 다른 사람을 통해 작별인사를 대신 전해 받으면서 ‘나’는 수치심과 슬픔 사이에 오가는 격통을 느낀다. 한편 안도감과 해방감도 동시에 느끼는데 결국 이러한 양가감정은 칼라지를 만나고 헤어지는 내내 지속됐다.
아들과 입학처를 나오며 그해 여름 하버드 광장의 추억에서 빠져나온 ‘나’는 그 때가 좋은 시절이었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뜨거운 여름날 청춘의 시절을 회상하는 일은 심장이 간질거리면서 뻐근하고 애틋했다. 함께 한 시간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해서 무어라 단정 짓기 힘든 감정이었는데 이제와 돌아보니 그건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마지막 문장은 프랑스어로 끝난다. ‘칼라지’와 ‘나’의 대화로.
“자네가 날 찾아내서 정말 다행이야. 난 잘 지내. 딸이 둘 있지. 좋은 추억을 갖고 있고. 사랑해.”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그 어떤 첨언보다 이상은의 노래 가사로 리뷰를 마무리 한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