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저쪽 밤의 이쪽 - 작가를 따라 작품 현장을 걷다
함정임 지음 / 열림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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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여행에 목마른 사람, 누군가와 소설 이야기를 실컷 하고픈 사람, 새로운 작가나 책을 소개받고 싶은 사람, 아니 이 모든 것을 한 방에 해결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 책 <태양의 저쪽 밤의 이쪽>을 주목하라!

      

일석 이조, 삼조가 가능하다고?

가능하다!

책 한 권으로 위를 모두 이룰 수 있다.

 

소설을 쓰고 여행을 하고, 여행을 다녀와 에세이를 쓰는 함정임이기에 가능했다. 우리는 독자로서 누리기만 하면 된다. 에필로그에서 한 작가의 말이 격하게 반가웠다.

   

p.337~338

 

작가와 작품을 쫓아 지구를 돌고 돌면서, 태양과 바람, 별과 구름이 함께했다. 어느 글은 태양의 저쪽에서, 또 어느 글은 밤의 이쪽에서 썼다. 오래 품어 쓰고 보니, 제목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국겅의 남쪽, 태양의 서쪽>의 흐름 속에 있다 

글쟁이로 살면서 소설이 소설을 낳고, 책이 책을 낳는 경우를 목격해왔다. 글쟁이들은 글로 대화하고, 글로 고백하고, 글로 추모한다. 이보다 더 황홀하고 숭고한 일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 리뷰를 읽고 책을 읽으려는 이들에게 에필로그를 먼저 읽길 권한다. 이 책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지도와 장소와 작가와 작품에 대한 맛보기를 먼저 하고 기대어린 심정으로 목차를 열어보시라! 1부에서 4부까지 챕터의 제목을 보고 어떤 이는 작가 이름이 눈에 먼저 들어올 것이고 어떤 이는 장소가 보일 것이다. 그렇다. 자신에게 먼저 닿은 것부터 읽으면 된다. 가보았던 곳 중 좋은 기억이 남은 곳의 페이지를 펼친 사람은 같은 장소임에도 분명 새로운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의 시각으로 그 장소와 소설을 연결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때문이다. 마치 새로운 장소를 여행하는 기분이 된다. , 각 장소마다 사진도 첨부되어 있어 상상으로 하는 여행에 구체성을 부여해 줄 것이다.

 

 

나는 플로베르의 루앙을 먼저 펼쳤다. 프랑스에 가보지 못했지만 내게 프랑스의 이미지는 인상파 화가들이 심어주었다. 루앙은 모네의 "루앙 대성당 연작"으로 만났다. 모네나 르누아르의 그림으로 만난 프랑스는 눈부신 자연과 사랑스런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루앙은 플로베르와 모파상과 아니 에르노의 도시다.

 

이 챕터에서는 주로 플로베르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래전 플로베르 문장의 아름다움에 열변을 토하던 어떤 교수님의 추천으로 <보바리 부인>을 읽었지만 사실 문장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플로베르에 대해서는 아예 모르는데 이 챕터에서 플로베르의 삶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준다. 조부와 아버지, 형이 의사였기 때문에 <보바리 부인>의 남편이 의사였고 자신이 살았던 동네가 비슷하게 서술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십여년 전 루앙 대성당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기에 이번에는 이틀에 걸쳐 플로베르의 족적만 쫓았다. 그가 태어난 사립병원의 사택과 평생 칩거하며 글을 썼던 루앙 외곽 센강 변의 크루아세 별관, 그리고 루앙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모뉘망탈 공동묘지에 있는 그의 묘도 찾았다.

 

p.150

 

19세기 중반에 쓰인 <마담 보바리>20세기를 넘어 21세기에도 더욱 왕성히 살아나는 것은 바로 작가가 극도의 고통 속에 구현한 스타일의 창조와 함께 '보바리즘''모방 욕망'이라는 현대인의 심리를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마담 보바리의 비극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세상에는 지금도 무수한 마담 보바리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사방에서 매 순간 그들의 욕망을 사로잡는 홈쇼핑 상품들이 즐비하다. 단 몇 초, 버튼만 누르면 욕망은 실현된다. 그러나 최신 유행으로 치장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사용한 사채 빚에 쫓기고 쫓기다가 결국 비소를 마시고 피를 토하며 처참하게 삶을 마감하는 마담 보바리의 최후는 낭만적 몽상과 삶의 서늘한 진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21세기 도처에서 숨쉬는 마담 보바리들에게 19세기 작가가 던지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처럼 루앙과 플로베르와 보바리 부인을 현재까지 연결시키는 글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다. 장소와 소설가와 작품 이야기가 지금의 나를 만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서두에 밝혔듯 독자의 눈에 먼저 들어오는 제목부터 읽어나가면서 반가워 하다가 새로운 정보와 사고의 확장이 만족감을 줄 것이다.

 

나는 소설을 제법 읽었고 작가도 많이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만이었다. 이 책에서 몰랐던 작가를 여럿 소개받았다. 그중 이장욱이라는 작가에 관심이 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도스토옙스키와 고골과 이장욱을 만났다.

p.288  

 

이장욱은 러시아문학 전공자다. 그의 소설집 <고백의 제왕><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수록된 소설들에서 두 가지 특징을 주목할 수 있다. 한 가지는 고골과 도스토예스키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장소애(場所愛)와 공간에 대한 적확한 제시와 묘사이고, 다른 한 가지는 누군가의 생애를 마치 어느 시기 같은 공간에서 동고동락했던 피붙인 친구의 그것처럼 가깝게 당겨 들려주거나 복원해주는 것이다. 이 둘은 모두 고유명과 관계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공간, 이반 멘슈코프(<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 정귀보(<우리 모두의 정귀보>), 하루오(<절반 이상의 하루오>) 같은 인물들의 생애 그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작가를 소개받으면 그의 소설을 읽어보지 않을 수 없다. 다른 독자들은 나와는 다른 인물이나 장소에 꽂힐 것이다. 읽다가 인덱스를 붙이거나 책을 검색해 볼 게 분명하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 책 맨 뒤에 '참고 및 인용 도서'에 모두 실려있는데 나는 그걸 모르고 메모를 했다. 그만큼 읽어보고 싶은 책이 많았다.

 

 

<국경의 밤>으로 유명한 시인 김동환의 딸 김지원과 김채원이라는 소설가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함정임은 마지막 챕터에서 김지원과 김채원과 아니 에르노를 밤낮없이 기웃거리고 기미를 살폈다고 썼다. 평생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을 알고 싶어서.

 

 

"소설이 줄 수 있는 것, 소설이라는 장르가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것이란 무엇일까. 맑고 투명한데, 찌르듯 아프고, 아프면서 아름다움에 몸을 떨게 만드는 힘. 그녀를 처음 보았던 순간부터, 소설을 읽고 쓰기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도록 단 하루도 그것 없이 살아오지 않은 내게, 김채원의 소설은 처음의 그 순간으로 돌아가 묻는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그보다 작가란 무엇인가."

 

김채원의 <쪽배의 노래>로 그의 집에 초대받았다고 표현한 함정임 작가는, 정작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멀리서 마음껏 흠모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쓴 글은 김채원에게 한 뒤늦은 인사요, 부끄러운 고백이라고.

 

 

나도 이 책에서 소개받은 소설을 찾아 읽고 그 작가의 문체에 감동하고 싶고 작가의 장소에 가고 싶다. 함작가는 지중해 서쪽의 작은 도시 세트에서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만났지만 일정에 쫓겨 기차로 이동하며 읽었다고 했다. 나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베네치아에서 우연히 발견하길 기대한다. 영화와 오페라로만 봤기 때문에 소설 원작을 읽고 싶다. 베네치아에서, 리도섬에서 그 책을 발견하면 좋겠지만 그런 낮은 확률에 기대느니 책을 챙겨가서 읽은들 어떠리. 베네치아에서 토마스 만의 아름다움을 향한 절절한 외침을 듣고 싶다.

 

 

**위 리뷰는 네이버카페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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