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스타일의 문화사 - 샌들, 부츠, 하이힐, 스니커즈에 담긴 시대정신과 욕망
엘리자베스 세멀핵 지음, 황희경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21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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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스타일의 문화사>는 역사책이다. 신발의 역사를 다룬 미시사다. 이 책은 역사 속 신발 문화를 흥미롭게 풀어냈다. 저자 엘리자베스 세멀핵이 신발전문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토론토에 있는 바타 신발 박물관의 수석 큐레이터이자 역사학자다. 캐나다까지 가지 않아도 그의 방대한 자료를 이 책 한 권으로 섭렵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그는 서문에서 신발 관련 이야기는 이 책 한 권으로는 부족하므로 20세기와 21세기 서구 사회에서 사회적 정체성을 나타내는 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샌들, 부츠, 하이힐, 스니커즈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했다. 이 책은 신발의 역사와 문화를 짚어내고 종류별, 시대별 핵심적인 신발들의 사진까지 만날 수 있다. 컬러풀한 신발 사진만 봐도 눈이 휘둥그레지며 한 번 신어보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릴 것이다. 장담한다!

이 책은 ‘슈즈 홀릭’이라면 소장각이다. 문화사나 신발 관련 공부를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럼 전공 공부하는 사람이나 신발에 집착하는 사람만 읽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역사책 읽기 좋아하는 사람, 아름다운 것을 보거나 수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추천한다. 나는 이 책을 글담 출판사 서평단 자격으로 읽게 되었다. 신발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출판사의 책 소개를 보고 바로 서평단에 신청했다.

나는 신발가게 딸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부모님께서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오면서 차린 가게는 신발가게였다. 내 기억 속에 우리 집은 늘 가난했지만 나는 신발만큼은 부자였다. 그 사실을 몰랐는데 6학년때 쯤인가 친구 집에 갔다가 알게 되었다. 그 친구가 가진 신발이 운동화 단 한 켤레 뿐이라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나는 철마다 다른 종류의 신발을 가지고 있었고, 학교를 갈 때나 외출할 땐 그 중에서 신고 싶은 신발을 골라 신었다. 그 땐 몰랐지만 TPO에 맞춰 신었던 셈이다.

 




엄마가 막냇동생을 낳을 즈음엔 내가 가게 진열장 정리를 자주 하게 되었다. 진열장 유리 선반을 깨끗이 닦고 구두나 샌들 위주를 전면에 배치했다. 어떤 신발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지 고르는 재미가 있었다.


누군가 진열장의 신발을 보고 가게로 들어오면 반갑고 뿌듯했다. 진열장 정리는 엄마를 도와드린다는 명목도 있었지만 어린 내가 신고 싶은 신발을 고르는 즐거움이 더 컸다.

성인이 되자 나는 하이힐, 펌프스, 샌들을 종류대로 색깔별로 계절별로 다르게 사들였다. 어릴 때부터 그래왔으니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교복을 벗고 옷을 자유롭게 입게 되었으나 신발 자유를 더 원했던 것 같다. 그러니 이 책 소개를 보고 관심이 간 것도 당연하다.

이제 이 책을 소개해야 할 시점이다. 그런데 온라인 서점의 책 소개가 워낙 요약이 잘 되어 있어서 내 요약은 필요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신발의 역사와 사회 문화적인 내용은 대부분 처음 알게 된 내용이라 재미있게 읽었다. 그 중 인상적이고 흥미로웠던 몇 가지를 정리한다.


 


[1부 샌들]


대공황 시대에는 전 세계 사람들이 패닉에 빠졌고 대부분 가난에 허덕였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가보다. 세상이 망했다고 난리여도 누군가는 멋을 부리고 싶고 누군가는 돈을 벌었다. 1931년 미국 ‘섀도 샌들’ 광고 문구는 이러했다.

“이례적으로 좋지 않은 올해의 상황에 맞춰...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으로 선보이므로 한두 켤레의 샌들을 마다할 여성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샌들은 일반 신발에 비해 소재를 적게 써서 만들 수 있고 대량생산이 가능하니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여기에 장기실업사태로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에게 여가를 부추기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새로운 여가’라는 이름으로 지역 해변이나 공영 수영장에 가는 등 돈이 많이 들지 않는 활동 참여를 장려했다. 오픈 토 샌들과 함께 저렴한 패션이 사랑받았고, 나아가 건강 목적으로 페디큐어까지 장려될 정도였다니 대공황 시대를 미국인들은 꽤 긍정적인 시간으로 보낸 것 같다. 여가 장려의 영향이 신발을 포함한 패션업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페라가모가 웨지힐 샌들을 최초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당시에는 몹시 혁신적인 도전이었다고 한다. 버켄스탁이 미국에서는 히피들이 유행시켰지만 처음 만든 사람은 독일인 ‘콘래드 버켄스탁’이었다. 2000년대 초반 ‘버켄스탁 진보주의자’라는 신조어가 나왔다. 이 단어는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인권운동가, 무조건적인 환경보호를 주장하는 환경 운동가처럼 반미국적 불량분자라는 이미지로 읽혔다고 한다.




위 사진의 프라다 샌들은 정말이지 한 번 만져보고 싶을 정도다.


[2부 부츠]


[1부 샌들][1부 샌들]


이 책을 읽으며 절감한 사실은, 신발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 채 신고 다녔다는 것이다. 부츠는 그저 추운 지방에서 방한용으로 만들었겠거니 했지만 부츠는 남성들의 신발이었다. 이 장의 앞부분에는 남성 부츠의 역사와 유행을 소개하고 있는데 남자들도 사치가 대단했었다. 무릎 위로 올라오는 부츠는 여성의 각선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니!




 

 


1차 대전에서 독일 군인이 신던 부츠, 미국 카우보이의 부츠, 오토바이 폭주족 부츠, 비틀즈의 부츠까지 남성들이 신었던 부츠의 역사는 재미있게 읽었다.

2장 여성의 부츠는 발에 신는 코르셋 에서는 부츠가 페티시적인 특징을 가지게 된 역사를 설명한다. 신발에도 성차별적 문화는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동안 겨울 거리를 어그 부츠가 점령한 적이 있었다. 이것도 당연히 극지방 같은 한대 기후에서 유래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호주에서 양털 깎는 사람들이 발을 따뜻하게 하려고 신었던 부츠였다. 1960년대에는 남성 서퍼들이 차가운 바다 속에서 몇 시간을 보낸 뒤 해변에서 어그 부츠를 신었다.


[3부 하이힐]


힐도 원래 남자들의 신발이었다.




특권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던 남성 힐이 루이 14세에 이르러 정치적 의미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남성 힐은 더 높아지고 두꺼워졌고 여성 힐은 가늘고 홀쭉해졌다.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이 앙증맞은 발을 더 선호하게 만들었다. 여성 힐에 왜곡된 성적 욕망이 덧씌워졌고 경멸의 대상이 되기까지 했다. 여성을 패션의 노예로 만드는 분위기로 몰아가다 점점 에로틱해졌다. 포르노 판타지를 찾다가 전문직 여성의 상징으로 보는 등 이중적인 태도는 계속 됐다.


 


그런데 하이힐이 서구의 자유와 여성의 자율성을 상징하는 기표가 된 사건이 있었다. 미국 911 기념관에 전시된 ‘피 묻은 하이힐’은 당시 여성 피해자들의 취약성을 보여주었기에 테러의 공포가 존재하는 시대에서는 힐의 인기가 사라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그 예견은 빗나갔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하이힐을 금지한다고 보도되었는데, 여성이 걸을 때 소리를 내지 않아야 했을 뿐 아니라 하이힐이 서구의 퇴폐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인 일이었다.


하이힐은 자존심이라며 나이 들어도 포기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하이힐이라고 했던 어느 여배우의 말이 떠오른다. 나도 키가 작기 때문에 20~30대 때는 7cm가 넘는 구두만 신고 다녔다. 하이힐은 내 마음의 키 높이였고, 다리 라인을 살려주는 보조제라 여겼다. 하이힐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연구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여배우가 아니기에 일치감치 포기했다. 나이 들면 편한 신발이 제일 좋더라는 말이 정답이었다. 여름이 지나고 신발장 정리를 하다가 몇 년 째 신지 않고 방치된 가죽 샌들에 곰팡이가 잔뜩 피어있는 걸 발견했다. 특이한 디자인이라서 자주 신었었는데 이렇게 외면 받고 마는구나 싶어 미안했다. 나는 신발장을 문 한번 열어보지 않는 창고처럼 취급했지만 예의를 갖춘 여성들도 있었다.

아래 사진이 뭐로 보이는가?



신발 전용 트렁크다. 1920년대 부유한 여성들이 휴양 여행을 떠날 때 신발 서른 켤레를 넣을 수 있는 트렁크로 여행패션을 완성했다. 이 트렁크는 루이비통에서 만들었다.



위 스트리퍼 슈즈는 공격성과 구속을 동시에 표현하는 역설성을 보여준다. 정말 이 하이힐에는 발을 집어넣어보고 싶은 욕망이 절로 들었다.

스니커즈가 뭐 그리 특별할 게 있다고? 아래 사진들을 보자.


 



 

스니커즈도 특별한 함의를 지닌 역사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 현대의 스니커즈 제조에 있어서 문제는 역시 환경이다. 한 의류 재활용 회사가 밝히길, 매년 약 200억 켤레의 러닝화가 생산되고 3억 켤레가 버려진다고 한다. 또한 2013년 MIT 연구에 따르면 13.5kg의 탄소가 배출된다고 한다. 이제 스니커즈는 탈산업 시대의 흐름에 맞춰 3D프린팅, 플라이니트 기술, 주문맞춤 제작 단계에 와있다.





20세기 들어 신발이 패션아이템으로 거듭나면서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데에 활용했고 어떤 이들은 광적으로 수집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의 아내 이멜다이다. 그녀가 수집한 신발은 3천 켤레가 넘었다. 남성들의 신발 수집도 늘었는데 신발 수집에 있어서도 남녀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 여성의 신발 수집을 과도한 욕망과 소비행위로 치부하는데 반해 남성의 수집은 이윤 창출을 위해 계산된 행위임을 강조한다. 희귀한 스니커즈는 투자수준의 수집품으로서의 가치를 반영해 재판매 가격이 수 만달러에 이른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아주 즐거웠다. 신발의 역사와 문화를 너머 신발이라는 재화 속에 숨은 성차별적 인식태도 등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많았다. 사진들을 보며 바타 신발박물관에 입장한 듯했다. 내 어릴 적 신발 기억도 소환해 주었다. 가난을 깨달은 건 중학교 이후였고, 내 어린 시절은 부자였다. 신발 부자! 그 사실을 일깨워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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