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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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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페르시아에 샤흐리야르라는 왕이 있었다. 어떤 계기로 아내의 부정을 알게 된 왕은 지독한 여성 불신에 빠져 매일 밤 처녀 한 명을 데려오게 하고는 순결을 빼앗고 이튿날 아침 목을 벤다. 그런 끔찍한 소행을 보다 못해 나선 사람이 대신의 딸 셰에라자드였다. 그녀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진하여 왕을 침소에서 모시며 기이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셰에라자드는 날이 밝으면 이야기를 중간에 멈추기 때문에 뒷이야기가 궁금한 왕은 그녀의 목을 벨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셰에라자드는 매일 밤 목숨을 부지하며 자신과 백성을 구하려 한다.
위 내용이 <천일야화>의 줄거리라는 것을 대부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천일야화를 실제로 읽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분명 책으로 나와 있음에도 읽은 사람은 거의 없으며 어디선가 들은 내용으로, 혹은 어릴 적 애니메이션이나 동화책으로 본 기억으로 읽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소설 <열대>를 읽으며 깨달았다. 내가 아는 <천일야화>는 TV 애니메이션 <신밧드의 모험>을 본 게 다라는 걸!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라비안나이트>, <신드바드>, <알라딘>, <알리바바>는 모두 <천일야화>에는 없다는 사실이다. 17세기 이후 <천일야화>가 서양에 소개되는 과정에서 들어간 이야기로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천일야화>의 내용은 저런 태생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흡수해 확장된 것이라고 한다. 이 내용은 모두 <열대>에 나오는 것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천일야화>에 대해 모두에 길게 설명하는 이유는 <열대>가 <천일야화>를 모티브로 했으며 책 속에서 계속 언급되기 때문이다.
<열대>가 시작될 때 등장하는 소설가의 이름을 실제 소설가 ‘모리미 도미히코’ 그대로 써서 이것이 소설인가 아닌가 헷갈리게 만들었다. 이미 여기서부터 독자는 낚인거다. 모리미는 대학 4학년 때 ‘사야마 쇼이치’가 쓴 <열대>라는 기이한 소설을 읽게 되는데 다 읽지 못한 채 분실한 것으로 내용이 시작된다. 그는 계속 소설의 결말이 궁금해서 그 책을 찾으려고 수소문 했지만 16년이 지나도록 찾지 못하다가 ‘침묵 독서회’라는 모임에 우연히 참가했다가 <열대>를 만나게 된다.
침묵 독서회에서 시라이시라는 여성이 그 책을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고 빌려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지만 거절당한다. 여기서부터 이 소설은 액자 구성의 끝판왕을 시작된다. <천일야화>의 액자구성이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열면 또 다른 인형이 나타나듯 <열대>도 그렇다고? 아니다! 몇 배는 더 심하다. 거의 양파 수준이다. 까도까도 계속 또 다른 이야기가 이어진다.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인내심이 약한 독자라면 중간에 책을 덮어버릴 수도 있다. 대체 결말이 뭔데? 소설 속 소설 <열대>를 읽은 사람들이 저마다 다르게 이야기하고 게다가 아무도 끝까지 읽은 사람이 없다는데 내가 들고 있는 이 책의 결말은 어떻게 끝나는 건데? 라며 궁금해 하는 나처럼 성질 급한 사람은 책 맨 뒤를 펼칠 가능성이 높다. 나는 그랬다.
그런데 맨 뒷장, 그 앞장, 몇 장 더 앞장을 읽어봐도 모르겠는 거다. 그러니까 소설 속 소설<열대>의 결말도 알 수 없었고, ‘나’로 등장하는 이가 맨 처음에 나온 소설가 모리미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는 거였다. 그러니 인내심을 가지고 530페이지를 다 읽어야만 알 수가 있다는거...
사전 서평단에 당첨되어 받은 책이므로 힘들었지만 끝까지 다 읽어야 했다. 해냈다! 그러나 끝까지 다 읽고 처음으로 돌아가야 했다. 앞부분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밑줄 쳐놓았다. 그 부분들만 다시 훑었다. 그렇게 해두지 않고 여느 소설처럼 줄줄줄 읽기만 했다면 다 읽고도 내용 이해 어려울 뻔 했다. 그만큼 작가가 수수께끼처럼 숨겨놓았다. 침묵 독서회와 학파 소속 사람들의 이름과 소설 속 소설 <열대>와 연관된 사연들이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거의 도표를 그려야 할 정도다. 작가 모리미는 <천일야화>와 이 소설을 섞고, 소설 속 소설 <열대>와 등장인물들의 사연까지 샌드위치처럼 집어넣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거기다 제각각 <열대>에 대한 다른 가설들을 주장하고 있어 그것까지 따라가려면 벅차다. 나는 이 사람이 독자들 약 올리려고 아니, 괴롭히려고 이러는 건가 싶었다.
이 소설 속에는 소설과 이야기와 인생에 대해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주는 문장들이 많다. 그 문장들에 꽂히면 독자는 잠시 머물게 된다. 줄거리 파악은 잠시 접어두고 자신과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p.47
소설 같은 거 읽지 않아도 살 수 있어요.
☞ 장강명 작가가 어떤 책에서 언급한 내용이 떠올랐다. 지하철에서 소설을 읽고 있었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젊은 사람들이 소설나부랭이나 읽으니 세상이 이 모양이라며 호통치던 에피소드! 황당했던 장작가는 소설이야말로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나 역시 동의한다. 문학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상당하다. 상상력과 어휘력은 물론이고 공감능력의 차이가 제일 크다. 내가 직접 겪어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타인이 겪는 심정을 책으로나마 간접 경험할 때 다른 사람을 이해까지는 못해도 공감할 수는 있다. 소설 같은 거 읽지 않아도 살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을 공감하고 소통하며 어울려 사는 건 어려울 것이다.
p.136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인생이라고 부르는 것뿐입니다.
☞ 인생의 끝은 죽음이다. 살아있는 동안 이야기는 계속 된다. 살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과제 같은 것들이 있다. 하나를 끝내면 다른 하나가 기다리고 있고, 큰 중요한 일이 지나가면 더 이상 다른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또 새로운 게 떡하니 기다리고 있다. 그게 인생이다.
친정 아버지는 팔순이 다 되어가는데 지난 달에야 생업을 접으셨다. 평생 여러 가지 직업을 이어오셨고 마지막으로 하신 가게는 20년 넘게 하신 일이었다. 몇 년 전부터 그만하시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이어오시더니 코로나로 더 이상 유지가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연세가 많으셔서 더 이상은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그저께 우리 집에 오셨다가 발열과 구토증상이 있어 깜짝 놀랐다. 코로나 감염인가 싶어 검사받았는데 음성으로 나왔고 피검사 상 염증수치가 너무 높다며 각종 검사를 했다. 조실부모 후 평생을 맨몸으로 일만 하며 살아오신 아버지가 이젠 좀 편히 쉬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생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게 인생이라 부른다지만 제발 비극만은 아니면 좋겠다.
p.157
너와 관계없는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그리하지 않으면 너는 원치 않는 것을 듣게 되리라.
☞ 위 두 문장은 <천일야화>에도 나온다고 한다. <열대>에도 몇 번이나 인용되는데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남의 말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혔다. 그래서 영화 <올드보이>가 떠올랐다. 오대수는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15년간 감금당한다. 감금으로 끝난 게 아니라 급기야 원치 않는 말, 천형같은 말을 듣기에 이르지 않나...
p.434 존재하지 않으면 만들어 내면 돼.
p.436 창조한다는 건 지배한다는 뜻이다.
☞ 이야기는 계속 만들어져야 한다는 당위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리고 만들어내는 사람, 작가가 지배자라고 강조하는 것 같았다. 작가 모리미의 스웩이 들어있는 문장으로 읽혔다.
이 소설을 읽으며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긴 했지만 사실 <천일야화>를 읽어보고 싶어졌다. 아주 어릴 때 애니메이션으로 본 경험과 여기저기서 짜깁기 형식으로 주워들은 것들로 <천일야화>를 읽었다고 착각한 자신이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찾아보니 아랍어 직역은 없고 ‘앙투안 갈랑’이 불어로 번역한 것을 임호경씨가 한국어로 번역한 게 있다. 열린책들에서 출판된 6권짜리 세트이다. ‘모리미 도미히코’ 작가 덕분에 제대로 된 <천일야화>를 읽어보게 됐다. 조금 미안하긴 한데 <열대>에서 <천일야화>를 사용했기 때문이니 작가 본인도 뿌듯할 것 같다.
**알에이치코리아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