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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명소녀 투쟁기 - 1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현호정 지음 / 사계절 / 2021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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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지리 작가의 팬이다. 그의 소설 전권을 다 읽었는데 이젠 더 이상 그의 소설을 읽지 못한다. 31살에 요절했기 때문이다. 박지리 작가의 소설을 읽을 수 없다는 건 아쉬움보다는 허전함으로 다가온다. 꾸준히 소설을 내는 다른 작가들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한다. 기대에 차서 읽은 다른 소설가들의 신간이 실망감을 안겨줄 때마다 박지리라는 별은 내 손에 잡을 수 없기에 더욱 반짝이는 거라며 자위했다.
작년에 사계절출판사에서 박지리 문학상을 공모한다는 기사를 박지리의 뒤를 잇는 작가 탄생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215편의 응모작 중 현호정 작가의 <단명소녀 투쟁기>가 대상으로 뽑혔다. 제목을 본 순간 이것은 운명이 아닌가 했다. 요절한 작가를 기리는 문학상의 첫회 수상작의 제목에 ‘단명’이란 단어가 들어가다니! 출판사에서 사전 서평단을 뽑는다기에 주저없이 아니!! 득달같이 신청했다. 다행이 뽑혀서 이북으로 먼저 읽었고 며칠전 종이책과 마우스패드도 받았다.
표지가 아주 강렬했다. 주인공 수정은 당돌하고 용감한 소녀이지만 그 얼굴을 연상하기는 어려웠다. 내가 그림엔 아주 젬병이라 그렇기도 있지만 저렇게 당당한 소녀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는데 표지를 보는 순간 옳다구나! 싶었다. 그래, 저런 수정이니까 스무살 전에 죽을 거라는 점쟁이 말에 “싫다면요?” 라고 맞받아쳤겠지.
그렇다! 제목처럼 단명소녀는 수정이고 단명의 예언을 거부하며 자신의 죽음을 죽이기 위한 여정을 떠나는 투쟁기가 이 소설의 큰 줄기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 두 가지 물음이 떠올랐다. 이것은 환상동화인가? 아니면 퀘스트를 깨고 레벨업 해나가는 어떤 게임의 텍스트판인가? 게임 종류라고는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나로선 무슨 게임과 유사할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책을 다 읽은 후 작가의 말과 출판사 리뷰를 보니 이 소설의 모티브가 <북두칠성과 단명소년>이라는 설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명의 예언을 들은 소년이 99세까지 장수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을 소녀로 바꾸고 설화 속 소년과 달리 스스로 자신의 명을 쟁취하는 것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상황들이 황당무계해 보이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예컨대 백설기를 끓여 죽을 만들어 노인 7명을 먹이는 상황, 흰 죽이 끓는 솥 바닥에서 얼룩처럼 잠겼다 떠올랐다 하는 것이 조각배 같았는데 어느새 그 조각배에 수정과 이안이 타고 있는 장면, 헌데 그 죽은 퍼내도 퍼내도 줄지 않는다! 한가지 사례를 들었지만 이런 상화들은 장면마다 연출된다. 즉 수정과 이안이 진입하는 퀘스트마다 발생한다.
이안은 누구인가? 점쟁이 북두가 수정에게 남동쪽으로 계속해서 걸어가면 죽음을 맞닥뜨릴 시간을 벌수 있다고 해서 혼자 출발한다. 그 출발점이 G시의 지하철역이다. 역을 빠져나오면서 ‘내일’이라는 이름의 개를 만나고 연이어 이안과도 조우하게 된다. 이안은 수정과는 반대로 죽고싶어서 북쪽으로 가는 길이며 수정과 같은 나이인 열아홉이었다.
- 혹시 살러가요?
- 네?
- 살고 싶어서, 남쪽으로 도망가고 있는 거냐고요.
수정은 이안의 물음을 곰곰이 되새겼다. 체하지 않기 위해 떡을 꼭꼭 씹듯 마음으로 잘근잘근 내씹었다. 그러자 단물이 입안에 퍼지듯이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한다.
이상한 건 내가 아니라 저쪽이다. 사는 건 죽는 것보다 낫다. 용기 있는 건 쟤가 아니라 나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러나 그런 생각을 끝도 없이 주워 담는 동안에도 이상하게 얼굴이 달아오른다. 살고 싶냐는 저 애의 물음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느니 그냥 죽는 게 낫지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수정은 딱히 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 딱히 살고 싶다기보다는,
- 네,
- 죽고 싶지가 않아서요.
- 네.
- 싫다거나 무섭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좀 억울하다고 해야 할까, 이해를 못 했다고 해야 할까.
분명 정반대의 목적으로 길을 떠난 둘인데 함께 한 여정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구해준다. 그들이 겪는 상황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다. 그래서 게임을 글로 풀어놓은 것 같다고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바로 이 소설의 매력이 있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실제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치 자신이 그 게임 속 캐릭터가 되어 몸을 움직이고 미션을 수행하는 것처럼 느낀다. 거짓임을 분명 알면서도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 게임이고 레벨업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것이다. 테트리스나 같은 그림 맞추기 정도밖에 해 보지 않은 나로서도 수정과 이안의 최종단계는 어떻게 될지 기대되었다.
마지막 저승의 신과의 결전에서, 수정이 ‘최선을 다했기에 흔적이 남은’ 거라고 하자 저승의 신은 이렇게 말한다.
“그럼 잔해를 떠안고 살아가. 고약한 피 냄새에, 무질서에 익숙해질 각오를 해. 폐허를 쉼터로, 몰락을 휴식으로 착각하면서.”
수정은 이렇게 응수한다.
“나에게 그런 것들은 이제 조금도 두렵지 않아. 그리고 나는 그것들의 이름을 실제로 바꾸어 부르겠어. 폐허를 쉼터로 몰락을 휴식으로... 영원히... 그러면 그건 더 이상 착각이 아니게 되겠지.”
이어 쫓아오는 그동안 처리했던 모든 것들이 수정과 이안에게 달려들고 수정은 내일에게 이안을 부탁한다. 이렇게 끝나는가? 둘의 최후와 마지막 장의 반전 내용은 이 리뷰에 쓸 수 없다. 책으로 직접 만나보길 권한다.
그동안 읽었던 소설과는 분명 다른 스타일의 소설을 만나는 독자들의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그러나 많이 알려지지 않은 연명설화, 게임이 진행되는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스토리텔링, 독특한 주인공과 등장인물들, 특히 ‘내일’이라는 개의 매력을 그냥 지나치긴 쉽지 않을 것이다. 5장에 등장하는 '오늘'이라는 개를 만나며 '내일'의 현신이 아닐까 가슴 두근거리게 된다면 현호정 작가의 글맛에 빠져버린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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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랬다. 앞으로 박지리 문학상 출신이라는 이름표가 현호정 작가에게 자랑하고픈 휘장이 되길 바란다. 그의 차기작을 기다린다.
**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