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 2021 뉴베리상 대상 수상작 꿈꾸는돌 28
태 켈러 지음, 강나은 옮김 / 돌베개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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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야기는 누구 한 사람 게 아냐. 이야기되려고 있는 거지."

                                                                                    p.292

 

2021년 뉴베리상 대상에 선정된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에 나오는 이 문장은 작가 태 켈러가 말하려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미국에 사는 한국계 작가가 우리나라 건국신화와 전래동화를 이리저리 짜깁기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듣고 읽고 자란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변형이 이 책의 주 모티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선 오누이가 아니라 자매이야기였고, 건국신화의 곰과 호랑이중 호랑이만 등장하며 호랑이가 여성으로 변모한다. 옛이야기도 주입식으로 교육받아서 그럴까. 나는 이 이야기의 변형에 동감하기 어려웠다.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읽으면서 처음 인용한 저 문장을 발견했다. 초독 시 간과했던 것들을 발견하면서 편견을 가지고 책을 읽은 게 아닌가 싶어 작가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저명한 아동문학상을 받았고 유시민 작가가 추천했다고 하니 오히려 권위를 방어하고 싶은 심정이 작동한 것 같다

   

작가는 어릴 때 여동생과 함께 할머니로부터 호랑이 나오는 옛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그 이야기들은 고스란히 작가의 정신세계에 녹아들어 있었지만 드러나지는 않았다. 성인이 되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호랑이가 되살아나게 된다. 작가는 할머니에게 호랑이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었으나 할머니는 너무 오래되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 작가는 자신의 내면에 살아있던 호랑이를 일깨운다. 할머니에게 들었던 호랑이 이야기를 자신만의 이야기로 만들어냈다. 작가가 다양하게 변주하는 호랑이 이야기야말로 구전(口傳)의 정의에 꼭 맞는 셈이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누구 한 사람 게 아니라 이야기되려고 있는 거라는 말에 부합하는 이야기들을 이 책에서 마음껏 풀어놓았다.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은 우리나라 옛이야기 속의 호랑이와 소녀 릴리가 대결하는 구도를 큰 축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지만 다양한 소재의 이야기들이 실핏줄처럼 뻗어 있다. 여성서사, 이민자, 성소수자, 부모자녀관계, 가족애, 우정, 사랑, 용기 등등 아이들과 함께 읽으며 이러한 주제가 들어있는 장면들을 찾아보고 이야기 나눠보면 좋을 것이다. 한 권의 책에서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을 뽑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한 번 읽고 단번의 독후활동으로 끝내기엔 아까운 책이다.

 

조아여(조용한 아시아 여자애)라는 별명을 가진 수줍음 많은 주인공 릴리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호랑이와 당당하게 거래를 하면서 성장해가는 이야기는 어린이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용기도 줄 것이다. ‘이야기는 누구 한 사람 게 아니라는 작가의 말처럼 독자에게 창작의 욕구가 마구마구 솟아나면 어쩔 것인가. 책 속 변주보다 더 재미있고 역동적인 호랑이 이야기가 탄생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만큼 작가의 저 문장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새로운 명제이다!

 

이 책의 후반부, 할머니의 임종 장면에서 저 명제에 꼭 맞는 서술이 등장한다.

 

p.307~308

할머니는 눈을 뜨지도 않고 말한다.

때로 가장 강한 일은 도망을 그만 가는 거야. 나는 호랑이 안 무섭다, 나는 죽는 거 안 무섭다, 말하는 거야.”

하지만 나는 너무 무섭다.

찰나의 순간, 할머니의 표정 아래로 호랑이의 얼굴이 스친다. 보자마자 사라지긴 했지만, 난 분명히 보았다. 그건 할머니 안의 맹렬함이다. 할머니가 이야기의 다음 장에서 품고 갈 용감함이다.

할머니는 용감할 것이다.

언니와 엄마가 돌아오고, 언니는 내 맞은편에 앉아 할머니의 다른 쪽 손을 잡는다. 엄마는 다가와 내 등을 문지른다.

눈은 여전히 감고 입술은 아주 작은 웃음을 지은 채, 할머니가 말한다. 맹렬한 속삭임으로,

이야기 하나 해 줘.”

언니가 나를 보며 한 손을 뻗어 올린다. 마치 하늘에서 별을 따듯 허공에서 움켜쥐는 시늉을 하더니 그 손을 내게 내민다.

내 마음 가장자리에서부터 어떤 이야기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안개와 그늘 속에서 나타나 점점 뚜렷한 모양을 이룬다.

나는 할머니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앉는다.

더 가까이

더 가까이

그리고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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