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떠나온 아침과 저녁
한수산 지음 / &(앤드)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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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 작가의 신작에세이 <우리가 떠나온 아침과 저녁>이 출간되었다. 올해 일흔여섯 된 노작가는 이 책에서 지나온 시간 속에서 사람들을 불러낸다. 작가는, 늙어갈수록 자신이 소중하게 지켜온 것을 보호하기 힘들어지기에 서글퍼진다고 했다. ‘작가의 말에서 그는 곁에서 가족을 이루며 함께 지낸 이들에 관한 글과 어린 시절을 지켜주고 보살펴주셨던 은사들과의 추억을 관한 모아두었다 , 이제는 이런 글을 써도 좋은 나이가 되었다고 밝힌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독자 중에 오래전부터 그의 소설을 읽어온 팬이라면 옛 추억을 함께 회상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작가를 처음 만난다면 한수산 필화사건같은 야만적 시대의 초상에 놀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작가의 기억의 편린에 자신의 모습이 겹쳐져 슬며시 미소가 삐져나올 수도 있다.

 

나는 어젯밤에 읽다가 작가의 옛일이, 작가의 소심한 뒤끝이 내 경험과 똑같아서 반가웠다. 작가가 옆에 있었다면 아마 그의 팔을 잡고 흔들며 웃었을 것이다. 웃기거나 상대방에게 동의를 구할 때 내가 자주하는 짓이다.

 

작가는 한 때 정원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가면 세 자릿수의 장미를 기르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니까 100그루가 넘는 다양한 종류의 장미를 심고 싶었다고.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는 갔지만 워낙 땅이 안 좋아서 서른 그루 정도 심는 것으로 만족했단다. 그 때 아침마다 장미를 꺾어 아이들 방에, 식탁에 꽂아 두고는 가족의 눈치를 살폈다고 한다. 누가 향기를 맡고,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 관찰했는데 가족들의 반응을 쓴 문장은 이렇다.

 

어쩌다 탄성을 지르는 것은 아내였고, 도대체 아비가 꽂아놓은 장미에 단 한 번도 반응을 보이지 않기는 아들 녀석이었다. 네 이놈아, 나는 아직도 그 일을 잊지 못한다.”

 

아버지가 저렇게 감성적인데 어쩜 아들이 그럴까 싶으면서도 우리 집 세 남자들도 똑같다며 공감했다. 우리 아이들 중학교 때 백장미 다발을 화병에 꽂아 둔 적이 있는데 아들 둘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렇게 예쁜 꽃이 우리 집에 온건 그때가 처음이었는데도 그랬다. 그리고 어제 오랜만에 프리지아를 들였는데 무반응보다 심각한, 꽃에게 언어폭력에 가까운 발언을 한 남자가 있었으니 저 글을 읽으며 폭풍공감 할 밖에.

 

예술을 사랑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애정을 표하는 글들을 읽으며 작가는 다정다감하고 감성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니까 그렇겠지 싶긴 하다. 평범한 한국 남성들이 저런 감성이기는 힘들 것이다. 1장에서 그의 예술적 감성을 만나볼 수 있었다.

 

2장에서는 아들, , 강아지와의 사연을 읽으며 부정도 이렇게 애틋하구나 감탄했다. 딸이 어렸을 때 자신이 작사 작곡해서 불러주던 자장가를 기억하며 이렇게 썼다.

 

아빠 머리에 흰 서리 내리고

네가 네 생의 주인이 될 때

저무는 바다도 함께 보겠지

바람 같던 세월도 얘기할 거야.

 

어느새 아빠 머리에도 흰 서리가 내렸구나. 너 또한 네 생의 주인이 되어…… 언제 우리가 다시 만나 저무는 바다도 함께 바라보고, 그 바닷가를 걸으며 바람 같던 세월을 이야기하게 되려나.

 

 

돌이 안 된 딸을 데리고 내려가 3년을 살았던 제주 시절을 회상한 글에서 작곡가 길옥윤 선생과의 추억이 나온다. 자신이 작사를 하고 길옥윤 선생이 작곡하여 자장가를 만들어 딸에게 남겨주고 싶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길옥윤 선생이 세상을 떴다는 사연이었다.

 

무언가를 후회하는 것은 그때 거기에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어느 일본드라마에서 들은 말을 인용하며 작가는, 사랑이 있었기에 후회라는 괴로움도 남는다고 했다. 위 문장처럼 감성적인 문장들을 인용해본다.

 

소년기의 추억을 넘어서서 참으로 따스하게 김환기의 그림을 껴안는 순간이었다. 이제부터 나는 오래 그의 그림 앞을 서성거릴지도 모르겠다는 예감 속에 행복해했었다.” p.50

피아노 음악은 루빈스타인의 연주를 주로 들었지만, 거의 빼놓지 않고 매일 듣던 것은 젊은 피아니스트 밴 클라이번이 연주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실황녹음 레코드였다. 음향관리도 방음장치도 없는 목조 다방에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발소리에 섞여 들었던 음악은 그렇게 우리들만의 주제곡이 되어주었다. 지금도 어쩌다 그 음악이 들리면 눈물이 핑 돌게 그 시절이 다가와 서성거린다.”  p.101 

 

"봉봉이로 하여 오늘도 내 하루의 비늘 하나가 아름답다. " p.113

 

"나를 둘러싸고 있던 사회는 어떠했던가,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호소하는 목소리조차 가혹하게 봉쇄되던 노동운동의 새벽, 여공들이 기숙사에서 뛰어내리다 죽고, 강제연행에 맞서 웃옷을 벗어던지며 서로를 부둥켜안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때를 달이 뜨면 가리라하는 말로 표현한 적이 있었다. 달 밝은 밤에 가자는 낙관이 아니었다. ‘지금은 너무 어두우니 달이라도 뜨면 가리라하는 비원의 희망이었다."  p.121

 

"담배여, 잘 있어. 지난 봄 흩날리는 벚꽃 그늘에 서서 한 모금의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바라보던 세상의 황홀함을 네가 앞으로 어찌 알겠느냐고 유혹하지는 말아줘. 고마웠다, 담배여."  p. 251

 

 

3장에서는 독자와 은사님과의 사연이, 4장은 취미와 일상을, 5장에서는 평생 친구였던 술과 담배에게, 그리고 수녀님에게 쓰는 편지이다.

 

양장본에다 점묘화 느낌의 표지 그림에, 내지에는 오수환 화백의 추상화도 4점이나 실려 있는데 예술을 사랑하는 작가의 취향을 잘 살려 만든 것 같다. ‘작가의 말마지막 문단에서 회한어린 마음을 드러냈으나 독자 입장에서는 감사한 일이다. 이 책으로 작가의 지난 시절을 독자와 나눌 기회를 얻었으니 말이다.

 

"언제 다시 이런 글을 쓸 수 있으랴. 기억에도 없이 잊어버렸던 편지들을 꺼내 읽듯이, 마음의 다락방 한 곳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마음이 이럴까 싶다. 그런 마음으로 여기 모아놓은 글들을 바라보는 오늘, 밖에는 또 하루가 꽃처럼 지고 있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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