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의 인문학>은 도정일 선생이 각종 매채애 기고했던 글 들을 모아 2월에 출간한 책이다. 인문학자이므로 그의 글이 인문학적이겠지만, 이 책은 특히 ‘삶의 예술로서의 인문학’의 부제에 적합한 글들을 모아 묶었다. 위 인용한 내용(질문)은 1995년 글이다. 25년도 더 전에 했던 저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며 시간을 초월해 언제든 화두가 될 만하다.
1995년과 2021년, 사람들의 삶의 양식과 태도는 얼마나 바뀌었을까? 가장 큰 변화는 인터넷일 것이다. 그 때는 각 가정에서 PC를 가지고 있지도 않을 때였고, 지금은 누구나 내 손안에 컴퓨터를 들고 있다. 스마트폰이라는 컴퓨터로 시공간의 제약 없이 원하는 정보를 취하고 하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사고 싶은 것을 산다. 정보의 평등이 이루어졌다고 여기지만 과연 그러한가? 한편, 그 때나 지금이나, 아니 몇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삶의 양식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류탄생부터 지금껏 변치 않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잘 먹고 잘 살고 그리하여 행복하길 원한다. 이것은 하나의 명제다!
선생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우리에게 행복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느 때 가장 행복한가?"
"잘 먹고 잘살면서도 행복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면 그 이유는?"
내가 감히 명제라고 했던 문장은 위 세 질문의 그물에 모두 걸린다.
우리에게 행복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인데 가장 행복한 때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잘 먹고 잘 살아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 이유 역시 제각각이며 몹시도 개인적인 이유일 터이다.
나는 어제 지인의 모임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나라는 거의 도박판이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주식과 코인투자에 달려들고 있다. 어제 들은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지인은 한 달 전부터 코인 투자(투자인지 도박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를 시작했다. 주식이고 코인이고 평생 해본 적 없었는데 다니고 있는 회사(케이블제조납품업체)의 직원들이 대부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동료의 권유로 시작했다. 20년 넘게 그 회사에 몸 바쳐 다닌 창립멤버라 할 수 있는 직원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많이 느끼고 있으며 이런 투자라도 해서 급여 외에 돈을 더! 많이!! 벌고 싶다. 가내공업으로 출발했던 회사는 이제 어엿한 중소기업이 되어 매출이 수직상승하고 있음에도 직원들의 복리후생은 초창기보다 오히려 줄어들고 있으며 사장은 어떻게든 급여를 적게 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회사를 그만둘 순 없으니 남들 다 한다는 주식투자를 하고 싶지만 그건 어려우니 코인투자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이 회사 이야기를 자세히 한 이유는 지인을 포함한 그들이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10년 넘게 만나온 그 사람이 그렇게 들떠서 무슨 종교 전도하듯이 말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고, 동료들이 수익을 얻은 사례까지 자랑스레 말했다. 회사를 이전보다 즐겁게 다니고 있는 것 같았다.
지인의 생기 넘치는 목소리와 표정을 보며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먹고 사는 게 어려운 정도는 아니지만 남들이 투자를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니 나도 하고 싶다! 그렇게 발을 들인다! 재미있고 돈도 벌고 얼마나 좋냐! 고 했다.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그 투자의 끝에서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악담이 아니고 지인의 사례로 일반화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제 젊은이들이 영끌해서 주식투자한다는 뉴스는 새롭지도 않다. 나는 그런 뉴스를 보며 남의 일인줄, 20~30대들만 그러는 줄 알았는데 내 주위의 사람들까지 투자 바람에 빠져들 줄은 몰랐다. 나이가 많건 적건 대한민국에서 안정적인 미래를 기대하기란 어려우므로 각자도생의 한 방편이 투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선생의 마지막 질문, 잘 먹고 잘 살아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기본적인 의식주의 충족을 너머 자신이 하고 싶은 뭔가를 하며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돈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남들이 하니까 따라 하면서 행복하다면, 역시 그것으로 되었다. 시한부라도 상관없다. 그러나 도정일 선생의 질문 속 행복과는 거리감이 있다. 그가 말한 부자는 이러하다. 위 글의 마지막 문단을 인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