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남자의 자리>를 읽었다. 읽는 내내 나는 간섭받았다.

이것을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나?’

소설의 외피를 두른 에세이가 아닌가?’

라는 생각들이 활자의 발뒤꿈치 끝에 매달려 자꾸만 달랑거렸다.

그리고 또 다른 생각이 일었다.

만약 작가가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더라면?

, 그동안 써온 소설들이 자전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는 사실이므로 위 전제는 성립하지 않는 건가?

그렇다면 <남자의 자리>를 읽으면서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구분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 독자의 상황이나 경험에 따라 받아들이는 범위와 해석은 달라질테니까.

 

이 책은 내 머릿속에 두 갈래 길을 내었다. 아버지라는 길과 시어머니 길이다. 작가가 아버지를 기억하듯 나도 아버지를 기억하게 만들었다. 노동자로 일하면서 식료품 가게를 차리는 장면에선 내 아버지가 부산에 이사 와서 처음 낸 신발가게를 떠올렸다. 가게의 주인은 매몰찬 여자였고 가게에 딸린 단칸방은 너무 작고 추웠다. 그 신발가게를 엄마에게 맡기고 아버지는 당시 부산 용호동에 공장이 있던 동국제강에 취직했다. 책 속 아버지가 노동자보다는 상인의 마인드로 살았다고 했을 때 내 아버지의 상업 예찬이 기억났다. 당신 평생 소속이 있었던 때는 동국제강 근무와 원양어선을 탔을 때뿐이었다. 그 후로는 중국집, 신발가게, 식당 등 지금까지 장사를 하고 계시고, 작은 가게라도 사장을 하는 것이 장점이 많다고 하셨다.

 

책 속 아버지는 딸이 많이 배우는 것이 달갑지 않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어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왔을 때 교양 있는 아버지처럼 보이고 싶어 했다. 사위가 될 청년에게 잘 해주고 싶었고 지극한 베풂이 그들 사이의 문화와 권력의 격차를 좁혀주길 바랐다. 그리고 손주에게 무한 사랑을 주고 싶은 평범한 할아버지가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 아빠를 너무나 사랑해서 이 담에 커서 아빠랑 결혼하겠다고 큰소리치던 딸이었다. 아빠가 사촌여동생을 예뻐할 땐 질투심이 불타오르던 딸이었다. 이것은 까마득히 잊고 있던 기억인데 친정에서 옛날 사진첩에서 발견한 한 장의 사진 속 심통난 내 표정이 기억을 환기시켰다. 그렇게 아빠를 사랑했고 결혼하겠다던 딸은 너무나 일찍 그의 품을 떠나 새 가정을 만들었다

 

p.64

부모와 자식사이의 예의는 오랫동안 내게 미스터리였다. 교육을 잘 받고 자란 사람들이 그저 간단한 인사에도 극도로 친절함을 나타내는 것을 이해하기까지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나는 부끄러웠다. 그런 존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었고, 내게 특별한 호의를 보이는 것이라고 상상하기까지 했다.

 

이 부분에서 나는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심성이 바르고 다정다감하며 예의를 차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상기했다. 부산에 이사 와서 내가 받은 가장 큰 문화충격은 사람들이 예의가 없다는 것이었다. 8살짜리 아이가 느끼기에 부산의 아빠들이 우리 아빠와 전혀 다른 말투와 행동에 놀란 것이다. 부산 아빠들이 무에 그리 다를까만은 아마도 말투와 억양의 차이 때문에 그런게 아닐까 싶다. 아버지는 조실부모하여 고등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퇴계 이황의 후손이라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그렇기에 양반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여기신 것 같다. 조실부모라는 콤플렉스를 유명 조상님의 이름으로 가리고 싶었던 것이다. 말로만 그런 게 아니라 그에 맞게 행동하시려고 한 것은 분명하다.

 

책 속에서 아버지의 자부심, 심지어 존재의 이유를, 자신을 멸시하는 세상에 내가 속해 있다는 사실 (p.100)이라고 쓴 부분에서 동서양의 차이를 발견했다. 한국의 아버지는 자신의 자부심을 조상(뿌리)에서 찾았고 프랑스의 아버지는 자식(후세)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건조함을 너머 차가운 서술방식의 정점을 찍는 부분도 저 문장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저렇게 표현한 것은 부녀가 서로 닮은꼴임을 드러냈다고, 나는 생각했다.

 

책의 마지막, 아버지는 집에서 사망한다. 그 때가 1982, 요즘처럼 병원에서 임종을 맞지 않을 때였다. 최근 몇 권의 죽음 관련 책에서 임종을 집에서 보내는 것의 장점에 대한 내용을 읽다보니 당장 100세가 넘으신 시어머니가 생각났다. 자식들이 집으로 모시겠다고 해도 절대 집을 떠나지 않겠다며 버틴다. 남원과 부산은 두 시간 남짓 되는 거리지만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금방 도착하기는 힘들다. 우리가 가는 동안 돌아가실까봐 몹시도 걱정스럽다. 친정 부모님께서 편찮으시면 집에 계실수도 없고 우리 집에 모실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럼 병원이나 요양병원에 입원할 것 같은데 그 역시 걱정이다. 자식 입장으로 현실적 걱정들 말이다. 임종얘기를 하자면, 책을 읽으며 환자가 집에서 죽는 것이 참 이상적으로 보였는데 현실과는 괴리감이 있다.

           

리뷰의 처음에 친정 아버지와 시어머니를 같이 언급했다. 이 책의 주인공이 아버지이기에 장면마다 자동으로 내 아버지와의 기억으로 연결되었다. 시어머니와의 연결은 책 마지막에 작가가 기억에 대해 썼기 때문이다. 카트에서 계산원으로 근무 중인 제자를 만나 예전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5~6년전의 기억도 양자가 너무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100년을 살아온 사람의 기억은 어떨까. 시어머니의 생애를 듣고 글로 옮겨 쓰면서 내게 가장 큰 고민은 바로 기억이었다. 어머니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사실과 얼마나 일치할까? 만약에 다르다면 그것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나? 그러면 어머님 당신의 기억에 의존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믿을 수 없는가? 그것을 활자화하는 것은 에세이인가, 소설인가? 나는 혼란스럽다.

옮긴이의 말에서 신유진 번역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저 보여주는 것, 화자의 감정에 붙잡히지 않도록 칸막이를 없애는 것, 이 모든 것은 불투명한 인생을 밝히기 위함이다. 쓰지 않으면 더는 존재하지 않는 어느 불투명한 삶을 구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이보다 더 완벽한 오마주가 어디 있을까? 그녀의 글은 아버지를 향한, 그녀가 내려놓고 떠났던 세상을 향한 오마주다. 그리고 이 오마주는 예술의 편에 서 있지 않다. 삶이 먼저, 문학은 그 다음이다. 삶이 문학이 되기 위해 꾸며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아니 에르노가 책 <진정한 장소>에서 문학은 인생이 아니라고 했던 말에 부연설명이다. 그래서 작가는 문학적 비유나 미사여구 없이 서술한 것 같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거리를 두는 것에 성공했고 나아가 둘의 관계가 차갑게 보일 정도였다.

 

다시, 시어머니의 기억에 의존한 기술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불필요한 일임을 이젠 알겠다. 아니 에르노의 소설과 시어머니의 생애구술사를 비교하는 것 역시 의미없다. 나와 소설가의 필력을 한자리에 놓겠는다는 뜻이 아니라 한 인간의 생애는 각자가 이미 하나의 우주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세기를 넘어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은 더욱 그렇다. 시어머니는 1921년생이며 아직 살아 계시다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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