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우의 집 - 개정판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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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이곳에 삼악산이 있었지

북쪽은 험하고 가팔라 모르네

남쪽은 산을 파내고 큰길을 뚫어

골목마다 채국채국 집을 지었지

그래봤자 동네 이름이 삼벌레고개'

 

 

삼악동이라는 멀쩡한 이름을 두고 삼벌레고개에 산다고 해야 통하던 동네, 산 중턱 즈음 우물집 순분네 셋방에 이사를 들어온 가족이 있었으니 새댁네. 그 우물집을 위시로 삼벌레고개 사람들이 아웅다웅 살아가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소설 <토우네 집>, 권여선 작가의 2014년 작품이 이번에 재출간되었다.

 

 

아파트도 없고, 집집마다 자가용도 없던, 1970년대 어느 달동네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편의 동화처럼 펼쳐진다. 일곱 살 동갑인, 순분네 둘째 아들 은철과 새댁네 둘째 딸 원이의 시선으로 그려지기에 그렇다.

 

 

 

어른들의 말과 행동이 일곱 살짜리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벌어지는 우스꽝스런 상황, 제멋대로 해석해버리는 경우는 피식하고 웃게 된다. 어른들이 하는 말을 보고 배워 뜻 모른 채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 마치 어른인양 내뱉는 말투나 마치 다 안다는 듯 결론짓는 모습을 볼 때면 ‘고 녀석들 참...’하면서 앞이마의 머리칼을 쓸어주고 싶다.

 

 

 

이 소설을 읽으며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아홉살 인생>이 자연스레 오버랩되었다. 권여선 작가가 이렇게 한글을 아름답게 구사했었나? 놀라워하며 읽었다. 실은 그의 장편 <레가토>를 읽고 적잖이 실망한 상태였고, <레몬>은 전작 단편 소설집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에 그의 소설을 더 이상 읽지 않고 있었다.

<봄밤>과 <이모>를 읽고 끄억끄억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 소설들에서 묘사와 우리말의 운율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토우의 집>은 필사하고 싶은 표현들이 많았다.

 

 

‘삼십 분 넘게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원은 멀미에 시달렸다. 목과 가슴 어디쯤에서 수십 개의 개구리 알이 올챙이로 부화하는 느낌이었다.’

 

 

일곱 살 여아가 멀미로 토하기 직전 위장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을 이렇게 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어릴 적으로 빠르게 되감기를 시키는 문장이었다. 나는 어릴 때 버스를 타면 무조건 토했다. 토하기 직전 배 속이 꿀렁꿀렁거리다가 혀 깊숲한 곳과 목구멍이 만나는 아래쪽에서 샘솟는 노릿한 침을 시작으로 토사가 시작된다. 그 다음 솟구쳐나오기 직전이, 개구리 알의 부화라니! 놀라운 표현이었다.

 

 

새댁이 은철더러 집에 손님이 올 때는 놀러오지 말라고 한 말에 은철은 거의 연인에게 배신당한 기분이 되고 마는데, 은철의 내상은 이렇게 표현된다.

 

 

‘가슴속 유리 상자에 쫙쫙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달리면 달릴수록 그의 마음은 심하게 베었지만, 파란 호스에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로 항상 질척거리는 창자처럼 길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은철은 온통 신발에 진흙을 튕기며 달리고 또 달려 나갔다. 아 시시하다, 시시해. 칫칫!’

 

 

가슴 속에 깨지기 쉬운 유리 상자를 가지고 있던 여리디 여린 일곱 살 남아는 조각나버린 유리조각에 심각한 내상을 입는다. 저렇게 맘껏 달리고 달릴 수 있었던 은철이 더 이상 제대로 걸을 수 없게 된다. 형 금철의 무모한 장난으로 무릎뼈가 아작난 것이다.

 

 

순분네 우물집에 불행이 겹으로 시작되면서 계주인 순분네에 풀방구리 쥐 드나들 듯 하던 동네 여자들은 발길을 끊었다. 몇 번의 수술을 하고 회복을 비는 굿판을 벌였어도 은철은 다리를 구부리지 못했고, 원의 집에도 무시무시한 불행이 덮쳐왔다. 소풍을 떠나기로 하던 날 김밥을 싸며 즐거워하던 원의 집에 들이닥친 사내들은 아버지 안덕규를 잡아갔고 그는 돌아오지 못한다. 어떤 문서에든 펜대에 펜촉을 끼워 일필휘지로 한자를 써냈고, 늘 단정한 매무새로 정갈한 음식을 만들어 내오던 원의 엄마는 남편의 죽음으로 실성을 하기에 이른다.

 

 

소설 중반까지 이어지던 동화 같던 분위기는 삽시간에 우울한 모드로 바뀌고 말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시련이 닥친 은철을 보며 순분네는 자신이 찧고 까불며 뒷담하던 새댁네의 시누이에게 너무나 미안해진다. 피아니스트로 탄탄대로를 걸을 것 같았던 원의 고모는 불의의 사고로 앉은뱅이가 된 후 똥을 못 눠서 어땠다는둥, 목숨을 버리면서 어떻게 했다는 둥 신나게 떠들어댔었다. 아들 은철이 한 방에서 그 모든 말을 듣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때는 은철이 다치기 전이었다. 작가는 은철을 스파이 활동 때문에 그 방에 앉혀둔 이유도 있겠지만 순분네의 뒤늦은 후회와 자각을 위한 장치가 아니었을까?

 

 

원의 집에 들이닥친 불행은 작가도 언급했지만 인혁당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국가가, 권력의 유지를 위해 저지른 범죄행위였음을 30여 년이 지나서야 인정했지만 저렇게 한 가정을 파탄내버린 책임은 누가 진단 말인가? 당시 희생된 분의 유족 중에 원이 같이 어렸던 자녀가 있었을 것이다. 가장의 부재와 빨갱이라는 굴레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우리같은 사람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인혁당 사건 처럼 우리 역사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들이 아주 많다. 그러나 내 가족이거나 친척이 아니라면 그들의 고통이 어떨지 알기 어렵다. 어떤 고통인지 모르므로 이해는커녕 공감도 할 수 없다.

 

p.301~302

 

그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누가 알까요? 죽을 때까지 어떻게 견뎠는지 누가 알까요? 그이 몸이 성한 데가 없었어요. 머리... 가슴... 팔다리... 손발... 어디 하나...”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그이가 어떤 사람인데... 그 악마들이... 어떻게 하면 사람을 그렇게...”

그건 그이가 그은 거였어요... 자기 손으로 그은 거였어요...”

 

나는 새댁이 남편의 시체를 보고 와서 순분네에게 포효하듯 하던 저 말을 읽으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나의 시어머니가 아주 오래전 남편의 시신을 찾아 헤맸던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올해 100세가 되신 어머님은 여순 사건 때 첫 남편을 잃었다. 남편이 여순 사건 때 군인이라서? 아니었다. 큰집의 형님을 잡으러 온 정부군이 형님 대신으로 남편을 잡아갔고 감옥에 1년 가까이 수감되어 있다가 사살되었는데 한참이 지난 후에야 시신 수습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머님은 거의 70여 년이 지난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말씀하셨다. 얼마나 한이 맺히셨을까.

 

 

구덩이에 던져둔 시신들 사이에서 남편을 찾아야 했으므로 어머님은 그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하나하나 들추어 볼 수밖에 없었다. 총살당한 시신들이었기에 피로 진창이었던 무더기 속에서 겨우겨우 남편을 찾아냈다. 당신이 옥바라지하면서 만들어 들여보냈던 상의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남편을 붙잡고 미친 듯이 울었다던 어머님의 얘기를 듣지 못했다면 새댁이 남편의 시신을 보고온 뒤 순분네에게 울면서 말하던 저 장면에서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

 

 

국가가 저지른 폭력이 개인의 삶을 파탄내고 어마어마한 트라우마를 남긴다. 명예회복과 금전적 보상으로 그 상처가 치유될 리 없다. 우리 시어머니는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으며 남편도 명예회복 되지 않았다. 우리 같은 일반 국민들이 이런 소설 작품을 읽으며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알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작가는 타인의 고통을 도대체 모른 체 할 수 없기에 이런 소설을 썼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을 읽어야만 한다.

 

 

'오래전 이곳에 삼악산이 있었지

북쪽은 험하고 아득해 모르네

남쪽은 사람이 토우가 되어 묻히고

토우가 사람 집에 들어가 산다네

그래봤자 토우의 집은 캄캄한 무덤'

 

 

토우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토우가 아닌 사람이었던 때의 이야기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여기까지 쓰고 리뷰를 끝내려고 했는데 자꾸만 뭔가 미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두 번 연거푸 읽으면서 리뷰를 잘 쓰겠단 욕심이 났다. 그런데 이런 편지 추신 같은 문단을 덧붙이다니... 할 말과 욕심은 많지만 실력이 안 되는 탓임을 절감할 따름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도대체 울지 않을 수 없었고 리뷰를 쓰면서도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이렇게 울었다는 것을 자꾸 쓰면 글이 너무 감정적이 될 것 같아 덧붙이지 않으려 했으나 솔직한 감정을 쓰고 싶었다.

 

 

소설 마지막에 원은 말을 잃었고, 언니 영과 인형 동생 희와 함께 큰아버지네 집으로 가게 된다. 순분네가 영,원,희 자매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다.

 

 

p.326

 

 

원은 영의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순분이 다가가 안아주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우물에 묶여 있던 원을 안았을 때도, 덕규의 장례식에서 쓰러진 원을 안았을 때도, 순분은 지금처럼 가슴이 저리지는 않았다. 비록 허깨비로라도 새댁이 원의 곁에 있었어야 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분은 갓 딴 살구처럼 솜털이 보송한 원의 볼에 입술을 대고 기도하듯 속삭였다.

제발... 잘 살아라... 원아...”

 

 

 

 

 

**위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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