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8일, 조력자살 - 나는 안락사를 선택합니다
미야시타 요이치 지음, 박제이 옮김 / 아토포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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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책을 읽으면서 만약에 나라면?’이라는 생각을 거의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런 가정이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렇게 될 리 없는데 가정해보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했고, 거의 매일 하루 한 권씩 책을 읽고 리뷰를 쓰다 보니 깊이 생각하기에 시간이 모자랐던 것도 사실이다. 문학은 문학대로, 비문학은 비문학대로 그 책의 장단점을 정리하는 위주의 리뷰를 써왔다.

 

그런데 <1128, 조력자살>을 읽으면서는 나라면 어떻게 할까?’를 계속 생각했다. 이 책은 일본인 저널리스트 미야시타 요이치씨가 쓴 조력자살 팔로잉 논픽션이다. 고단샤 논픽션상을 받은 전작 <안락사를 이루기까지>의 속편이다. 다계통 위축증(MSA)를 앓는 여성 고지마 미나씨가 스위스의 라이프서클이라는 곳의 조력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린다. 처음 그녀가 작가에게 메일을 보낸 시점부터 인터뷰, 라이프서클에서의 마지막, 그리고 사후에 그녀의 언니 둘과의 정리 인터뷰까지 촘촘하게 실었다.

 

처음 고지마씨의 메일과 그녀의 블로그 글을 그대로 소개하고 그녀의 지나온 생에 대해 자세히 서술할 때 조금 답답했다. 그녀가 조력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당위성을 표현하려는 건 알겠는데 성공했단 건지 못했단 건지를 알려주지 않고 뜸을 들이는 기분이었다. 거기에 또 다른 안락사를 희망하는 남자, ‘요시다 준의 스토리까지 교차 편집되어 있어 더 속도가 느렸다. 당장 뒤쪽으로 가서 결과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참았다. 밀당의 편집력이 작가의 것인지 편집자의 기술인지는 몰라도 나같이 성질 급한 사람도 고지마의 1128일을 인내하며 같이 맞이하도록 만들었으니 성공했다. 인정!!ㅎㅎ

 

나는 연명치료 거부 의향서를 써두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아직 실천은 못했다.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본인에게 있고 그것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김영하 작가는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하고 싶을 때 필요한 조력자의 모습을 묘사했다. 작년에 그 소설을 읽고 내 생의 결정을 내가 할 수 있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싶었고 스위스의 조력자살에 대한 기사를 찾아 읽게 되었다. 그 기사에는 동행했던 친구의 트라우마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는데 그 현장을 지켜보는 이도 상처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했었다.

 

<1128, 조력자살>의 저자는 안락사를 원하는 사람들의 사례를 소개하며 가족과의 소통을 아주 중요하게 다룬다. 요시다씨는 말기암 환자로 아버지와 여동생에게 알라지 않고 스위스로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스위스로 가기 전에 암은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 작가는 그가 가족의 관심을 받고 싶고 그들 옆에서 죽음을 맞고 싶어 했다고 확신했다. 그와 더 이상 연락이 되지 않아 집에 찾아가서 부친을 만나고 어떻게 죽었는지를 들은 작가는 스위스가 아닌 가족곁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 요시다씨에겐 더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지마씨는 싱글이라 언니집에 들어가서 살면서 보살핌을 받았으며 언니들은 그녀의 고통을 생생히 지켜봤다. 여러 번의 자살 시도를 막으면서 동생이 스위스에 가야만 하는 이유를 서서히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 자매는 같이 스위스행 비행기를 탔고 언니들은 동생의 최후를 지켜보았다. 행복하게 떠나는 동생의 곁을 지킨 것은 그들에게도 만족감을 주었다. 질병명도 다르고 마지막도 달랐지만 작가는 요시다씨와 고지마씨의 사례를 통해 그들 곁에 가족이 함께 했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짚고 있다.

 

이 책은 안락사가 주제이지만 작가는 자신의 의견을 내지 않는다. 르포 기사를 쓰는  전공을 십분 발휘하여 안락사를 다양한 각도로 살핀다. 어떤 사람들이 안락사를 선택하려고 하는지, 일본을 포함한 세계의 안락사법을 알려주고, 일본에서 불법이지만 스위스의 단체 라이프서클이나 디그니타스라는 곳에서는 합법적으로 가능하다고 정보를 주는 것처럼 보이나 그렇다고 적극 권장하는 것도 아니다. 선택은 독자에게 맡기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임을 잊지 말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보였다. 조력자살 당일에 딸에게 말하지 않고 왔다며 집으로 돌아간 독일 남성의 사례를 굳이 왜 썼겠는가.

 

그래서 나도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고지마씨처럼 뇌는 즉,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점점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침대에 누워서 호스를 통해 음식을 주입받아야 하고 똥오줌을 남이 치워줘야 되는 상태가 된다면? 살아야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몸보다 인간답지 못한 상태로게 누워있어야만 하는 것이 더 비참한 일이다. 그녀처럼 목을 매달려고 해도 몸에 힘이 없으니 계속 실패하게 된다면 조력자살을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가족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므로 조력자살의 당위성을 설득시켜서 유럽의 어디론가로 가야할 때 동행해야 한다. 과연 가능할까?

 

고지마씨의 상황에 나를 그대로 대입해 보았다. 나 역시 그녀의 선택대로 할 것 같다. 허나 나의 가족이 그 언니들처럼 적극 동조해줄 지는 모르겠다. 여기서 그녀와 나의 차이 발견! 그녀는 너무나 긍정적이고 밝고 언니들과의 유대관계가 좋다.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있었지만 그 자매들의 관계는 돈독했다. 두 언니의 성격은 정반대였지만 각각의 개성이 동생을 간호함에 있어 서로 보완이 되었다. 자매가 없는 나는 저렇게 사랑 넘치는 자매간이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내 죽음의 결정권이 내게 있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과연 내 마지막이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어떠한 질병으로 정말 안락사를 원하는 상황이 닥칠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죽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 없는 자매를 아쉬워 할 일도 없으며 라이프서클에 보낼 서류나 이메일을 영어로 써야할 걱정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는 꽤 시니컬한 결론에 이르렀다.

 

, 이 책을 읽다 흥분한 부분이 있는데 의사소통 때문이었다. 책에서 언급된 두 단체 라이프서클과 디그니타스는 자원봉사도 아니고 돈 받고 하면서 고객의 편의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게 좀 화가 났다. 이메일로 연락해야 하는데 무조건 영어다. 그것을 번역하는 작업에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고 자꾸만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 안타까웠다죽음의 시간은 째깍째깍 다가오는데 일의 속도가 느린 이유가 언어 때문이라니 이 무슨 어불성설인가. 신청하는 사람의 언어로 소통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일까?

 

고지마씨가 우리나라에 유학 왔었고 한일 번역일을 하면서 살았다고 하니 웬지 가깝게 느껴졌다. 그녀의 사진을 순서상 그녀의 죽음 이후로 배치해 두었는데 이 역시 편집의 기술인 것 같다. 죽음 후에 보게된 생전에 그녀의 표정이 너무나 환해서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거의 마지막에 그녀의 가족사를 언급하면서 할머니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어쩐지 정감이 가는 얼굴이더라니... 이 무슨 비과학적 논리냐 싶겠지만 정말 내 맘이 그랬다는 것을 쓰고 싶었다.,,

 

정리하자면 이 책은 안락사를 원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사례를 살피고, 안락사 법제화의 필요성을 독자들에게 묻는다. 안락사만이 정답이 아니라 완화치료로도 존엄사는 가능하다는 쪽의 주장도 같이 싣고 있다. 고지마 미나씨의 마지막 날인 1128일까지를 팔로잉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지만, 일본 사회에서 안락사가 더욱 공론화되기를 바라는 작가의 의도도 읽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역시 법제화에 앞서 안락사를 일반인들에게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안락사가 당장에는 중증 질환을 앓는 당사자와 가족의 문제로 보이지만 누구에게나 죽음은 닥칠 것이므로 미리 얘기하고 토론해서 정하면 얼마나 좋을까. 우린 그러질 못하는 게 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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