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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말할 진실 ㅣ 창비청소년문학 93
정은숙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평점 :
<내일 말할 진실>은 ‘창비 청소년 문학’ 93번째로 선정된 정은숙의 소설집이다.
이 책에는 단편 소설 7편이 실렸으며
각 단편은 청소년 소설임에도 다루는 소재가 다양하다. 교사의 성추행, 가족의 죽음, 학교 폭력과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 버티고(vertigo:비행착각현상), 가난이 성적과 연애에 미치는 상관 관계, 그리고 공연음란죄까지. 이렇게 스펙트럼 넓은 소설 속 주인공이 모두 청소년이다. 자칫 “애들이 뭘 알아?” 라며 이 복잡한 세상 속 진실을 아이들이라 불리는 청소년(이 책에서는 주로 고등학생)이 알 리가 없다고, 혹은 알아선 안 되는 존재로 치부한다.
하지만 정은숙 작가는 청소년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어른인 나조차 맞닥뜨려본 적 없는 각종 사건에 내몰린 주인공들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과 동시에 작가가 너무한 게 아닌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파르르 떨리는 나비의 날갯짓 같이, 너무 사소해서 놓칠 뻔한 사건 속에 숨겨진 진실을 알아차리는 건 아이들이다.
그 진실이 얼마만큼 큰지 아이들은 가늠할 수 없고 어른들은 알면서도 모른척하며 살아간다.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 비록 자신의 오류라 하더라도 밝히고 바로잡아야 하지만 어른들은 그러지 않는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알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귀찮아서, 자신의 권력으로 숨길 수 있어서... 갖가지 이유로 모른 척 외면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우리가 놓지 말아야할 정의와 신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7편의 소설 중 문제적 소재를 다룬 것은 표제작 “내일 말할 진실”이다. 주인공 세아가 따르던 임선생님이 성추행 교사로 몰려 학교를 떠나게 된다.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인 예주는 학교에 남았고, 그 일은 세아 본인과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주가 밝힌 사건이 일어난 그날, 그러니까 예주가 상담실을 나간 후 세아가 임선생님과 상담실에 들어갔던 그 날 일이다. 그곳에서 임선생님은 교지 편집실에 보낼 프로필 사진을 세아에게 찍어달라고 했는데, 세아는 그 사진이 예주의 폭로에 반전용으로 사용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예주가 폭로한 사건정황의 빈틈을 임선생님은 세아에게 찍어달라고 한 사진으로 뒤집었다. 늘 그렇듯 사람들은 처음엔 임선생님을, 나중엔 예주를 비난하기 바빴다. 급기야 대입시에서 좋은 성과를 내는 임선생님을 다시 불러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사건에 휩쓸린 세아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외삼촌에게 사기당해 전 재산을 날린 엄마는 끝까지 외삼촌의 진심만은 믿는다고 했다. 세아는 자신에게 다정하게 격려하던 임선생님의 모습이 거짓이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그러나 세아는, ‘오래전 제일 작은 인형을 쓰다듬으며 외삼촌의 진심을 믿었던 엄마처럼 혹시 나도 안쪽에 숨어있는 인형은 까맣게 모른 채 듬직하게 우뚝 선 제일 큰 인형만을 보면서 오해한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그날 상담실에서 자신이 본 것,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이 진실이라 생각하지만 당당하게 의견을 피력하지 못한다. 한편 ’무엇보다 볼품없고 초라해도 진실의 편에 서고 싶다‘는 예주의 말이 자꾸만 떠오른다.
이 소설의 서사는 두 축이다. 임선생의 성추행 사건과 세아의 편의점 알바 생활이다. 엄마가 사기당한 후 부모의 이혼으로 고모네 집에 얹혀사는 신세인 세아의 경제적 궁핍은 편의점 알바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든다. 고모의 생리대를 꺼내 썼다가 심한 퉁박을 받고, 진상 손님들을 대해야만 하는 스트레스는 통장에 입금되는 알바비로 상쇄된다. 작가가 예주의 성추행 사건과 외삼촌의 사기를 같이 진행시킨 것은 인간이 타인에게 보여주는 한 면이 그의 전체가 될 수 없음을 말하려는 게 아닐까 싶다. 누나에게까지 사기 친 동생의 그 진심만은 믿는다는 엄마와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던 임선생님의 행동을 진심이라 생각하는 세아. 그들의 진심이 분명 거짓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진심이 그들의 전부도 아니다. 한 번의 행동으로 인간의 다면성을 말할 순 없음을 이제 세아도 깨달아 갈 것이다. 그것을 엄마보다 일찍 겪은 세아는 어쩌면 엄마와는 다른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예주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는 작가의 문장이 세아를 믿어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독자에게 질문도 던진다.
“진실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거둘 용기가 있는가?”
이것은 나서서 진실을 말하라는 말보다 무겁다. 용기있게 나서기 전, 남들은 모르고 자신만 아는 것을 맞다고! 안다고! 인정하는 것이 더 큰 용기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알리려는 묘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마지막 소설 “그날 밤에 생긴 일”도 유사한 주제이다. 진미식당 앞에서 바지 지퍼에 두 손을 모르고 이상한 행동을 하던 남자의 사진을 찍은 묘성이 경찰에 신고를 한다. 묘성이 보기에 변태 같은 짓을 한 남자를 신고했더니 경찰은 그 사건을 종결하겠다는 전화를 걸어온다. 일단 근처 CCTV에 묘성이 특정한 사람이 찍히지 않았고, 그 시간대 근처에서 신원 확인이 된 남자는 수년 전부터 청소년 선도위원으로 활동한 신분이 확실한 사람이니 종결 처리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학생이니까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라는 훈계를 잊지 않았다.
이 소설에서는 담배피우는 여학생인 묘성이 학교와 어른들로부터 어떤 시선을 받는지, 청소년 흡연자이기 때문에 따르는 행동 제약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그 때문에 한 번 더 조사 요청을 했을 때는 오히려 묘성이 죄인인양 취급받는다. 그날 밤 CCTV에 묘성이 담배를 피우며 지나가는 장면이 찍혔기 때문이다. 이정도 되면 오순경의 말처럼 똥밟은 셈치고 그냥 넘어가면 될 일이지만 묘성은 그러지 못한다.
소설의 마지막 문단, 묘성은 ‘누가 봐도 충분히 훌륭한 그 남자도 어둡고 쓸쓸한 밤거리에서 했던 몹쓸 짓을 인정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오순경에게 전화를 건다. 아직 학생이고, 학생에게 금지된 흡연을 하는 묘성의 발화는 어른들에게 신뢰는커녕 무시당하기 십상이다. 그런 묘성의 행동은 어쩌면 세아보다 용기있다고 하겠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날의 진실을 가지고, 잘못된 건 잘못된 게 맞다고 주장하니 말이다. 교사는 한 번만 더 흡연이 들키면 퇴학이라며 협박하고, 공권력의 대표격인 오순경은 그 동네 권력자를 감싸기에 급급하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는 묘성은 세아의 업그레드 버전이라 하겠다.
이 소설을 읽는 학생들에게 저런 딜레마적 상황들이 얼마나 생길지는 모른다. 하지만 소설 속 제 또래의 행동을 보며 만약 유사 상황이 생긴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보는 것으로 충분한 간접경험이 될 것이다. 혹은 친구들과 이 소설을 읽은 후 그런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좋겠다. 나와 다른 친구들의 생각을 들으며 문제해결하는 다양한 방식을 접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앞으로 겪게 될 현실이 조금이나마 덜 힘들고 덜 우울했으면 좋겠다. 어른으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바람뿐이라 미안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