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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는 농담 - 허지웅 에세이
허지웅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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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허지웅이라는 사람을 모른다. 얼굴과 이름만 알았다. 그의 글을, 책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고, 출연한 TV프로그램을 본 적도 없었다. “에이, 설마! 거짓말!” 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허지웅의 신간 <살고 싶다는 농담>의 가제본 서평이벤트에 신청했다. 그럼 허지웅에 대해선 정말 아무런 정보가 없나? 그건 아니다. 영화평론을 하고, 성격이 좀 까칠하다 하고, 얼마 전 암투병을 했다는 내용까지. 들어서 알고 있는 정보가 몇 가지 있긴 있었다. 내가 그에 대해 모른다고 한 것은 그의 글을 모른다는 뜻이었다. 칼럼니스트고 에세이와 소설까지 썼는데 읽어본 적이 없으니 그의 스타일에 대해 알지 못한다. 4년 만에 냈다는 신작 에세이 <살고 싶다는 농담>으로 그의 세계, 그의 사고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이 책에서 만난 작가 허지웅은 까칠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젊어서 꽤 고생한 것 같았고, 외로움과 피해의식에 절어 지낸 시절도 있었지만 이젠 청년들에게 불행을 동기로 바꾸면 행복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우리는 자신이 가장 힘든 짐을 지고 있는 것 같고, 남들은 뭐든 편하게 성취하는 것만 같아 억울하기 그지없다. 이 불행의 끝은 어디일지 가늠이 되지 않을 때, 누군가에게 물어나 보고 싶다! 난 언제 인정받을 수 있나? 대체 이 어둡고 막막한 터널은 끝나기나 할까?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누구나 제 것의 돌덩이를 지고 언덕을 오르는 시시포스처럼, 언제 올지 모를 고도를 기다리는 사내들처럼 묵묵히 견딘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산다. 작가도 견뎌온 시간들이 있기에 조금 먼저 살아본 인생선배로서 조언을 이 책에서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의 팬이라면 4년 만에 나온 신작이니 반가울 것이고, 선배의 조언이나 격려를 받고픈 이들에게도 편하게 읽힐 책이다.
이번 책으로 처음 접해본 그의 스타일은 과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의 스타일에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지점은 엄살이 없다는 것이다. 악성림프종을 치료하고 다시 못 올 것 같았던 자신의 길로 다시 돌아온 사람치고는! 본인의 암 치료과정이나 심경에 대한 글도 몇 꼭지 되지 않는다. 내가 얼마나 힘든 투병을 했는지 아느냐며 징징거리며 과시했다면 계속 읽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견뎌낸, 계속 버텨보자는, 함께 행복하자는 문장들이 시선을 길게 붙잡았다.
"우리의 삶은 남들만큼 비범하고, 남들의 삶은 우리만큼 초라하다."
"‘함께 버티어 나가자’라는 말을 좋아한다. 삶이란 버티어 내는 것 외에는 도무지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평정심과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구별할 수 있는 밝은 눈을 갖게 되기를."
"나와 같은 시행착오를 하지 않기를, 불행하거나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이 책에서 내가 인상깊게 읽은 부분은 니체에 대한 내용이다. 괜찮다는 말이 필요할 때 그는 니체를 읽는다고 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어도 전혀 감이 오지 않았고, 그래서 전문가들의 해설 강의를 들어보았으나 더 어렵게 느껴졌고, 그러니 니체는 어려운가보다 했다. 헌데 10쪽도 안 되는 니체 이야기를 읽고 ‘이렇게 쉬울수가!’ 하며 놀랐다. 아마 또 며칠 후면 니체가 뭐랬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가 설명한 ‘영원회귀’는 기억할 것 같다.
니체는 루 살로메 때문에 끔찍하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와 함께 했던 아름다운 시간마저 부정될 순 없다는 것! 삶의 가장 기쁜 순간을 반복하기 위해서라면 가장 추악한 순간마저 얼마든지 되풀이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니체는 차라투스트라가 되어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다.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늘 그렇듯 책을 읽다가 다른 예술 작품을 소개받곤 하는데 허작가에게 소개 받은 영화가 있다. 1981년 작품 <깊은 밤 갑자기>다. 2017년 작고한 배우 김영애씨를 추억하며 쓴 글에서다. 그는 김영애를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여자 캐릭터 중 한명으로 꼽는다고 했다. 또 80년대 한국 공포영화의 가장 빛나는 성취라는 찬사도 있어 한번 보고 싶다. 이렇게 한 책에서 다른 책이나 영화를 소개받을 때, 소개하는 그 작가의 평가에 나도 동의 가능한지 아닌지 생각하며 보는 맛이 있어 즐겁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글은 “보통사람 최은희”였다. 다 읽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글 말미에 작가가 보통사람 최은희의 삶에 대해 꼭 남기고 싶었다고 한 부분에서 터진거다. 몇 쪽 안 되는 그 짧은 내용만으로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곡진했을지, 요약된 그녀의 인생 그 행간에 수놓인 한땀한땀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졌다. 사실 이 책의 앞부분에서 웬 청년이 암투병중인 모친을 만나달라는 부탁을 작가에게 했다는 내용을 읽으며 나는, ‘사람들이 참 유별스럽다. 아프면 아픈거지, 유명인에게 굳이 와달라고 하는 건 뭐냐? 작가도 암투병하다 보니 맘이 많이 약해졌나보네. 또 그 부탁을 들어주네...’라고 생각했다.
만약 작가가 병문안을 안 갔더라면 내가 최은희씨의 삶을 몰랐을 게 아닌가! 고마웠고 잘 읽었다. 처음에 들었던 내 짧은 생각이 미안했다.
앞으로 작가의 글을 챙겨 읽을 것 같다. 그의 책에서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 아직 쓸 수 있을 때 옳은 이야기를 하기보다 청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남기고 싶다 는 그의 희망도 부디 지켜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