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은 가을도 봄
이순원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젊은 날 기억 저편의 빛바랜 사진첩을 열어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은밀하고 아름답다. 당시로는 더없는 어둠이었어도 돌아보면 그것이 바로 우리 청춘의 가장 꽃다운 시절처럼 여겨지는 한 장 한 장 추억의 물증과도 같은 사진이 내게도 여러 장 있다.

 

 

위 문단은 주인공이 첫사랑을 회상하는 장면의 도입부다. 이런 내용이 나오기를 기다렸는데 책의 중반부가 되어야 첫사랑 이야기가 나오다니. 내가 작가의 첫사랑에 너무 꽂혀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을 기대했는데 내용은 70년대 후반 정치사회적 상황 속의 대학생 개인과 그 개인의 집안이야기가 더 많았다. , 그제서야 내 맘대로 책 소개를 읽었다는 걸 알았다.

 

이순원 작가의 신작 <춘천은 가을도 봄>의 책 소개는 1970년대 후반 춘천에서 청춘을 보냈던 한 소설가의 회고담 이라고 되어 있다. 청춘 회고담인데 왜 첫사랑으로 읽었는지 모를 일이다... 작가의 <19>라는 책을 오래전에 읽었다. <19>13살에서 19살까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였다면 <춘천은 가을도 봄>은 그 후 20대 초반의 이야기인 것 같아 궁금증이 일었다. 읽어보니 <19>와 이 책의 내용이 연결되는 건 아니었다. 각각의 개별적인 소설에서 등장인물이 동일할 리 없는데 참 내 멋대로 생각했구나 싶다.

 

<춘천은 가을도 봄>의 주인공 김진호는 명진이라는 강원도 어느 가상도시의 술도가의 차남이다. 대학교 1학년 때 시위 선언문을 다듬은 죄로 처벌받고 학교에서도 제적된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원이고 지방 유지였던 부친의 뒷배로 감옥에 가는 것만은 면하게 되는데 이 일이 주인공 의식에 부채감으로 자리 잡는다. 김진호는 서울 생활을 접고 춘천에서 두 번째 대학 생활을 한다. 1학년 1학기에 그는 동기들과 어울리지 않고 공부에만 몰입하는 요즘 말로 아싸로 살아간다. 전액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고 2학기에는 학보사에 들어가면서 서서히 사회활동의 보폭을 넓히며 2학년 입학식에서 채주희를 만나게 된다.

 

이 책의 주 시간적 배경은 주인공이 춘천에서 두 번째 대학생활을 한 1977년부터 79년까지이며, 공간적 배경은 춘천이다. 작가와 연배가 비슷한 독자는 정말 청춘을 회상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 시기를 국사시간에 한국현대사로 배운 독자라면 거의 역사책 읽는 것 같을 수도 있겠다. 사복경찰이 대학교에 들어와 학생들을 감시하고 독립운동하듯 그들을 피해 모여야 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젊은 독자들은 외계이야기만큽 생소할 것이다. 그 시기를 소설 한 권에 담아내는 작가가 있으니 독자로서 고마운 일이다. 춘천에서 대학을 다녔거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당시 춘천과 대학가 근처의 분위기를 옛날 흑백필름을 보는 느낌으로 감상할 수 있다.

 

비록 경영학과를 다니고 있지만 김진호에게 친일가문의 자손이라는 원죄와 유신체제라는 시대적 억압은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글로 표현해야한다는 책임감으로 나타난다. 4.19때 다리를 다친 당숙에게서 문학적 영향을 받아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소설을 필사하고 있다는 진호에게 당숙은 이런 조언을 했다.

 

"서두르지는 마라. 그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게 아니라 아직은 앞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새벽에 하나둘 이슬처럼 맺혀 오는 거니까." 

 

진호는 그 말이 좋았고, 세상의 밝은 기운들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당시의 유신체제는 진호를 계속 절망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통일주체 국민회의 선거 두 번째 출마도 마찬가지였고.

 

그는 첫사랑 채주희와 이루어졌을까? 채주희는 양공주의 딸, 혼혈아였다. 70년대에 혼혈아였다면 얼마나 심각한 차별을 받았을지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둘의 사랑을 응원하는 마음과 함께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란 예상이 동시에 들어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둘은 손붙잡고 학교 행사에 같이 갈 수 없었고, 혼혈아를 아르바이트로 써주는 곳도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음악다방 DJ였는데 외국인인척 하는 것이었다. 외국 사람이 한국말도 잘 한다고 여기도록 내버려두었고 그녀는 외모 덕분에 인기 DJ가 되었다. 요즘은 혼혈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지만 그 때는 엄청난 걸림돌이었다. 주희는 20년만에 찾게 된 아버지가 있는 미국으로 떠나고 진호는 입대를 하게 되면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그리고 진호는 부대에서 주희의 마지막 편지를 받는다.

 

생각하면 자꾸 슬픈 마음이 들어. 진호 씨처럼 돌을 던지며 사랑할 진정한 조국을 갖지 못했다는 게, 엄마 때부터 숙명처럼 겪어온 모멸감이. 어쩌면 그것이 이 땅에 던져진 나의 원죄가 아닐까 싶어. 그냥 떠나기엔 내 가슴이 너무 작아. 사랑해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진호 씨를 참 많이 사랑했어.

 

진호와 주희가 가진 원죄는 달랐지만 비슷한 면이 없지 않다. 그 근원이 가족에서 온다는 것은 유사하나 집안의 재력은 정반대였다. 진호는 주희에게서 아웃사이더로의 동질성을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아픔에 공감하고 사랑하게 된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슬프지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다고들 말한다. 에필로그의 마지막에 작가의 말에서도 이렇게 표현된다.

 

돌아오는 길에 올려다보았던 유난히 푸르고 슬프게 빛나던 별 하나 지금도 내 가슴 한가운데 떠 있다.”

 

이 소설의 첫 문단에서 작가는, 차라리 얼룩이라고 불러도 좋을 나 자신의 이십대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고 했다. 청춘은 돌아오지 못할 시절이기에 미화한다. 그러나 작가는 얼룩이라는 부정적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로 표현했다. 작가가 말한 얼룩은 더러운 자국이라기보다 상처가 남긴 흔적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는 긍정성을 담고 있다. 유안진 시인의 시를 제목으로 뽑은 것은 그 긍정의 의미를 완결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春川이라는 단어는 언제든 봄이니까.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라는 시를 이 책 덕분에 알게 되었다. 참 이쁜 시라서 옮겨 써본다.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

 

유안진

 

겨울에는 불광동이, 여름에는 냉천동이 생각나듯

무릉도원은 도화동에 있을 것 같고

문경에 가면 괜히 기쁜 소식이 기다릴 듯 하지

추풍령은 항시 서릿발과 낙엽의 늦가을일 것만 같아

 

春川이 그렇지

까닭도 연고도 없이 가고 싶지

얼음 풀리는 냇가에 새파란 움미나리 발돋움할 거라

녹다만 눈 응달 발치에 두고

마른 억새 깨벗은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피고 잇는 진달래꽃을 닮은 누가 있을 거라

왜 느닷없이 불쑥불쑥 춘천을 가고 싶어지지

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

가서, 할 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라

 

그저, 다만 새봄 한 아름을 만날 수 잇을 거라는

기대는, 몽롱한 안개 피듯 언제나 춘천 춘천이면서도

정말, 가본 적은 없지

엄두가 안 나지, 두렵지, 겁나기도 하지

봄은 산 너머 남촌 아닌 춘천에서 오지

 

여름날 산마루의 소낙비는 이슬비로 몸 바꾸고

단풍 든 산허리에 아지랑거리는 봄의 실루엣

쌓이는 낙엽 밑에는 봄나물 꽃다지 노랑 웃음도 쌓이지

단풍도 꽃이 되지 귀도 눈이 되지

春川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