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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삼대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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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작가의 신간 <철도원 삼대>를 사전 서평단 자격으로 받아서 읽었다. 가제본으로 222쪽인데 출판될 책은 600쪽이 넘는다. 가제본은 전체 3분의 1분량으로 앞부분에 해당되는 것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이 책은 철도원으로 살아온 집안 삼대에 걸친 이야기다. 그러면 거의 대하소설 분량으로 한 권으로는 양이 적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요즘 긴 호흡의 대하소설로는 독자에게 어필하기 힘들 것이므로 한 권짜리로 낸 게 아닐까 싶다. 글의 호흡을 빠르게 가져간다면 100여 년에 걸친 이야기도 한 권에 담을 수 있겠지만 작가의 필력이 더 중요할 터인데 그것은 황석영 작가니까 믿을 수 있겠다. 본 책이 출간되면 연결해서 읽어 보고 싶다.
일제 강점기, 일본은 조선 수탈을 용이하게 하려고 이 땅에 철도를 깔았고, 조선 민중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는 건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나는, 한국사를 배웠어도 노동 운동하면 전태일밖에 모르는 무식자이다보니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일제 강점기때부터 노동자로서 어떻게 살아왔고 그들의 노동력이 우리나라의 기반을 어떻게 닦아왔는지 놀라며 읽었다.
소설은 이진오가 발전소 공장의 굴뚝 위에서 단식투쟁하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그의 노동자 인생은 부친 이지산, 조부 이일철, 증조부 이백만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훑어나간다. 필부로 태어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가문도 돈도 아니었다. 건강하게 태어난 몸으로 그저 성실하게 일하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일본인의 사환으로 일할 때 일어를 몰라도 눈치빠르게 적응했으며 철도공사 현장에서도 빠르게 기술을 취득해 숙련공이 되었으며 야학에서 <자본론>을 읽고 쓰며 노동운동의 당위를 알아갔고, 독서회를 결성해서 모임을 꾸려나갔다.
짧은 분량임에도 100여 년 전 식민치하에서도 성실과 패기로 일상을 살아낸 이 땅의 민중에게 경외심이 들었고 작가에 감탄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제가 아닌 악덕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김용균 노동자가 화력발전소에서 그렇게 희생된 후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자며 김용균법 제정이니 뭐니 하면서 떠들었지만 이번에 또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고 위험의 외주화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얼마 전 일어난 사망사고에서 삼표시멘트는 2인 1조 근무지침을 어긴 것을 하청업체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이 소설의 이진오도 해고 노동자 복직 투쟁중이다. 일제이후 노동력 착취는 이름만 바뀐 자본가들에게 승계되어 왔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은 현재 진행 중이며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매년 산업재해로 2400여명이 죽어나간다. 우리 대부분은 재벌의 자식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노동하며 살아야 한다. 노동에 경중이 있을 순 없으나 스스로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자신은 산재사고로 죽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더럽고 힘든 곳에서 일을 하는 이들이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함에도 그들은 생명의 안전도 담보 받지 못한 채 노동 현장에 투입되고 급여도 가장 낮다.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노동운동뿐 아니라 정치권에서 법안으로 연결되어야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 소설에서는 철도현장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책에서 다루지 않는 우리나라 노동의 역사를 배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 100여년 전 민중들의 생활 양식도 엿볼 수 있다.
“서울 인근 지방 사람들은 초봄이 지나면 인천 주안서 온 조기를 짝으로 들여놓았다. 조기를 소금에 절여 집집마다 채반에 넣어 장독대에 두거나 새끼줄에 매달아 담장에 널어놓고 햇볕에 말려 굴비를 장만했다. 초겨울에 김장을 하듯이 봄에 조기를 절이고 말리는 일은 집안의 제철 행사였다.”
굴비가 먹고 싶으면 시장에 갈 것도 없이 인터넷이나 홈쇼핑에 주문하면 아이스박스에 깔끔하게 포장되어 집으로 바로 배송되는 시대에, 저런 풍속이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1세기 만에 우리 사회는 변한 것, 사라진 것이 너무나 많다. 이 소설은 그것을 기억하게 해주며, 인정할 여러가지 중에 이 의미도 크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나는 어릴 때 생선을 자주 접하지 못해서인지 생선은 그리 즐기지 않는 편이다. 물론 서울 사람들의 저런 굴비장만 풍속을 알지도 못했다. 하지만 안동식혜는 잘 알고 좋아하는 음식이다. 살얼음 동동 뜬 발그스름한 그것을 한 입 들이켜 입안으로 들어온 무를 씹을 때 그 아삭함은 어떤 음료에도 비길 바가 못 된다. 그러나 그 맛을 본지도 한 10년은 된 것 같고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이는 안동식혜의 맛을 즐기고 싶어 안도현의 “안동식혜”를 소리내어 읽으며 입맛을 쩝쩝 다실 뿐이다.
“안동식혜를 담아온 사발에는 잘 삭은 밥알이 동동 뜨고 나박나박 썬 무와 배도 뜨고 잣이나 땅콩 몇 알도 고명처럼 살짝 뜨는데...”
요즘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는 만날 수 없는 역사와 서사가 있는 이런 책은 앞으로 학생들이나 젊은이들에게 문화사 및 역사 교재로 쓰여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민중의 노동사 속에 여성들의 삶과 노동도 빠지지 않아서 좋았다. 그리고 철도원 삼대의 가족사와 기이한 에피소드를 읽으면서는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과 천명관의 <고래>도 오버랩 되었다.
이번 소설은 한국문단의 거장이라는 수식이 빛바래지 않았길 바란다. 가제본으로는 그렇지 않았는데 본 책도 실망하고 싶지 않다. 남은 3분의 2는 어떨지 꼭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