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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바침 - 결코 소멸되지 않을 자명한 사물에 바치는 헌사
부르크하르트 슈피넨 지음, 리네 호벤 그림, 김인순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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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을 빌리고 돌려주지 않은 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의도하진 않았는데 빌려 읽곤 책장에 그대로 꽂혀 있다가 어느날 발견하곤 돌려주면 될텐데 이러저러한 이유로 돌려주지 못했다.
일부러 안 돌려준 건 아니다!
2. 책을 빌려준 이가 돌려달라고 말할 때 어떤 기분이었나?
나는 조금 언짢았다.
작년 연말 <트랜드 2020>을 지인에게 빌렸다가 돌려달라는 문자를 받고 보니 기분이 좀 나빴다. 책 주인이 돌려달라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생각해 봤다. 흠...내가 그 책 꿀꺽할 사람처럼 보였나? 돌려주기로 명확한 날짜를 정한 것도 아닌데 미리 연락받으니 독촉받는 기분이었다. 만나기로 한 날 책 주인은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했고, 어떤 장소의 경비아저씨에게 맡기는 것으로 돌려주기는 성공했다. 본인이 오지 못할 상황이면 다음 기회로 미룰텐데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서까지 받겠다고 하는 걸 보니 중요한 책인가 보다 싶으면서도 한편 내가 그렇게 못미덥게 보였나? 싶어 또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나는, 쪼잔한 인간이다.
3. 그렇다면 나는 책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한 적이 있나?
물론 있었다.
돌려주지 않은 책보다 더 많은 것 같은데 서로 까먹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 무슨 책이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아 어영부영 넘어가기도 했다. 작년 12월, 독서모임 회원이 내 책 3권을 빌려갔는데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 물론 계속 만날 사이니 돌려받지 못할 건 아니다.
이번 달 모임에서 만났을 때, “빌려간 책 안 가져오셨나요?” 라고 물으려다 말았다.
내가 이렇게 소심했나?
<책에 바침>이라는 책의 ‘빌린 책’ 꼭지를 읽다가 내 경우가 생각나서 위 내용을 써보았다.
<책에 바침>은 제목에서 이미 책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데 부제 ‘결코 소멸되지 않을 자명한 사물에 바치는 헌사’ 라는 문구는 이 책의 내용이 어떠할지 자연스레 연상케 된다. 책을 찬양하는 이야기야 어디에서든 들리고, 한국 작가들에게도 충분히 들을 수 있을 텐데 굳이 생소한 이름의 독일 작가가 쓴 책에 대한 찬가까지 읽어야 하나? 의구심을 가지는 이가 있을듯하여 책날개의 작가소개를 굳이 옮겨 본다.
부르크하르트 슈피넨
1956년 독일 묀헨글라트바흐에서 태어났다. 뮌스터 대학교에서 독일어문학과 사회학, 저널리즘을 공부한 뒤 1989년 같은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7년부터 라이프치히 대학의 독일 문학 연구소에서 글쓰기를 가르쳤고,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에서 열리는 잉게보르크바흐만 상 시상식 수석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1991년 <바다에 떠 있는 뚱뚱한 남자>로 독일 최고의 데뷔 소설에 주어지는 아스펙테 문학상을 수상한 뒤 소설가로 활동하며 잉게보르크바흐만 상, 카롤리네 슐레겔 상 등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긴 토요일>, <다종목 경기>, <자카리아의 고양이>, 에세이 <즐거운 휴일>, <하루의 끝에서>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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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서문에서 책 얘기에 앞서 말(馬)을 먼저 언급한다. 인류에게 최고의 운송수단이자 무기로 쓰였던 말이 어떻게 자동차와 트랙터, 탱크등에게 그 자리를 내주게 되었는지를 짚으며 전자책으로 넘어간다. 종이책은 전자책에게 그 자리를 내어줄 것인가? 작가 인생에서 책은 동반자이자 동거인이었고 조력자이면서 친구였다면서 책이 언젠가 곁을 떠나게 되면, 자신이 잃어버리게 될 것들을 이 책에서 열거해보겠다고 한다. 우리가 그동안 아주 당연시 여기는 책을 둘러싼 문화현상 전반에 대해, 책이 없어진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될 그 모든 것에 대해 말한다.
이 책은 책에 대한 이야기들이므로 어느 나라 사람이 읽든 책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내용이 수두룩하다. 당연히 보편성이 있긴 하지만 독일 작가가 독일이나 유럽 책 위주로 이야기하므로 바로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그 때문에 가독성이 떨어지는 단점도 없지 않다. 책이 얇음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철학박사 출신이라 그런지 글이 참 진지하다. 책에 바치는 헌사라는 소개에 끌렸지만 읽어보니 나는, 작가의 문체에 그리 끌리지 않았다. 어쩌면 나랑 코드가 안 맞는 것일 수도~~ 하지만 책을 사랑하는 공통점은 분명!
헌 책방을 돌며 책을 발견하고 수집한 이야기, 어렸을 때 비싸게 산 책이 지금은 종이값보다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사인해주는 작가의 입장에서 사인본에 대한 이야기, 금지되거나 학대당한 책 이야기 등등 흥미로운 내용들도 많다. 그러나 이 책을 재미있으려면 작가가 어떠어떠한 책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과 독자 자신의 유사한 경험을 떠올려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렇지 않고 페이지를 슬슬 넘기다보면 어느새 끝에 도달해있고 머리는 터~엉해서 이건 뭥미? 하게 된다. 책이 문제인가? 내 독해력이 문제인가? 도리질하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찬찬히 한 번 더 읽으며 내 경험과 연결해 보았다.
그래서 이 리뷰 서두에 ‘빌린 책’에 대해 내 경험을 썼고, “모여있는 책들” 중 ‘보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작가는 읽힌 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p. 163
읽힌 책은 그것을 읽은 독자가 살아온 삶의 일부이다. 심지어는 아주 중요한 장의 특별한 한 단락이 삶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독자가 가장 머물러 있고 싶어 했던 부분, 가장 편안함을 느낀 부분이었다면 언제나 그렇다. 모든 텍스트는 언어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이와 동시에 독자에게는 그 세계를 여행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이따금씩 그 여행을 회상하기 위해서라도 읽힌 책은 여행 기록처럼 보관될 필요가 있다. 여행 기록들이 다 그렇듯이 기억을 생생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이처럼 개인 도서관은 자신만의 독서생활을 위한 기록 보관소이다. 아니, 어쩌면 그 어느 곳보다도 활기차고 웅장한 묘소일지도.
예전에 나는 책을 대부분 빌려서 봤지만 2000년 초반부터 책을 사서 보기 시작했고, 지금은 도서관에서 빌리기도 하지만 스스로 북호더라고 부르면서 그러모으고 있다. 책은 사기 시작하니까 점점 더 많이, 자주 사게 되었고, 재작년부터는 출판사 서평단 활동을 하게 되어 책이 쌓여가는 중이다. 알라딘과 예스24의 중고서점이 활발하게 운영되면서 어떤 이는 읽은 책을 보관하지 않고 바로 중고서점에 판다고 한다. 집에 보관하기 힘들다며.
나는 팔지 않는다. 작가가 비유한 여행 기록들처럼 보관해야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나마 서평단 활동으로 받은 책들은 지인이나 활동하고 있는 북카페, 블로그 이웃들에게 나눔해서 쌓여가는 숫자를 줄이고 있다. 그런데도 북호더의 수집 중독증은 가속도가 붙는지 선호도나 장르의 기준도 없이 모으기만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책들은 책장에 이중으로 꽂히게 되고 이젠 거의 모두 이중으로 올라가고 있다. 작가처럼 개인도서관까지는 아니지만 벽 한쪽은 이제 책장 자리가 되었다. 나만의 독서생활 보관소가 된 것이다. 보고 있으면 제법 뿌듯하다.
처음엔 장르별로 꽂았지만, 최근엔 책표지의 색깔별로 정리하다가, 읽은 책과 안 읽은 책, 읽다가 만 책으로 분류하다가, 나 혼자 아주 난리 부르스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사장 윤성근씨는 저작 <책이 좀 많습니다>에서 애서가들의 서재를 찾아가 그들의 책장을 엿보고 이야기 나누었다. 나는 부러웠다. 우리집에 온 그 누구도 내 책장을 보며 나와 책 이야기를 나누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윤성근씨를 우리집으로 초대하면 할 얘기가 있을라나...
<책에 바침>을 읽으며 종이 책을 사랑하는 사람과 책에 대해 시시콜콜, 두런두런, 이 얘기 저얘기 하는 기분을 맛보았다. 사람과 직접 대화 한다면 좋으련만 내 주위에 그럴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며 오늘도 책 속의 사람을 만난다. 기분에 따라 끌리는 색깔의 책을 집어 색감을 느끼고, 표지를 어루만지다, 단번에 촤르륵 펼칠 때 책장 넘어가는 소리와 거기서 풍기는 종이와 잉크 냄새를 음미한 후 텍스트 속으로 들어간다. 그 곳에서 만나는 사람과 반갑게 인사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