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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2월
평점 :

‘생일을 한번만 더 보내게 해주세요. 제가 그 생일을 잘 보낼게요. 누구도 잊지 못할 생일을 만들 거랍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영원히 기억하겠죠. 하느님께서 베푸신 그 모든 기적을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그렇죠? 저처럼요. 그러니 저에게 하루만 더 주십쇼. 들으셨죠. 하느님. 하실 수 있잖아요.’
지금 하느님과 협상중인 이 남자는 데 라 크루즈 집안의 장남 미겔이다. 별명은 빅 엔젤. <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의 주인공이다. 그는 70세 생일을 앞두고 암선고를 받았고 이번 생일이 아마 생의 마지막 생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흩어져 살고 있는 가족들을 모두 불러모은 것이다.
인간은 살면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산다. 만약 당신에게 살 날이 한 달뿐이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 곧 생일이고 그 생일이 지나면 죽을거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빅 엔젤처럼 조금만 더 살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빌었다가, 내가 왜 이렇게 일찍 죽어야하냐며 억울해 하다가, 남은 시간 의미있게 보내기 위한 방법을 궁리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 빅 엔젤은 어머니의 장례식까지 일주일을 미뤄 자신의 생일 전날에 하고 그 다음날에 생일파티를 하려고 한다. 일타쌍피 작전이다. 그렇게 한다고해서 집안의 큰 어른 빅엔젤의 말에 반기를 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두 번 움직이려면 돈도 두 배로 드니까 모두들 군말없이 참석한 것이다. 우리 상식으론 호로자식이라고 욕먹을 상황인데 멕시코에서는 장례식을 편의에 따라 미루어도 괜찮은 모양이다. 아니면 빅 엔젤네 집안이니까 가능한 것인지도.
이 책으로 멕시코 소설을 처음 만났다. 다산북스에서 가제본 서평단으로 받은 책이다. 기존 북딩스 서평단과 다르게 '완독이'라는 이름으로 서평단을 많이 모집했다. 멕시코 소설은 처음이니 이 책의 작가도 처음 듣는 이름이다.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 작가는 팩트인 본인 가족사와 픽션을 적절히 섞어서 책을 완성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건의 모티브를 차용했지 우레아 가족의 실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한다. 아래는 이 소설 등장인물들의 가계도이다.

가계도를 보면 짐작가능하다시피 이 집 핏줄이 좀 복잡하다. 빅 엔젤의 동생 리틀 엔젤은 이복동생이고 아내 페를라는 결혼전에 아들이 둘이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콩가루 집안이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그것도 우리 상식으로나 그런 것일 뿐이다. 그들이 장례식과 생일파티를 위해 모여서 복닥복닥, 아웅다웅, 치고 받는 걸 보면 아주 가관이다. 욕질과 야한 말투는 기본이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소리를 낄낄대며 해대는데 처음엔 적응이 좀 안됐다. 멕시코 소설을 처음 읽어서 그런가 싶다가 아니 멕시코 사람들이라고 다 저러진 않겠지 싶었다가,
‘아, 작가가 표현하고 싶었던 편안한 가족의 이미지가 이런 스타일이었나 보다.’ 하고 이해했다. 계속 읽어나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큭큭 웃고 있었다. 되도 않은 농담은 서로의 친밀감을 확인하는 것이었고 욕설과 야한 말투는 애정표현이었다. 그 속에는 가족간의 끈끈한 애정이 흐르고 있었고 빅 엔젤의 생일을 맞아 모두 모여 지난 날을 추억하며 사랑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 소설은 장례식과 생일파티 이틀 동안 벌어진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사이사이에 등장인물 소개와 그들의 지난 역사와 사건들을 촘촘히 배치해 두어서 시간적 배경이 헷갈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구성이 이 소설의 가지를 뻗어나가 풍성한 잎들을 피워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나처럼 멕시코 소설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처음에 좀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읽어나가다보면 시트콤의 한 장면 같은 대사에 웃게 되고 미워할 수 없는 빅 엔젤의 어리광에 애잔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는 아버지처럼 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미국에서 살고 싶어 어릴 때부터 고생도 많이 했다. 아내 페를라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사랑에 빠진 것처럼 살고 있는 로맨티스트이고, 막냇동생 리틀 엔젤에겐 아버지같은 존재다. 그랬던 빅 엔젤이 이제 늙고 병들어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다.
생일파티 날 목욕을 시켜주는 아내와 딸 앞에서는 투정을 부리는 아이가 되었어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딸에게 자신의 주요 부위는 보지 마라는 말을 할 정도다.
그러고는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날 용서해주겠니?”
“뭘요?”
그는 허공에 손을 저었다.
“미안하다.”
“그러니까 뭐가요 아빠?”
“다 미안해.”
그는 눈을 뜨고 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네가 아기였을 적에, 내가 널 씻겨주었는데.”
미니는 눈이 따갑지 않은 베이비 샴푸를 짜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네 아버지였어. 그런데 지금은 네 아기가 되었구나.”
빅 엔젤은 훌쩍였다. 물론 딱 한 번뿐이었다.
자식을 키울 때 아버지는 누구보다 큰 사람이었는데 불과 몇 십 년만에 아기가 되어 도리어 보살핌을 받아야하는 존재가 되다니... 그것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힘겨운 현실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섭리인 것을. 이 장면을 읽다가 내 경험이 떠올랐다. 친정엄마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다쳐서 우리 집으로 모셔왔고 내가 목욕을 시켜드릴 때였다. 늙으니 딸한테 도움은 못주고 이런 거나 시키고 미안하다고 하시는데 내 맘도 좋지 않았다.
“괜찮아요. 어릴 때 엄마가 저를 많이 씻겨 주셨잖아요.” 라고 했지만,
“그래도...”라면서 계속 미안해 하셨다.
그 상황을 견디기 어려우셨던 듯 하다. 어린 자식을 씻기고 먹일 때만해도 팔팔했던 부모는, 자신이 나중에 돌봄을 받을 처지가 되리라는 건 상상도 못하니까 말이다.
빅 엔젤이 리틀 엔젤에게 아버지의 경찰용 오버코트를 건네줄 때 그들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들에게 아버지는 정말 큰 사람이었는데 옷을 보니 너무나 작은 것이었다. 아들은 어릴 때 아버지가 세상의 전부이고 가장 커보였지만 자신이 어른이 되어 보니 실제로 아버지는 그리 크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리틀 엔젤은 형에게 본심을 커밍아웃하기에 이른다.
“난 평생 살아남기 위해서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어쩌면 형에게서조차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그런데 이제 형이 날 떠나려 하고, 나는 형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가 없어. 난 언제나 생각했어. 내가 원했던 아버지를 가졌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그리고 이제껏 내가 원했던 아버지는 사실 형이었어.”
서로 못잡아먹어 안달하듯 으르렁 댔었지만 그에게 형은 큰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마지막 생일을 맞아 가족이 모두 모여 지지고 볶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지난 날을 회상하며 추억에 젖고 사랑을 확인하고 곧 떠날 모두의 아버지 빅 엔젤을 마음 속에 더 꼭꼭 담아두는 의식을 치르는 것이었다. 작가는 생일파티를 위해 모인 데 라 크루스네 가족들의 좌충우돌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이렇게 말하려는 것 같다. 인생은, 가족은, 그리 아름답고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라고. 하지만 공유하고 있는 기억들이 있기에 우리네 삶이 풍요로웠음을, 추억할 거리가 있고 살아갈 힘이 난다는 것을. 떠나는 사람은 가고 싶지 않고 보내는 사람도 힘겹지만 그 또한 인생이라는 것을...